"누구보다 풍요로운 한가위".. 장애와 나이에 맞선 검정고시 합격생들
휠체어·목발 의지한 지체1급 팽민숙씨 '공부벌레' 스토리
경기도 화성 장애인야간학교에서 만난 최두용(53)씨의 든든한 버팀목인 전미영 평생교육사는 최 씨의 표현을 대신 전달했다.
뇌병변 3급의 장애를 가진 최 씨를 위해 전 교육사는 통역에 나섰다. 3년 가까이 야간학교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이제는 눈빛과 몸짓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최 씨는 뚜렷하진 않아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번 추석이 누구보다 풍요로울 것이라고 전했다.
'합격', '성공'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지난 53년이었지만, 최근 치른 초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최 씨는 "추석에 모일 가족들에게 합격증을 보여 줄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다"고 말했다.
◇ 4전5기의 신화… "여자친구 만나 행복한 가정 꾸리려고"
23일 현재 최 씨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초졸 검정고시를 4차례 떨어지고 다섯 번 만에 합격한 즐거움도 잠시, 최 씨는 야간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2018년도 제2회 초졸·중졸·고졸 검정고시가 지난달 8일 전국 시·도 교육청 주관으로 시행된 가운데 경기지역의 경우 6573명이 응시해 4902명(합격률 74.58%)이 합격증을 받았다.
최 씨처럼 장애를 딛고 시험에 응시한 40명 중 10명도 각각 초졸(3명), 고졸(7명) 시험에 합격했다.
최 씨는 선천적 장애 때문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어도 친구들의 놀림이 계속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일찌감치 집안 농사일을 도왔다.
10여 년 전 아버지와 사별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최 씨는 지인의 권유로 2016년 야간학교를 찾았고 "공부를 해보자"는 결심이 섰다고 했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그에게 한글과 숫자를 깨치는 것은 농사일 보다 몇 배는 어려웠지만 최 씨의 도전정신을 꺾진 못했다.
학교에 오전 9시30분에 나와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듣는 내내 최 씨는 모르는 내용이 있을 경우 이해할 때까지 선생님께 묻고 또 물었다.
교실 맨 앞은 최 씨의 전용 자리였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기 위해서라고 했다.
학생 대표격인 야학 반장이기도 한 최 씨는 시험에 계속 도전하는 이유에 대해 "미래의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밝힌 최 씨.
그는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 때마다 나를 위해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며 "모든 수업이 다 재밌지만 그 중에서도 국어가 제일 재밌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글 속의 숨은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이어 "내년 4월에 있을 중졸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 합격 비결은 '오답노트'… "오롯이 내 걸 만들고 싶었어요"
경기도 오산 소재의 또 다른 야간학교에서 만난 팽민숙(54·여)씨도 올해 맞는 추석을 잊지 못할 것 같다며 초졸 검정시험 합격담을 들려줬다.
지체1급의 장애로 휠체어로 이동하고 목발에 의지해야 하지만 팽 씨의 공부에 대한 열의만큼은 선생님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다.
3살 때 찾아온 소아마비로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신체적 불편함과 어려운 가정 형편은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꿈조차 앗아갔다.
4남 2녀의 막내인 팽 씨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 속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특유의 쾌활한 성격으로 극복해왔다.
그는 "장애는 몸이 좀 불편할 뿐이지, 마음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며 "항상 긍정적이고 젊은 생각을 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장애인 이동 차량을 이용하다보니 경기도 수원의 자택에서 오산 야간학교까지 통학 시간만 2시간이 넘지만 팽 씨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학교를 찾는다고 했다.
남다른 이해력으로 3개월 만에 초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학교에서 '공부벌레'로 불리며 지금은 중학교 과정을 배우고 있다.
팽 씨는 "지금까지 살면서 '내 꺼'라는 걸 갖지 못했는데, 졸업장 하나 없는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며 "폭염 때문에 고생한 지난 여름, 에어컨 없는 집에서 새벽 2시까지 '오답노트'를 만들어 공부한 것이 합격의 비결인 것 같다. 말로 표현 못할 만큼 뿌듯하다"고 밝혔다.
그의 가방 속엔 그동안 틀린 문제와 다시 풀이한 내용이 정리된 오답노트가 가득했다.
27살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올해 추석에 만날 오빠들과 언니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며 가족들에게 보여줄 합격증을 자신 있게 꺼냈다.
팽 씨는 "이젠 딸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 맞춤법을 틀리지 않고 쓸 수 있다"며 "지금까지 살면서 운전면허 말고는 합격증이 없었지만 스스로 노력해 얻은 검정고시 합격증이 이번 추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열심히 공부해 내년 4월 중졸 시험에 응시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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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신병근 기자] sbg@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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