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괴롭고 불쾌한 일은 왜 잊히질 않나, 행복한 날은 쉽게 희미해지는가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8. 8. 27.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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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물리적 실체'를 최초 규명.. 강봉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강봉균(57)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최근에 기억의 물리적 실체를 세계 최초로 찾아냈다. 뇌 속 신경세포에서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온 돌기인 '시냅스'가 기억을 만들고 저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2012년 인간의 기억에 대한 연구 실적으로 '국가과학자'에 선정된 바 있다.

"기억은 추상(抽象)이 아니라, 신경세포의 특정 시냅스 간에 이뤄지는 전기화학작용이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저장될 때 시냅스가 커진다. 커질수록 기억이 강렬하다는 뜻이다. 세월이 지나 기억이 사라지면 시냅스 크기가 줄어든다."

―괴롭고 슬프거나 수치스럽고 불쾌한 일은 왜 잘 잊히질 않는가. 반면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은 쉽게 희미해지는가?

"나쁜 기억이 오래가는 것은 생존 본능과 직접 관계있다. 쥐를 대상으로 실험해보면 공포의 경험은 한 번이어도 오래 기억된다. 그때 형성된 시냅스는 쉽게 찾을 수 정도로 커져있다. 반면 먹이로 보상받은 행복한 경험은 여러 번 반복돼도 잘 기억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행복은 사치다."

―어떤 인물이나 시대를 평가할 때 그 성취는 쉽게 잊고 어두운 면만을 떠올리는 태도에도 이런 기억의 선택이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집단의 기억도 그렇게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강봉균 교수는 “나쁜 기억이 오래가는 것은 생존 본능과 직접 관계있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계속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좋은 기억을 많이 갖는 게 행복이라면 나쁜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는 없을까?

"쥐가 공포(恐怖) 기억을 떠올릴 때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는 약물을 투입하니 깨끗하게 지워졌다. 2008년 이런 연구결과를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다만 약물 부작용 때문에 사람에게 똑같이 시도할 수는 없다."

―장차 기술적으로는 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인가?

"특정 기억을 사라지게 하거나 변형시키거나 없던 기억을 만들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쉽지는 않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윤리적인 문제와 결부돼 있다. 시냅스를 통해 기억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치매, 중독, 만성 통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질병 치료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당신은 왜 기억 연구를 전공으로 택했나?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어떻게 태어났고 왜 살아야 하느냐 같은 철학적인 과제를 풀어보고 싶었다. 인간의 본성을 생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본성과 뇌는 무슨 관계인가?

"종교·철학·문화인류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못 내놓는 것은 뇌에 대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뇌가 생각하는 중심이기에 그 작동 방식을 알면 많은 의문점이 풀릴 것으로 봤다. 생물학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기억' 연구였다. 동물은 기억 기능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가령 쥐약을 먹고 죽을 뻔했던 쥐는 쥐약과 비슷한 냄새나 모양에는 절대 가까이 가지 않는다. 혹독한 경험의 기억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닷속 연체동물인 '군소'를 갖고 연구했다고 들었다.

"현미경 실험 기술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군소의 신경세포는 매우 크고 색깔과 크기가 달라 관찰하기 좋다. 세포 숫자도 2만 개여서 단순하다. 군소 다음으로는 생쥐의 신경세포를 들여다봤다."

―이런 동물실험 결과가 훨씬 더 복잡한 뇌를 가진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생쥐의 신경세포는 1억 개 미만이고, 인간은 1000억 개로 훨씬 복잡하고 진화적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과 생쥐는 유전체가 상당히 유사하다. 생쥐에서의 발견이 인간에게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기억에 관여하는 기본 메커니즘은 군소, 초파리, 생쥐, 인간 사이에 유사점이 많다."

―대부분 동물이 기억 능력을 갖고 있나?

"군소뿐만 아니라 더 작거나 하등한 예쁜꼬마선충 같은 동물도 기억 능력이 있다. 기억은 동물의 생존에 필수 기능이다. 아주 단순한 신경계를 가진 동물도 먹잇감, 포식자, 배우자에 대해 배우고 이를 제대로 기억해야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에게 기억은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억은 자기 정체성(正體性)의 핵심이다. 기억이 없으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기억이 곧 나 자신이라는 뜻인가?

"그렇다. 기억이 없으면 내게는 과거가 없고 미래도 계획할 수 없다.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게 된다. 실제로 뇌 속의 해마를 포함한 내측두엽 손상 환자는 '서술 기억'(사실적 정보에 대한 기억)을 만들지 못해 항상 현재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애초에 우리 인생은 기억의 상실(喪失)과 함께 시작된다고 한다. 서너 살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지 않은가?

"생애 초기에는 신경세포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서술 기억을 저장하려면 언어 능력이 필요한데, 그 시기에는 언어 능력이 완전히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억이 저장되면서 정체성이 형성된다. 개인의 차이란 결국 얼굴과 이름이 달라 구별되는 게 아니라 뇌의 모습이 다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뇌의 신경세포 연결망에 의해 개인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자는 개인의 차이를 유전자(DNA)로 해석하는데?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경험의 역사, 지식의 역사가 모두 뇌에 남으면서 신경세포의 연결 방식이 조금씩 달라진다. 유전적으로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처음에는 같은 옷을 입지만 자라면서 차이가 벌어지는 것과 같다. 경험과 학습의 종류가 달라지면서 뇌의 시냅스가 달라진다."

―유전과 환경 어느 쪽이 중요하냐는 소위 네이처(nature)와 너처(nurture) 논쟁이 있었다. '타고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면이 크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침팬지와 인간은 유전자 차이는 1% 정도밖에 안 된다. 인문사회적으로는 99%가 똑같으면 같은 걸로 본다. 하지만 침팬지와 인간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환경과 경험, 학습의 기억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미세한 유전자 차이에 의해 전기 배선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유전이라는 큰 틀에서는 같고 세부 내용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둘은 유전자는 거의 똑같고 몇 개만 다를 것이다. 뇌를 스캔해보면 어떤 정보가 들어있느냐에 따라 시냅스 패턴이 다르다. 이런 뇌 속의 패턴 차이에 의해 두 사람의 개성과 인격도 달라지는 것이다."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증거로 암(癌)의 가족력을 예로 드는데.

"인간의 유전자는 3만 개쯤 되는데 그중에 한두 개 똑같은 암 유전자만 가족간에 공유하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다른 면에서도 가족 구성원이 같지는 않은 것이다. 심지어 나라는 존재도 세월이 가면 달라진다. 중학교 때의 내 성향과 지금의 내 성향은 다르지 않은가."

―기억의 얘기로 돌아가자. 우리 나이가 되면 기억 능력이 빠르게 쇠퇴한다. 낭패감이 들 때가 많다.

"잊어버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억은 경험·학습한 내용이다. 안 잊어버리고 그 틀에만 맞춰 살면 새로운 사고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인간 관계에서도 상대의 허물을 덮는 관용의 미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 약간 너그러워지는 것도 잊어버리기 때문인가?

"물론 너무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기억을 잘하길 원한다. 하지만 기억력이 너무 비상했던 사람들의 인생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나친 기억력으로 두뇌 기능이 혼란스러웠고 필요한 기억보다 필요 없는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됐기 때문이다. 기억과 망각의 적절한 조화가 이상적이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기억과 관계있다고 한다. 노년의 시간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는 이유는 일상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게 없기 때문이라는데?

"저장되는 기억의 양에 따라 시간의 길이를 상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소년 시절의 경험은 거의 대부분 새로운 경험이기에 정보의 양이 방대하다. 하루하루가 꽉 차있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반면 노년에 이뤄지는 경험은 새로울 것이 없고 반복적 일상이다. 그런 일상적 경험은 기억에 거의 저장이 안 된다. 또 뇌의 기억 저장 능력도 다소 떨어진다."

―지금껏 기억의 연구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엇을 더 알게 됐는가?

"인간의 본질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작용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마음 다스리기'를 권하는데, 마음은 없고 뇌의 전기화학적 작용밖에 없다면 너무 허망하지 않나?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여겼다. 흥분하거나 슬플 때 심장이 펄떡펄떡 뛰기 때문이다. 사실은 뇌의 작용으로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심장에 반응이 나타난 것뿐이다. 마음의 실체가 심장이 아니라 뇌에 있다는 것은 이미 BC 400년 전의 히포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은 심장에 있다고 했다. 두뇌가 호두처럼 돼있는데 심장이 워낙 뜨거우니까 뇌는 이를 식히는 라디에이터로 여겼다."

―사람의 고귀한 감정, 인격, 영성이 단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

"전기화학적 반응에 불과한 게 아니라 그 세계가 너무나 복잡해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전체 중 귀퉁이 하나를 겨우 보고 있을 뿐이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 속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서로 만나는 조합은 100조~1000조 개가 될 만큼 무궁무진하다. 과학적 바탕이 없을 때 종교적,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질문을 던지고 나름대로 답을 구했다고 본다. 이제 과학으로 근원적인 문제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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