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오바마가 추천한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뉴욕타임스 58주 베스트셀러,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추천 도서, 지난 3년 동안 가장 많은 미국 독자를 사로잡은 책. 이런 홍보 문구를 보고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모스크바의 신사'라는 소설입니다. 책이 꽤 두꺼워서 한참을 망설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겠지' 싶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경마 클럽회원이고 훈장도 받은 한 때 잘 나가던 러시아의 귀족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입니다. 배경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직후. 로스토프 백작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간다면 즉시 총살될 것이라는 인민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지면서 긴 서사는 시작됩니다.

스위트룸에서만 머물렀던 백작에게 주어진 방은 아주 낡고 좁은 방이었습니다. 다행히, 백작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몰래 숨겨둔 금화들도 책상 다리 아래에 잘 숨겼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던 호텔인 만큼 감옥에 수감되는 것보다는 한결 나은 결정에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호텔 생활 초기에 자살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백작을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권태감이었습니다.
「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겨우 3주가 지났을 때 느끼는 감정이 이 정도로 종잡을 수 없다면, 3년이 지났을 때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종잡을 수 없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이 백작의 마음을 어지럽혔다.」90쪽
어느새 4년이 지났고, 권태감에 사로잡혀있던 백작을 구원해준 것은 10개월 정도 호텔에 머물고 있던 9살짜리 니나였습니다. 백작은 자신이 이 호텔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전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니나에 비해서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백작이 알고 있던 것은 직원들의 이름이나 스위트룸의 장식 스타일 같은 호텔 손님들만이 머무는 공간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는 선상 생활의 극히 '일부'만을 경험했을 뿐이다. 생명력이 충만한, 그 항해를 가능케 해주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말이다.(중략) 니나가 호텔에 있는 동안 벽은 안으로 좁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영역과 복잡성이 모두 확대되면서 밖으로 팽창했다. 니나가 이곳에 온 지 첫 주가 지났을 때 호텔은 두 구역의 삶을 포괄할 정도로 팽창했다. 첫 달이 지났을 때는 모스크바의 절반을 아우를 정도로 팽창했다. 만약 니나가 이 호텔에서 충분히 오래 지낸다면 호텔은 러시아 전체가 될 것이다.」 94쪽

니나는 곧 떠났지만 그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로스토프 백작의 세계는 크게 팽창했습니다. 백작은 어느새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일하게 됐고, 주방장 에밀과 지배인 안드레이와 모든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됐습니다. 재봉일을 맡고 있는 마리나도 백작의 든든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엿한 호텔의 구성원으로 거듭난 백작에게 어린 소녀였던 니나가 성인이 되어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고, 백작에게 어린 딸 소피야를 맡깁니다. 니나는 남편이 체포돼 집단 노동 수용소에서 교정 노동형을 받았다며, 그곳에서 정착할 때까지 어린 소피야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처음엔 며칠 정도 일거라 생각했지만 니나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소피야는 백작의 딸이 되어 함께 호텔에서 살게 됩니다. 소피야는 호텔에서 백작 뿐 아니라 주방장과 지배인, 재봉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당 고위 관료들의 중요한 회의가 호텔의 한 방에서 은밀하게 열리고, 스탈린이 사망하고, 새로운 권력자들이 등장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모두 조연일 뿐입니다. 웨이터 일을 하면서 소피야를 돌보고, 호텔에 머물고 있는 여배우와 로맨스까지 펼치는, 백작의 품위를 갖췄지만 이제는 웨이터인 로스토프가 주인공일 뿐이죠.
로스토프의 마지막 모험은 딸 소피야가 파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소피야의 연주를 보고싶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호텔에서 보낸 그에게 너무나 큰 모험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로스토프는 차분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합니다. 그 모험의 결과는 어떨까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687쪽
책의 두께가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읽어 내려가다보면 수십 페이지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파란만장하고 엄청난 모험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소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이야기가 러시아의 역사와 서로 호응하며 씨줄 날줄처럼 펼쳐집니다.

문득, 오바마 전 대통령은 왜 이 소설을 추천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SNS를 찾아봤더니 올해 1월 1일에 이 책을 비롯한 다른 책들과 음악 리스트를 추천했더군요. 어쩌면 오바마 전 대통령도 로스토프 백작에게 개인적으로 감정이입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호텔에 갇힌 백작과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지냈었던 자신의 모습을 말이죠.
백작은 결국,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환경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인생의 불확실성을 향해 앞으로 더 나아가기까지 합니다. 역사는 흘러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디서든 그 거대한 무대 뒤에는 인간적인 일상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때론 그것들이 개인에게는 더 중요한 기억으로 남는 것이겠죠.
그 모든 사소한 과정들이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을, 이미 다 자란 어른이지만 여전히 극복하고 적응해야 하는 일상을 통해 더 성숙할 수 있음을, 저자는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필체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이모 토올스 지음, 서창렬 옮김, 현대문학, 2018년 6월
홍희정기자 (hjhon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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