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고발' 검사 임은정 인터뷰 "이명박근혜 지킴이도 정치검사들이었다"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경향신문] ㆍ‘내부고발’ 검사 임은정
검사 임은정(45·사법연수원 30기·현 청주지방검찰청 충주지청 부장검사)은 대표적 ‘내부고발자’다. 2012년 상반기부터 검사게시판 ‘이프로스’와 페이스북에 검찰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끊임없이 올렸다. 자신이 직접 겪거나 동료들로부터 들은 내부의 부당한 관행이나 불의에 대한 폭로도 멈추지 않았다. 2012년 과거사사건 재심에선 양심을 속일 수 없어 ‘백지구형’을 하라는 상부 지시를 거역하고 ‘무죄구형’을 해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받고 퇴출 위기까지 겪었다. 그는 정권이 바뀌고서야 강제 퇴출 시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임 검사와의 인터뷰는 좀처럼 가능하지 않았다. 검사윤리강령과 검찰청 공무원 행동강령상 검찰 소속 공무원의 인터뷰는 기관장 사전 승인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사람은 그대로’인 검찰에서 임 검사의 ‘입’은 ‘화약고’와 같기에, 수뇌부로선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법무부는 지난 17일 검사가 대외적으로 의견을 밝힐 때 소속 기관장의 승인 없이 사전에 신고만 하면 되도록 검사윤리강령을 개정했다고 밝혔다. 그 이면에 임 검사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임 검사와의 인터뷰는 강령 개정 전인 지난 15일 서울 정동에서 이뤄졌다. 그에 대한 인터뷰 승인은 앞서 지난 4일 떨어졌다.
- 두달여 전까지만 해도 임 검사와의 인터뷰는 ‘절대 불가’라는 입장을 청주지검장에게 들었는데, 어떻게 승인이 났고, 강령까지 개정됐나요.
“내부고발자들이 내부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부득이 외부로 나가게 됐을 때, 인터뷰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절차 위반의 징계 위험을 감수하는 거라, 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서지현·안미현·최근 박병규 검사의 인터뷰 모두 승인 없이 결행된 것이거든요. 지난 7월 경향신문의 인터뷰 요청 공문이 검찰에 정식으로 접수된 걸 계기로 지휘부에 맞서 싸웠어요.”
- 어떻게요.
“사전 승인제는 검찰 공무원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라 위헌 소지가 있죠. 행동강령을 총괄하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찾아가 검찰 행동강령의 문제점을 알리고 개정 권고를 요청하겠다는 취지의 문서를 작성했어요. 이걸 대검 감찰1과와 법무부 감찰담당관실에 보내고 지휘부와 논쟁을 벌여 승인이 떨어졌어요. 그 과정에서 검찰 소속 공무원의 인터뷰 사전 승인제를 신고제로 완화하는 강령 개정이 추진된 것으로 알아요.”
- 조직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고, 내부의 치부를 밖으로 표출하면 당연히 안에선 좋지 않게 볼 테고 불이익도 감수해야 해요. 그럼에도 내부고발을 계속하는 이유가 뭔가요.
“뜻있는 동료들을 모으고 검찰개혁에 대한 내부여론을 환기시키려고 도시락폭탄을 투척하는 독립투사의 심정으로 글을 지속적으로 써왔어요. 저는 역사를 좋아해요. 1~2년, 10~20년으로 시간을 짧게 끊어 생각하면, 역사가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길게 보면, 역사는 암초를 만나더라도 굽이쳐 돌거나 올라타면서 노도와 같이 결국 흘러가게 마련이에요. 그 시기를 앞당기는 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검사들 언론 인터뷰 사전 승인제서 신고제로 윤리강령 개정 쟁취
임은정 검사가 사람들의 뇌리에 처음 각인된 것은 이른바 ‘도가니 사건’에서다. 2007년 광주인화학교 청각장애인 성폭력 사건의 1심 공판검사였던 그가 ‘법정에서 수화로 소리 없이 울부짖는 농아인들을 위해 대신 싸우겠다’고 다짐하며 쓴 글이 2011년 영화 <도가니>를 계기로 공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 그가 다시 언론에 등장한 것은 2012년 과거사 재심사건에서다. 그해 9월 임 검사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박형규 목사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재심을 담당하면서 ‘백지구형’이 아닌 ‘무죄구형’을 했다. 당시 법정에서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한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무죄 논고문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한편의 서사시와 같은 깊은 울림이 있었던 것이다.
“논고문은 검찰의 최종 의견진술이에요. 피고인은 물론 법정 어느 자리에선가 귀 기울이고 있을지 모를 원혼과 유족에게, 피해자에게, 우리 사회에 보내는 충고와 위로라 생각해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왔어요. 특히 박 목사님의 경우,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며 엄혹한 시대에 십자가를 짊어지신 분이라, 좀 더 사죄와 감사의 마음을 담고 싶었죠. 미리 작성하면 공안통이 주류인 수뇌부에서 보고 안 했다고 트집 잡을까봐 구형 당일 아침 30분 만에 써내려갔어요. 하나님이 박 목사님의 삶을 제 입을 통해 칭찬해주신 거라 그런 글이 나온 거라 생각해요.”
공안부와 지휘부는 ‘검찰 선배들을 모두 권력의 주구로 몰았다’며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임 검사는 3개월 후인 그해 12월 고 윤길중 진보당 간사의 재심에서 공안부와 윗선의 집요한 백지구형 요구를 거부하고 또 무죄구형을 결행했다. 구형 당일 아침 검사게시판에 징계청원글을 예약 게시한 후 법정 검사 출입문까지 안으로 걸어 잠그고서다. 지휘부에서 임 검사 대신 다른 검사에게 이 사건을 재배당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임 검사에게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윤길중 진보당 간사 재심, 공안부·윗선 지시 어기고 ‘무죄’ 구형…그 뒤 5년간 검찰 내부서 생매장당하는 것 같은 괴로움 겪어
- 징계를 감수하면서까지 왜 그랬습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요. 관련 기록을 검토해보니, 당연히 무죄였으니까요. 무죄를 무죄라고 말하는 게 검사의 법적 의무예요. 상부 지시로 다른 검사가 저 대신 들어가 백지구형을 하기로 정해졌을 때, ‘너희들은 검사가 아니다. 내가 대한민국 검사다. 법정 공판검사석에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다’라고 생각했어요. 네가 백지구형 못한다고 해서 다른 검사가 대신 들어가겠다는 건데 왜 그것도 막았냐는 핀잔을 당시 많이 들었는데 방관도 죄예요. 저도 공범이 되는 거예요.”
- 정직 4개월의 징계 통보를 받았을 때 어떤 심경이었나요.
“징계하라고 몸을 던지면, 백지구형이 옳은지 제대로 법리검토를 해줄 것으로 믿었어요. 백지구형은 형사소송법 302조와 검찰청법 4조에 따른 적법한 구형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대검과 법무부는 징계 과정에서도 형사소송법, 검찰청법, 대검 지시공문도 못 본 체하며 상명하복만 앵무새처럼 읊조렸죠. 검사징계위가 열려도 끝까지 저는 우리 검찰이 이성적으로 무혐의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늦은 밤 지하철로 귀가하는데 한 줄 속보가 뜨더라고요. 정직 4개월 의결됐다고. 그날….”
그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목이 메어 목소리는 낮게 갈라졌다.
“지하철 역사를 나오는데 하늘에서 눈이 내렸어요. 사무치게 시리고 많이 억울했어요.”
- 단순히 정직 4개월을 넘어 5년 가까이 많은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알아요.
“이런저런 배제와 불이익, 괴롭힘이 있었죠. 근속기간 원칙을 무시하고 창원으로 발령 났고, 보복배당이다 싶을 때도 종종 있었고 동기보다 승진도 2년7개월 늦었어요. 내부게시판에 올린 제 글에 달린 조롱성 댓글도 아프지만, 글을 쓸 때마다 부장실, 차장실, 검사장실로 불려다니며 인사 포기하지 말라는 회유와 징계하겠다는 경고에 시달렸어요. 얼굴도 모르는 후배가 굳이 내부망으로 말을 걸어 ‘임 검사님, 검사들이 욕하는 거 아시죠?’라고 한 일도 있고요. 가까웠던 후배가 제 인사를 못 들은 척 굳어진 얼굴로 스쳐 지나갈 땐,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 일종의 왕따였던 건가요.
“불가촉천민의 삶이 이런 건가 싶었죠(웃음). 저는 2005년 5년차 검사시절부터 실무 수습 온 사법연수원생의 지도검사로 후배 지도를 해왔는데, 무죄구형 후부터 사법연수원생들을 제 방에 배치하지 않는 등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어요. 반면 세평 수집 명목으로 감시는 집요했어요. 저와 친한 후배가 임은정의 부역자로 놀림받기도 했고요. 선택한 길이니 감수는 하겠는데 생매장당하는 것 같아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 어떻게 버텼습니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마음을 전해준 동료들도 있었고 밖에서 응원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옳으니까, 결국 이길 것을 알았으니까요.”
- 현재는 검찰에서 직권으로 재심청구를 하고 무죄구형을 하고 있어요. 보람을 느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보람을 느끼지만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요. 검찰이 검찰권을 남용해 억울한 사람들을 기소해 실형을 살게 하면 안됐고, 누명을 좀 더 빨리 벗겨줬어야 했어요.”
“백지구형 거부로 ‘4개월 정직’…퇴근길 속보 보며 눈물 차올라”
- 임 검사를 두고 의도를 의심하며 부정적 평가를 하는 검찰 간부들도 적지 않아요. 공명심이 강해서라거나 유명해지고 싶어서, 또는 정치에 뜻이 있어서 돌출행동을 한다는….
“2012년에도 윗선과 징계위에서 제가 무죄구형 전후로 정치권, 언론과 접촉을 했는지 물었어요. 검사인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질문이었어요. 각자의 안경으로 세상을, 사람을 보는 거니까요. 그런 분들이야말로 정치권, 언론과 접촉하여 사건을 처리하고, 출마하려고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어요. 또 무죄구형 후 최교일 당시 검사장을 비롯한 동료들이 제게 ‘직’을 걸 일이냐고 했는데,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는 것은 검사의 본분이에요. 검사의 직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검사의 구형의무가 너무 무거워서 직을 거는 거예요.”
- 실제로 정치권에서 영입 제안은 없었습니까.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어느 변호사님을 통해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영입 제안을 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거절했어요.
- 왜요.
“검찰 후배들에게 ‘검사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많은 보기 중 하나로서 자리매김되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에요. 그때가 제가 심층적격심사에 회부돼 퇴출 위기에 처해 있을 땐데, 여기서 포기해버리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잖아요.”
- 지금도 그 결정에 후회가 없습니까.
“진모 검사가 영장회수 사건을 겪고 연락해와 감찰 요청하는 것을 보고, 또 안미현 검사가 그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것을 보고, 버틴 보람이 있구나 했어요.”
- 검사로 살아오면서 ‘직’을 걸 결심을 한 건 과거사 재심사건 말고 또 있었나요.
“가장 먼저는 이명박 정부 때 법무심의관실에서 근무하면서 상부 지시로 노태우 전 대통령 국립묘지 안장 자격에 대한 법리 검토를 하면서였어요. 당시 청와대 뜻에 따라 법무부에서 내란목적살인 등의 유죄판결이 있음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됐으니 결격사유가 해소됐다고 법적 해석을 뒤집었거든요. 민정수석실과 김경한 장관의 의지가 강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결국 TK출신인 이 대통령의 뜻이겠죠. 황당했어요. 그해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던 날, 집 인터넷망이 고장난 상태에서 노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줄 알고 국립묘지안장심의회에서 반대의견 제시하고 사표 쓸 각오로 비장하게 출근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었어요. 그런데 2011년 안현태 전 장군이 결국 같은 논리로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니, 잘 지켜봐야 해요.”
- 2015년 12월 심층적격심사 대상에 올랐어요. 그에 앞서 2015년 하반기에 병가를 냈었지요.
“무죄구형 때 법무부 모 간부가 ‘저런 XXX이 있나. 저X 적격심사 얼마 남았어’라고 했다는 말을 후배에게 전해들었어요. 이후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죠. 2015년 상반기에 병가를 낸 것은 난임시술(그는 무죄구형 딱 1년 후인 2013년 12월28일 결혼했다) 이유도 있었지만 트집 안 잡히려 자리를 피한 것도 있어요.”
- 난임시술은 어떻게 됐나요.
“시험관 시술을 통해 착상에 두번 성공했고 아이 심장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어요. 그 두근거림을 평생 기억할 거예요. 몇 주 만에 결국 사산 판정을 받았거든요. 마음이 사무치게 고단하던 2015년 11월 동료가 연락해 ‘행정소송에서 지겠지만 일단 자르기로 했다고 하니, 준비하시라’더군요. 아마 그때 법무부에서 심층적격심사에 저를 회부하기로 결정난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대성통곡했어요.”
- 아무래도 엄마의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요.
“솔직히 검찰 때문에 아이들을 잃었다고 생각해요.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사 사건 등에서 우리가 검찰권 남용으로 많은 사람들을 너무도 고통스럽게 했잖아요. 지금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고 있지만, 그분들이 겪은 고통의 1만분의 1, 10만분의 1을 하나님이 제게 알게 해주신 것 같다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통한의 세월과 고통을 제대로 알아야 검찰이 진정으로 사과하고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요?”
MB정권, 노태우 국립묘지 안장 자격 부여 때도 ‘사표 쓸 각오’
- 2013년 5월 징계취소소송을 제기했지요.
“중징계 전력을 그대로 두면 조만간 다가올 적격심사 때 자를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겠다는 우려도 있었고, 징계사유 중에 ‘마치 검찰이 부당한 구형을 하고 과거사에 대한 입장이 잘못되었다는 취지로 해석되는 글을 내부게시판에 올려 외부에 전파되도록 하여 검사로서의 체면이나 위신을 손상하는 행위를 하였다’는 문구가 있었어요. 이 사유를 그대로 확정시키면, 백지구형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어서 내버려둘 수 없었어요.”
- 결국 징계 후 4년8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임 검사에 대한 징계취소 판결이 나왔어요. 적격심사는 2016년 1월에 통과됐고요.
“2012년 위법한 지시와 부당한 징계를 한 지휘라인에 대한 책임을 묻고 공개 사과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1심부터 승소했지만, 법무부는 항소·상고로 재판을 질질 끌며 징계시효 3년을 도과시켰어요. 소송 과정에서 관련자들 중 검사장 승진을 목전에 둔 이들이 대법원 판결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번 사법농단 문건들을 보니 당시 법무부와 법원행정처가 거래한 게 아닌지 몹시 의심스러워요.”
- 검찰은 임 검사가 소송을 하면 뻔히 질 줄 알면서도 왜 중징계를 하고, 적격심사를 통해 잘라내려 했을까요.
“내부자 질타가 밖의 질책보다 아프니까요. 다른 검사들이 동조하면 큰일이잖아요. 이탄희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갔다가 사표를 던진 소동에 소장판사들이 들고일어나서 사법농단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요.”
- 시민들이 검찰을 불신하는 근원에는 ‘권력 유착’ 의혹이 있어요. 재벌권력, 정치권력, 힘 있는 자들 편에 서서 수사·기소권을 남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죠.
“사법농단 관련 판사들이나 문체부 블랙리스트 공무원들이나, 출세를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가가 목표인 거죠. 자신의 일을 가볍게 여기고 가고자 하는 자리를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보지 못해요. 아니, 보지 않는 거죠.”
- 얼마 전 특수통으로 유명했던 함승희 전 강원랜드 사장이 30대 내연녀와 사용한 법인카드 내역과 갑질이 큰 파장을 일으켰어요. 그동안에도 ‘스폰서 검사’ ‘벤츠 검사’ ‘브로커 검사’ ‘성폭력 검사’ 등 검사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비리사건이 끊이지 않았죠. 왜일까요.
“법을 적용하는 기관이지 법을 적용받는 기관이 아니라는 그릇된 의식 때문이에요. 치외법권인 거죠. 남들이 받으면 뇌물이지만 내가 받으면 선물이고, 내가 후배를 추행하거나 때리는 것은 격려와 애정표현이라는…. 검찰은 사람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거 폭행, 상해로 처벌하면서, 독직폭행 조항이 있음에도 사람을 때려서 자백을 받기도 했고 2003년에도 그래서 중앙지검에서 사람이 죽어나갔어요. 권한이 의무가 아니라 권력이 될 때, 그 권력을 견제할 기구가 없을 때 예외없이 부패해요.”
-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과 상고법원을 거래하려 한 의혹이 있어요. 정치권과의 결탁 면에선 지금껏 검찰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요. 정치검찰의 오명을 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요.
“검찰 간부들이 정치권이 인사로 목줄을 쥐어서 그렇다고 남 탓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틀렸어요. 검사들 탓이에요. 출세를 위해 영혼을 판 검사들, 기꺼이 부역한 검사들, 알고도 침묵한 검사들, 지레 포기하거나 냉소하며 외면한 검사들…, 모두의 책임이죠. 모 후배가 정치권에서 독립시켜주지 않는다고 하길래, 독립은 시켜주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거라고 말해줬어요. 그런 사고로는 정치권 압력을 버텨낼 수 없으니까요.”
- 검찰이 정치검찰 오명을 벗고 새로 태어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봅니까.
“자정능력이 회복돼야 하지만, 사람이 그대로인데 갑자기 자정능력을 회복하긴 어렵지 않겠어요? 위법한 명령을 내린 자와 기꺼이 굴종한 자들에게 그 지위와 책임에 합당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 위법한 명령에 따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줘야 하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조속히 도입해, 위법한 지시를 한 상급자들을 고발할 제3의 기관을 만들어야 해요. 우리 검찰은 인사로 1~2년마다 어디로 갈지 몰라요. 또 매일매일 배당과 결재로 검사들을 괴롭힐 수 있는 구조예요. 인사의 예측 가능성과 공정성을 제고하면, 검사들이 그래도 할 말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검사들 ‘치외법권’에 있다는 그릇된 인식…위법한 명령 내리고 굴종한 자들에게 합당한 책임 물어야
- 2016년 10월 검사가 업무 스트레스와 상사의 상습적 폭언·폭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어요. 검찰의 상명하복 문화, 어느 정도인가요.
“작년까지 법무부가 제 행정소송에서 공식 문서로 주장한 게 상급자의 지시가 중대하고 명백하게 위법일 때만 복종의무가 없고, 중대하고 명백한 위법인지는 원칙적으로 그 하급자가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거였어요. 검찰의 상명하복이 조폭의 그것과 다른 점은 정의로서의 법과 원칙이 우선한다는 것인데, 종래 법무부 주장은 거의 조폭 수준의 상명하복인 거예요. 양승태의 대법원은 김기춘·우병우와 거래했지만, 우리 검찰은 김기춘·우병우의 지시를 받지 않았겠어요?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지탱한 주축은 법원이 아니라 검찰이에요. 위법하고 부당한 지시가 관철되는 조직문화이기에 간부의 성희롱, 폭언들도 용인되는 거예요.”
- 문재인 정부는 검찰개혁을 약속하며 출범했고, 지난해 대검찰청 검찰개혁위원회도 구성했어요. 내부자로서 검찰개혁에 진전이 있다고 느끼나요.
“검찰이 국정농단, 사법농단 등 대형 이슈들을 수사하면서 검찰개혁이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듯해 우려스러워요. 검찰은 번번이 그런 식으로 검찰개혁을 피해왔어요. 검찰은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 현 정부 첫 검찰 최고 수장인 문무일 총장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합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처음엔 좀 기대를 했는데, 2015년에 벌어진 서울남부지검 성폭력범죄에 대한 조직적 은폐와 관련한 감찰과 수사 요구를 묵살하고, 이의제기절차 지침을 만들기는 했는데 안 하느니만 못한 규정을 비공개 예규로 만들어 오히려 상명하복을 강화한 일 등을 겪으면서 기대를 접었어요. 노력은 하시는 것 같은데 시대의 요구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잘못된 조직문화에 워낙 젖어 있던 분이다 보니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을 듯해요.”
- 정부가 내놓은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검찰이 너무도 문제가 있어 개혁 대상이 됐어요. 검찰이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아무 말을 못했던 사람들이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면 답답해요. 검찰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때까지 스스로 변화하는 노력을 해야지, 수사권 조정안에 대해 반대부터 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생각해요.”
대형 이슈들 수사하며 검찰 개혁 후순위로 밀려…문무일 총장, 노력하고 있지만 시대의 요구엔 부족
임 검사는 우리 사회의 미투운동에 불을 지핀 서지현 수원지검 청남지청 부부장검사(45·사법연수원 33기)의 성추행 피해 사실 폭로 때도 추가폭로 등을 하며 힘을 보탰다. 서 검사 성추행 피해 당시 서 검사를 만나 피해 진술을 요청하고 감찰에 협조하도록 설득했으며 그 과정에서 최교일(56·현 자유한국당 의원) 당시 검찰국장이 불러 “피해자가 가만히 있는데 왜 들쑤시느냐”고 질책했다고 페북에 밝혔다. 또 자신이 2003년 직속상관에게 입은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2015년 후배 여검사를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는 진모 전 검사에 대한 조직적 비호가 있었다며 전·현직 검사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 서 검사의 폭로로 꾸려진 ‘검찰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을 불구속 기소하는 것을 끝으로 사실상 해산했어요. 조사단에 몇점을 주고 싶나요.
“40점이오. 여론의 압박 속에서 맘고생이 컸으니 그나마 40점을 준 거예요. 하지만 결과물은 조사단에 수사 의지가 없었음을 명백히 드러냈어요. 안태근 전 검찰국장에 대한 증거가 충분한지 이런저런 뒷말이 있는 데다, 무엇보다 검찰이 개인적 범죄에 대해서만 수사하고 ‘은폐’라는 조직적 범죄에 대해선 눈감았으니까요.”
- 최교일 의원은 임 검사의 폭로에 대해 “명예훼손”이라며 부정했어요. 소환조사도 거부하고 안 전 검사장 재판에 증인으로도 나서지 않고 있고요.
“절대 안 나오겠죠. 그분은 많이 유하신 편으로 상명하복을 중시하는 검찰 조직문화에서 승승장구한 전형적인 검사예요. 저를 아껴준 고대 선배이기도 해서 마음이 많이 불편해요. 최 검사장님이 증인으로 나오면 제가 증인으로 불려가는 모양인데, 그래도 사실대로 증언해야죠.”
- 2015년 후배 여검사를 강제추행한 혐의를 받는 진모 전 검사에 대한 조직적 비호가 있었다며 지난 5월25일 김진태 당시 검찰총장과 김수남 당시 대검차장을 비롯해 이모 당시 감찰본부장, 장모 당시 감찰1과장, 오모 당시 서울남부지검장, 김모 당시 부장검사 등을 고발했어요.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제가 매달 참고자료를 제출하고 있어요. 지난달까지는 빨리 고발인 소환조사해달라고 독촉하다가, 이번달부터는 차라리 경찰청에 수사지휘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있어요. 그 사건에 직접 관련된 당시 감찰1과장이 올해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당시 조직적 은폐에 가담한 당시 대검 대변인 등이 검사장으로 같이 승진했는데, 이런 검찰이 수사의지가 있을까요?”
- 황교안 전 총리의 대통령 출마설이 꾸준히 나오고 있어요. 어떻게 봐요.
“수오지심(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거죠. 법과 원칙을 말하는데, 그 사람들의 법과 원칙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이명박 정부 첫 법무부 장관인 김경한 장관도, 황교안도 미스터 법질서란 별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돼 있으니 그들의 법질서는 뭘까요? 대통령의 그와 같은 폭주를 알았다면 공범이고, 몰랐다면 무능한 건데, 그걸로 충분히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나요?”
그의 성장 과정이 궁금했다. 그는 1974년 부산 대신동에서 태어났고, 헌책방 골목으로 유명한 보수동에서 성장했다. 부모는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딸 셋을 키웠다고 했다. 임 검사는 막내였는데, 집안형편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 딸부잣집 막내면 부모님 사랑을 많이 받았겠어요.
“부모님이 공부에 한이 많으셔서, 교육열이 뜨거웠어요. 딸 셋이 내려갈수록 공부는 잘하는데 못생겨서(웃음),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 사랑을 쟁취했어요. 부모님이 첫째는 교수, 둘째는 의사, 셋째는 법관을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셨는데, 검사가 됐으니 제가 소원 하나는 이루어드린 셈이에요. 제 적성에도 딱 맞고요.”
- 어렸을 때는 어떤 아이였나요.
“아주 늦게 트인 아이였어요. 여덟, 아홉살 때까지 말이 어눌하고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 낙제점을 받았어요. 한글을 익힌 후 책을 좋아하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공부를 잘했어요.”
- 주로 어떤 책을 즐겨 읽었나요.
“초등학교 때는 세계문학전집과 김소월 시집, 윤동주 시집에 빠졌어요. 시 외우길 좋아했고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간 적도 많았어요. 고전은 <논어> <맹자>, 역사소설은 <삼국지>, 역사책은 <사기>를 좋아해요. 임관하고 나서도 제가 감정이 메마르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시를 읽어서일 거예요.”
- 성격은 어땠나요.
“왜?라는 의문을 쉽게 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 같아요. 낙천적이고 밝아 친구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중·고교 시절 사춘기는 호되게 보냈어요. 우리집이 가난한 것과 심한 외모 콤플렉스로 부모님께 반항을 많이 했거든요.”
- 많이 가난했나보군요.
“아휴, 아니에요. 언니들 옷 물려입기 싫고 고기 반찬 실컷 먹고 싶어서였죠(웃음). 당시 아버지는 쌀 배달하는 자전거로 저를 등·하교를 시켜주셨는데 어느 날 아버지께 대들다 대판 다투고 사흘간 학교에 걸어서 갔어요. 나흘째 되던 날 아버지가 자전거로 쫓아오면서 타라고 하셨어요. 못 이기는 척 올라탔는데 바람결에 아버지 등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숨소리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내가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2 때 그렇게 사춘기가 끝났어요.”
- 그런 부모님인데, 딸이 징계받았을 때 상심이 크셨겠어요.
“2012년 무죄구형 전 징계청원을 하고 부모님께도 ‘제가 무슨 짓을 할 건데 신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으니 마음 비우시라’고 미리 알렸어요. 며칠 후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며 뜻을 바꿔줄 수 없냐고 사정하셨죠. 아버지는 3월8일 암수술을 받으시고 한달간 입원하셨는데, 부모님은 저 몰래 우시고, 저는 부모님 몰래 울었어요. 퇴원 후 어느 날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은정아, 아빠 힘들었다. 독립투사들이나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 부모들은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 지금 아버지 상태는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아버지는 딸이 검찰총장이 되기를 학수고대하며 딸의 인사에 일희일비하던 분이세요. 그런 분이니 제가 징계를 받고 보수신문들에서 피의자와 검사실에서 성관계를 맺은 모 검사 등과 함께 도매급으로 ‘부끄러운 검사’로 매도당하고, 부임지를 남에 번쩍, 북에 번쩍 옮겨다니는 걸 보며 너무도 힘들어하셨죠. 지금도 성에 좀 안 차하시긴 해도 우리 딸이 잘했다고 뿌듯해하세요. 아마도 이 인터뷰 기사가 나오는 경향신문 토요판을 부산에서 싹쓸이하셔서 동네에 뿌리고 다니실 거예요(웃음).”
“딸바보 아버지 제 인터뷰 나온 경향신문 토요판 싹쓸이해 동네에 뿌리실 것”
- 1993년 고대 법학과에 입학했는데, 대학생활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어려서부터 춤추는 걸 좋아해 1학년 때는 고대 응원서클 영타이거에서 활동했어요. 덕분에 검사가 되고 나서 노래방에 가면 ‘젊은 그대’를 부르다 제 동작이 커서 뒷사람이 맞기도 했죠(웃음). 2학년 땐 운동권도 아닌데 얼떨결에 끌려가 법대 여학생회장이 됐어요.”
- 사시에 비교적 빨리 합격했더군요.
“재학 중에 사시에 합격하려고 두번 휴학했어요. 5학년 때 1차를 두번 도전 끝에 합격했고 6학년 때 2차 합격했어요.”
그는 천성이 명랑해 보였고 말은 속사포처럼 빨랐다. 오후 2시에 만났는데 시계는 어느덧 오후 7시를 가리켰다. 사위는 이미 어두웠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검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돌아온 답은 상투적인 듯했지만 진리를 담고 있었다.
“검사선서문에서 검사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가 되겠다고 다짐해요. 그런 검사를 닮으려고 노력해야죠. 그게 검사니까요.”
박주연 오피니언 팀장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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