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 성화 점화' 김원탁 씨 "제가 보통사람이었죠"
1990년 베이징 AG 金, "성장 더딘 한국 기초 체육..올림픽 한 번 더 열렸으면"
(서울=연합뉴스) 하남직 기자 = 김원탁(54) 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
그의 손에서 서울올림픽을 알리는 성화가 점화됐고, 그의 레이스를 마지막으로 모든 경기 일정을 마무리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김원탁 씨는 서울올림픽을 떠올리면 두 가지 감정에 휩싸인다.
"올림픽 성화 점화는 평생 잊지 못할 짜릿한 기억입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뭔가를 보여줘야 할 남자 마라톤에서는 아쉬움만 남았네요."
'보통사람'으로 돌아가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는 김원탁 씨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30년 전 기억을 꺼냈다.
◇ "사흘 전에 들었는데 '내가 왜'라는 생각부터 했죠" = 1988년 9월 17일, 잠실 주 경기장에 손기정 옹이 등장했다.
많은 사람이 '성화 점화자' 혹은 '최종 주자'로 예상했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옹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통해 육상 스타가 된 임춘애에게 성화봉을 건넸다. 임춘애는 트랙을 돈 뒤 최종 성화 점화자 3명에게 성화를 전달했다.
서울예고 학생 손미정 양, 소흑산도 초등학교 교사 정성만 씨, 그리고 마라토너 김원탁이 올림픽 개회식 하이라이트인 성화 점화를 맡았다.
천(天) 지(地) 인(人)을 상징하는 세 명의 점화자는 성화대 리프트를 타고 22m를 올라갔다. 김원탁 씨는 "그 짧은 순간,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실수 없이 하자'라는 생각만 했다"고 떠올렸다. 전 세계의 눈이 '보통사람' 3명을 향했다.
김원탁 씨는 "개회식 사흘 전에 내가 성화 점화자로 선정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 전까지는 꿈도 못 꾸던 일이다. 사실 나는 10월 2일에 열리는 마라톤만 바라봤다. 성화 점화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며 "내가 성화를 점화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왜'라는 생각부터 했다. 그다음에는 '실수 없이 하자'는 말만 반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라톤이 끝나고 난 뒤에야 다시 개회식을 떠올렸다고 한다.
김원탁 씨는 "그제야 왜 내가 성화 점화자로 선정됐는지 이유를 생각했다. '용의 해에 열린 올림픽이라서 용띠인 내가 선정됐나'라고 판단했는데 기사를 보고 '아, 그렇지. 나는 보통사람이었지'라고 깨달았다"며 웃었다.
언론들은 김원탁 씨 등 세 명을 성화 점화자로 선정한 이유를 "당시 정부가 내세운 '보통사람의 시대'에 어울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 "기초 종목 위해서라도 올림픽 다시 열렸으면" = 사실 김원탁 씨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주도 출신의 김원탁 씨는 1987년 3월 15일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26초로 3위를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1위 이종희(2시간 12분 21초), 2위 허의구(2시간 12분 23초) 등 무려 5명이 종전 한국 기록(2시간 14분 06초)을 깨는 기록적인 날에, 김원탁 씨도 기쁨을 누렸다.
1년 뒤인 1988년, 김원탁 씨는 서울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한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41초로 우승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폐회식 당일인 10월 2일 열린 남자 마라톤에서 김원탁 씨는 복통에 시달렸고 2시간 15분 44초로 18위에 머물렀다. 그는 "내 생애 가장 아쉬운 레이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마라토너 김원탁의 레이스는 서울올림픽 이후에도 이어졌다. 김원탁 씨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2시간 12분 56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김원탁 씨 등이 다진 탄탄한 한국 마라톤은 이후 황영조, 이봉주로 이어지며 황금기를 맞았다.
한국 남자 마라톤은 1990년 김원탁, 1994년 히로시마 황영조, 1998년 방콕·2002년 부산 이봉주까지, 아시안게임 4연패를 달성했다.
김원탁 씨는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쌓은 금자탑"이라고 말하면서도 "외부적인 영향도 있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한 우리나라가 육상 등 기초 종목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런 노력을 지속했다면 한국의 기초 종목이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중국은 2015년 베이징 세계육상선수권,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을 유치한 뒤 육상 발전에 더 힘을 쏟았다. 이제 한국 육상은 중국과 일본의 등을 보며 뛴다.
1996년 은퇴한 김원탁 씨는 고향 제주도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그는 "이제 마라톤을 한 시간보다 농사를 지은 시간이 더 길다"고 웃었다.
하지만 가끔 육상계 후배들과 연락하며 화려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한국 육상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한다.
김원탁 씨는 "한국에서 한 번 더 올림픽이 열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육상 등 기초 종목에 대한 지원이 늘고, 재도약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바랐다.
jiks7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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