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는 어디에
[경향신문] ·근대까지의 문헌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초상화가 소장된 곳은 다섯 곳이다. 통영 착량묘, 한산도 제승당, 순천 예교 신성포, 여수 장군도, 아산 현충사이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미 사라진 착량묘 초상화만이 나온다.
충무공 이순신. 우리 국민이라면 모두 다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명백한 근거를 가진 조선시대 실물 초상화는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그의 생김새를 전해주는 기록도 몇 개 되지 않는다. 다만 사후에 그려진 초상화의 희미한 흔적들이 있다.
이순신에 대해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단정하고 삼가는 용모였기에 수양하는 선비 같았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담력과 용기가 있어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라고 했다. 이당 김은호는 1950년 그 기록과 실물은 사라지고 사진만 남은 ‘벌교본’이라는 한 장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이순신을 그려 전남 순천 충무사에 봉안했다. 김은호는 “충무공의 화상이었다고 전해지던 것으로 전남 벌교에 보존되어 있었다. 이 진본은 왜정 때 일본사람이 없애버리고 다만 이중화가 그 사진 한 장을 구해 가지고 있었다”(<서화백년>)고 연원을 남겼다.
‘벌교본’ 초상화는 여수 충민사 소장 초상화 국어학자 이중화는 김은호에게 그 사진과 이순신 모습에 대한 고증문헌을 제공했고, 김은호가 그린 ‘무장본(武裝本) 이순신 초상화’를 한산도 제승당에 안치하는 봉안사(奉安使)로 참여했다. 이중화는 김은호와 장우성(현충사 표준 영정)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초상화의 시작이자 끝인 인물이다. 먼저 ‘벌교본’에 대해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일이 있다. 모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벌교본’은 북한 화가 오택경이 1950년대에 그린 이순신 초상화다. 이중화가 소장했던 ‘진본 벌교본 초상화 사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벌교본’의 진실은 황의돈의 <증정(增訂) 중등조선역사>(1929)에 있다. 이는 1926년에 저술한 <중등조선역사>의 증보개정판이다. 이중화가 증보개정판에 도움을 주었다는 서문 내용과 본문에 삽입된 이순신 초상화 때문이다. 1929년판에는 1926년판에 실린 장세기의 <초등대한역사>(1908) 속의 목판화 대신 새로운 초상화 사진이 있다. 비슷한 시기인 <조선일보> 1929년 4월 17일자에는 더욱 자세한 정보가 나온다. ‘이 사진은 공이 임진년 당시까지 계셨던 전라좌수영인 여수군 마래산 밑에 있는 충민사에 봉안한 영정을 찍어온 것이다.’
이중화를 중심에 놓고 <조선일보>와 함께 보면 ‘벌교본’은 1920년대에 여수 충민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상화다. 20년이 지나면서 ‘충민사 초상화’가 ‘벌교본’으로 와전된 듯하다. 그 초상화는 장도빈이 1925년에 쓴 <이순신전>에는 출처 표시 없이 나온다. 충민사 초상화는 적어도 1925년 이전에 그려졌다.
불타고 사라진 이순신 초상화들 1615년에 여수 고소대에 세워진 좌수영 대첩비(보물 제571호)의 비문(碑文)에는 이순신의 개략적인 삶과 대첩비를 세우게 된 전말이 나온다. 전란이 끝난 뒤, 이순신을 기념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은 체찰사 이항복은 사당 건립을 통제사 이시언에게 지시했다. 1601년 이시언과 과거 이순신 막하 장수, 그리고 군사들 1000여명이 기꺼이 모여 채 10일도 되지 않아 사당을 완성했다. 여수 충민사다.
비문에는 ‘초상화를 인각(麟閣·공신의 초상을 걸어놓은 누각)에 그려 넣어 끝없이 보답해야 마땅하다’라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실제 그려졌다면 관청 소속 화가에 의해 공신 초상화 형식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또한 선조의 특별명령에 따른 사당이고, 체찰사와 통제사가 주관했고, 시기적으로는 이순신이 전사한 3년 뒤이며, 과거의 부하들과 군사들이 모여 건립했다는 점에서 보면 여수 충민사에 초상화를 그려 봉안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게다가 생전의 이순신과 일치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사한 초상화로는 임진왜란 당시 선무공신 초상화 4점이 있다. 무신들인 권응수(2등), 조경(3등), 이운룡(3등)의 초상화는 모두 관모를 쓰고 관복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여수 충민사 초상화도 똑같다. 얼굴 모습도 <징비록>에서 묘사한 느낌과 유사하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충민사 초상화는 상상화가 아니라 진짜 이순신 초상화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상범의 기록을 보면, 1931년 이전에 충남 아산에 여수 충민사 초상화와 거의 같은 이순신의 초상화가 존재했다. 초상화 사진이 아니라 붓으로 그린 수백 년된 것이었다(<조선일보> 1929년 4월 17일). 그 초상화는 <조선일보> 1929년 4월 17일, <동아일보> 1931년 5월 22일,
<삼천리> 1934년 8월호에도 나온다. 그런데 그 중요한 초상화가 충민사 초상화처럼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문제는 현재까지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충민사 혹은 아산 초상화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두 초상화는 후대에 그려진, 상상을 반영한 초상화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근대까지의 문헌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초상화가 소장된 곳은 다섯 곳이다. 경남 통영 착량묘, 한산도 제승당, 순천 예교 신성포, 여수 장군도, 아산 현충사이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착량묘 초상화만이 나온다. 이 초상화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순천 예교 신성포 초상화는 1826년 편찬된 <승평지>, 구한말 관료 김윤식이 1860년 4월에 순천에 갔을 때 “용두포로 나가 충무공 초상화를 배알했다(‘망해대기(望海臺記)’)는 기록, 일본인 길전영삼랑(吉田英三郎)의 <조선지>(1911년), 일본인 성도로촌(成島鷺村)의 <조선명승시선>(1915년)에도 언급된다. 일제가 1944년에 불태워 없앴다고 한다.
여수 장군도 초상화는 <동아일보> 1927년 4월 14일, 같은 신문 1931년 6월 2일의 이광수 기고문에도 나온다. 1960년대 초 제주시장 김차봉이 골동품점에 팔았다고 한다.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한산도 제승당 초상화는 <조선일보> 1928년 4월 28일, <동아일보> 1928년 7월 5일과 8일에도 나온다. <조선일보> 1929년 4월 17일의 기사로 보면, 1928년 여름 이후에 외국인이 가져갔다고 한다. 당시 한산도에는 동서양의 외국인이 많이 방문했다고 한다(<동아일보> 1928년 7월 9일). 그 뒤로 모사품만이 소장되어 있다가 그마저 사라졌다.
제승당 충무공 초상화 사진은 어디 1907년 봄 혹은 여름, 남해안을 조사하던 일본 군함 니이다카(新高)의 함장 히데지마 시게타다(秀島成忠)는 통영과 한산도 등에 상륙해 사진을 찍었다. 그는 통영 전경, 통영 수항문, 한산도 제승당, 삼천포 일본인 마을 사진을 일본 잡지 <사진화보>(寫眞畵報)(제2권 제10편, 1907년 8월 8일)에 제공했다. 설명문에 따르면, 히데지마는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제승당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었다면 당연히 촬영했을 것이다. 열심히 추적했으나 현재까지는 초상화 사진을 찾지 못했다. 히데지마가 찍은 초상화 사진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최소한 1900년대 초기의 이순신의 초상화를 만날 수 있고 이순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초상화를 추적하면서 몇 년 전에 연원을 알 수 없는 초상화 사진을 한 점 입수했다. 한 전문가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인이 제작해 잡지의 부록으로 배포한 초상화 사진인 듯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초상화는 이상범이 그린 초상화와 유사하다. 또 현재의 여수 충민사에는 소장되어 있지 않지만, 1970년대 초에는 소장되어 있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 연원을 알 수 없다.
<현충사 소장 이순신 표준영정 다시 생각하기>
이순신의 초상화는 진실 여부를 떠나 다양하게 존재한다. 실제 이순신을 그린 듯한 초상화(이하 영정), 목판화, 민화 형태도 있다. 많은 영정 중에서 1953년 장우성이 그린 현충사 소장 영정은 1973년 10월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표준영정 지정은 ‘대통령(박정희) 각하의 지시에 따른 충무공 영정 통일사업’(<충무공 영정 통일·문공부·문화-1740, 1973년 5월 2일)의 결과이나, 1962년 가을 전북 정읍 충렬사 소장 영정 제작과 관련한 스승 김은호와 제자 장우성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된 문제다. 김은호는 1949년에 순천 유지들의 이순신 영정 제작 요청을 받아 충무공기념사업회의 고증을 바탕으로 1950년에 모대본(帽帶本·순천 충무사 소장용)과 무장본(武裝本·한산도 제승당 소장용)을 완성했다. 무장본은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서 문교부와 공보부에 청원해 국가 공인을 받았다고 한다(김은호·<서화백년>).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최초의 국가 공인본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이다. 장우성은 1953년에 충무공기념사업회의 의뢰로 현충사 소장용 영정을, 1962년에는 정읍 충렬사 소장용 영정을 그렸다. 김은호와 장우성의 갈등으로 시작된 공인 논란은 결국 1963년 2월 12일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서 문교부 ‘공인 영정 통일조치’를 건의케 했다. 이에 대해 김은호와 ‘재경 덕수 이씨 종중’, ‘충무공영정통일추진위원회’에서는 김은호본의 공인을 주장했다. 장우성도 그에 대응했다. 1973년 4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은 ‘충무공 영정 및 동상 통일문제 연구를 지시’했고, 5월에 문화공보부는 장우성본을 공인했고 10월에 정식 공고를 냈다. 공인 이유를 담은 <이충무공, 세종대왕 영정 통일>(문공부·문화-1740, 날짜 명시 없음)의 첨부문서, <이충무공, 세종대왕 영정 및 동상 통일계획(1973.5)>에는 장우성본에 대해서는 “현충사에 봉안되어 성역화 이후 많은 국민에게 알려져 있으며, 어느 영정보다도 기품이 있어 보이므로 이를 대체하기 어려움”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현충사라는 성역화 공간, ‘기품’이라는 작품성이 근거였다.
그러나 김은호본이든 장우성본이든 고증자료는 류성룡의 <징비록>이 핵심이다. 오늘날에는 많이 알려진,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직접 만나 이순신의 모습을 기록했던 고상안의 <태촌집>이나 아버지의 소실이 이순신의 서녀였고 <통제사 이충무공의 유사(遺事)>를 저술한 윤휴가 남긴 기록은 참조되지 않았다. 김은호·장우성 두 사람 모두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장우성의 현충사본은 6·25 전쟁 시기였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영정 제작에 사용된 비단과 물감이 모두 일본에서 구해 온 것들이다. 고증자료도 늘었고, 시대도 변했다. 현충사본에 대해 새로이 고민해야 할 때이다.
고상안, 《태촌집》
“통제사 이순신은 같은 해 과거에 합격했다. 며칠을 함께 지냈다. 그의 말솜씨와 말하는 방법은 지혜로웠다. 참으로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살집이 없고, 덕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관상은 또한 입술이 뒤집어져 있었다. 나는 마음으로 ‘복이 있는 장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붙잡아 죄를 조사하라는 임금님의 명령이 있었고, 복직했으나 1년이 지나지 않아 철환에 맞아 제대로 운명을 마치지 못했다. 한탄할 일이다.”
윤휴,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
“나의 아버님(先人)께서 공의 딸을 외부(外婦·소실)로 취하셨기에 나는 오히려 공의 문지기와 노비 및 공을 모셨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 공의 용모와 기호, 자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을 수 있었다. 공은 키가 크고 용기가 뛰어났다. 수염이 붉었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본래 몹시 분노하고 탄식하고 있었기에 적을 죽이면 반드시 간을 꺼냈다.”
박종평 이순신 장군 연구가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속보]탄핵 가결 전 대통령실 ‘자포자기’ 분위기도…윤석열, 2년7개월 만에 직무정지
- 한동훈, 내일 사퇴 기자회견···당대표 5개월 만에 한계 봉착
- 시내버스가 ‘탄핵버스’로···기사님 “돌아가요” 외침에 승객들 “네, 탄핵”
- [윤석열 탄핵 가결] 200만 모인 여의도 “거짓말 폭정은 끝났다”…가결에 부둥켜 안고 환호
- 나경원 “거리 외침에 빠르게 응답하는 것만이 성숙한 민주주의일까”…민심 역행
- [윤석열 탄핵 가결]국민의힘에서도 12명 찬성…당론 거스르고 ‘샤이 찬성’ 5표
- 이재명 “탄핵 의결, 승리 아니다…갈등 상황 이어질 수 있어”
- [윤석열 탄핵 가결] 탄핵안 투표 내내 본회의장 ‘적막감’···가결 선포에 박수·환호
- [속보]헌법재판소 주변 경찰 기동대 확대 배치···경비 대폭 강화
- [윤석열 탄핵 가결] “당에 계엄 옹호하는 사람만 존재해야 하나” 한동훈, 사퇴 ‘일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