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자의 체헐리즘]'브래지어', 남자가 입어봤다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수동 휠체어를 직접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하고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매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고 다니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전달하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브래지어(이하 브라)'를 입는 건 자유다. 안 입었다고 '브라 착용법(法)(대뇌를 안 거치고 이름 붙였다, 없는 법이다)' 위반으로 구속되진 않는다. 브라를 벗고 나갔다 경찰에 적발되고, 이어 "왜 오늘 브라 안했습니까? 과태료 8만원(브라 모양에서 착안)입니다." 하진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 다 한다. '노브라(브라를 안하는 것)'는 거의 없다. 왜 그럴까. 폭염에 땀범벅 된 한 여성 등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저거 엄청 더울텐데, 벗으면 안되나.' 그래서 5명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 "가슴이 흔들리면 아프다", "옷에 유두 쓸리면 불편", "가슴 아래 땀 찬다", "처지는 게 싫어서", "옷 위에 드러나면 민망", "왜 차는지 모른다, 그냥 그렇게 배웠다"까지.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독자 의견'을 봤다. 지난주 '꽃무늬 양산' 체헐리즘 기사에 달린 댓글이었다. 한 독자(dusm****)가 '이 더위에 브라자차고 돌아다니는 체험도 해주세요. 진짜 땀 차서 브라자 찢어 버리고 싶어ㅠㅠ'라고 남겼었다. 브라를 차라니. 잠시 스스로 상상해봤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궁금증이 결국 이겼다. '도대체 얼마나 불편하길래.' 상상조차 안됐다.
아내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갑갑하냐고. "퇴근하면 브라부터 벗잖아"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남성이라 살면서 전혀 몰랐을, 여성이라 평생 겪어왔을 불편한 이야기. 겪어보면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용기 내보기로 했다.
그렇다. 이건 여러 이유로 브라를 차왔던, 여성들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다. 얼마나 갑갑한지에 대한 체험기다. 남성들도 알면 좋을 법했다. 혹시 브라를 벗은 여성을 봐도, 이상하게 빤히 보지 말자고. '많이 답답해서 그랬구나' 이해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우선 '맞는 브라' 찾는 게 관건이었다. 21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을 둘러봤다. 속옷가게를 많이 본 듯 했었다. 첫 가게에 들어갔다. 엉거주춤 두리번거리다, 란제리 코너로 향했다. 들어가려는데 외국인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아내 속옷을 사러온 것'이라고 거짓 주문을 외웠다. 속옷을 찬찬히 둘러봤다. 숫자와 알파벳이 영어처럼 써 있었다. 외계어 같았다. 어디서 본 건 있어 'D컵'을 찾았다. 근데도 상당히 작아 보였다.
알고 보니 숫자는 밑가슴둘레, A·B·C·D는 컵 사이즈였다. '윗가슴둘레-밑가슴둘레'를 측정한 뒤 사이즈를 재는 방식이었다. 잘 맞지 않으면 가슴 모양이 바뀔 뿐 아니라, 상당히 불편하다고 했다.
결국 점원 도움을 받았다. 얼굴을 빤히 보더니 웃음 소리가 삐죽삐죽 새 나왔다. "푸흡, 이거 정말 꼭 착용하셔야 돼요?" 몇 번 되물었다. 점원은 매장서 가장 큰 사이즈인 85D, 와이어와 패드가 있는 제품을 권했다. "이런 브라가 땀이 차고 불편하다"고 했다. 당장 야심차게 차보려 했다. 그러자 점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여기서도 괜찮으시겠어요?" 주위를 보니 여성 손님 몇몇이 있었다. 그렇다고 여성 탈의실에 갈 순 없었다. 세상 변태가 될 것 같았다.
그냥 셔츠 위에 브라를 찼다. 후크를 잠그려 낑낑 댔지만 잘 안됐다. 팔 각도가 어색했다. 손도 잘 안 닿았다. 이걸 어쩌지 고민하던 찰나, 점원이 도와줬다. 하지만 그래도 안 잠겼다. 브라가 찢어질까 두려웠다. 몇 번 실패 후 셔츠 위에 붕 뜬 채 널부러졌다. 부끄러워졌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데도 진땀이 흘렀다. 점원 말이 이어졌다. "남자 분이라 안 맞나봐요. 맞는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첫 속옷가게부터 난관이었다. '이상한 손님'을 위해 수고해 준 점원에 감사 인사를 했다. 두 번째 가게로 향했지만, 마찬가지였다.
큰 브라를 파는 가게를 검색했다. 한 군데가 나왔다. 들어가니 포쓰(기운) 있는 여성 점원이 있었다.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기에 기사 취지를 설명했다. 점원은 빠른 손놀림으로 사이즈부터 잰 뒤 이렇게 말했다. "기왕 할 거면 딱 맞는 브라로 해야죠. 작은 속옷을 입고 불편하다고 하면 안되니까요. 실제 여성들처럼 해보세요." 열정적 도움에 믿음이 갔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그의 손에는 브라 하나가 들려 있었다. 무려 '핑크색'이었다. 굳이 예쁘지 않아도 되는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받아들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녔다. 탈의실로 들어갔다. 셔츠를 벗었다. 전면, 좌, 우에 거울이 있었다. 브라를 대는 순간 포기하고 싶어졌다. 점심에 먹은 파스타를 눈으로 확인할 뻔 했다.
후크 채우기가 또 난감했다. 머리를 썼다. 앞으로 돌려 채운 뒤 입어보기로 했다. 잘 안됐다. 진땀 흘리다 점원을 불렀다. 후크를 채워줬다. 처음 브라를 입는 순간이었다. 점원은 가슴 주변 살들을 패드 안에 정리해줬다. '이렇게 하는 것'이라 했다. 불필요한 장인 정신이 느껴졌다.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랐다. 그리고 첫 느낌은 이랬다. '진짜 갑갑하다. 벗고 싶다.'
핑크 브라를 사려니 가격이 너무 비쌌다. 7만8000원이나 했다. 1만원에 3개짜리 팬티를 입는터라 깜짝 놀랐다. 팬티 24개 가격이었다. 회의 때 후배들에게 "통상 브라를 1년에 한 번은 바꿔야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브라 가격 부담이 만만찮을 것 같았다. 여성이라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할 비용이었다.
점원에게 "왜 이렇게 비싸냐" 했더니 세일 매대로 데려갔다. 1만5000원부터 있다고 했다. 역동적인 표범 무늬 남색 브라를 집어 계산했다. 와이어가 있고, 레이스도 일부 달려 있었다. 집에 오니 아내가 '중년 여성들이 선호할 것 같은 야한 브라'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싼 것에 만족했다.
다음날 아침이 왔다. 오전 7시, 졸린 눈을 비비며 브라부터 찼다. 브라와 색깔 맞춤을 하려 남색 반팔티를 입었다.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하는 일종의 '보호색(주위환경이나 배경의 빛깔을 닮아 발견되기 어려운 색)'이었다. 여성들도 얇은 반팔티를 입을 때면 브라가 비치는 게 신경 쓰일 것 같았다. 옷에 대한 제약이 많을듯 했다. 그것 자체가 피곤한 일이었다.
브라를 입자 마자 갑갑해졌다. 앞, 옆, 뒷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는 느낌이었다. 숨을 크게 쉬기 어려웠다. 약 10분이 지나자 현기증도 오는 것 같았다. 가슴 쪽이 덥기도 했다. 선풍기를 켰다. 출근 전인데 퇴근하고 싶어졌다. 심호흡을 했다. 달력을 보니 22일. '월급날 3일 전이니 힘내자'고 속으로 맘 먹었다. 집을 나섰다.
바깥에 나오니 산책하는 여성들이 보였다. 동네서도 브라를 입고 있었다. '불편한 걸 집 밖에선 다 하는구나.'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2차 성징이 시작될 무렵부터 수십년간 해왔을 터였다. 일상 풍경도 새삼 다시 보였다.
처음엔 걷는 것도 쉬 집중할 수 없었다. 브라에 신경이 온통 쏠렸다. 착용 30분 만에 등에 땀이 찼다. 가슴에 습기도 차는듯 했다. 오른쪽 뒤 무언가가 등쪽을 거슬리게 했다. 특히 앞가슴 양쪽을 누르는 쇠붙이, 와이어 압박이 컸다. 어깨끈도 계속 신경을 건드렸다. 만원 지하철을 타자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인상이 써졌다. 출근길에 오른 여성들 브라만 보였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으니 답답함이 더 커졌다. 착용 1시간째, 뒷목과 어깨가 뻐근해졌다. 표정이 편하게 안 나왔다. 속 모르는 후배들은 '진짜 하셨냐'며 폭소를 터트렸다. "티가 별로 안 난다", "갑빠를 위해 뭔가 찬 사람 같다"는 반응이 갈렸다. 얼마 전 들어온 인턴 기자 2명을 보기가 민망했다.
오전 9시가 넘자 어깨와 뒷목을 주무르게 됐다. 피가 잘 안 통하는 듯 했다. 머리 왼쪽도 띵한 느낌이었다. 까칠까칠한 레이스는 살갗을 계속해 쓸었다. 가슴도 움츠러들어 자꾸 쭉 폈다. 기지개도 켰다. 그러자 또 다른 고역이 생겼다. 브라가 위로 쭉 올라온 것. 브라끈을 잡아 다시 내리려니 모양새가 그랬다. 여성들이 공공장소서 이따금씩 잡아 내리던 게 생각났다. 민망할 수 있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전 10시가 되니 불쾌감은 지속됐지만 적응이 좀 됐다. 착용 3시간 만이었다. 편한 건 아니고, 불편함에 적응된듯 했다. 이렇게 여성들이 브라 억압에 항복하는가 싶었다. 다만 등쪽이 간지러워 자꾸 긁었다. 아내가 이따금씩 등을 긁어달라 했던 게 생각났다. 빨갛게 뾰루지 같은 게 났었다. '브라 때문에 그랬구나' 깨닫게 됐다.
낮 12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닭갈비 볶음밥과 생선까스. 좋아하는 메뉴지만 맘껏 못 즐겼다. 브라가 명치 가운데를 압박했다. 진심 원망스러워졌다. 음식물이 시원스레 잘 안 넘어갔다. 가슴에 한 번씩 걸리는 느낌이었다. 소화가 불편한듯 머리가 계속 띵했다.
식사 후 체할 것 같아 청계천으로 향했다. 그러자 더위가 고역이었다. 섭씨 32도, 체감온도는 더 높았다. 걸은지 5분 만에 브라에 땀이 찼다. 15분이 지나니 브라끈과 와이어 부분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가슴골 사이에선 땀이 흘렀다. 겨울이면 따뜻하기라도 할텐데, 여름엔 대책이 없었다. 패드를 잠깐 들었더니 시원했다. 땡볕에 브라가 불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찢어버리고 싶다'던 독자 말이 떠올랐다. 정말 공감했다.
티셔츠를 위아래로 흔들어도 브라는 바람이 안 통했다. 가슴 내부가 습하고 땀이 찼다. 소재가 대체 뭘까 의아했다. 30분 이상 걸으니 온통 축축해졌다. 브라에 지친 기자는 사무실로 돌아와 엎드려 쪽잠을 잤다. 깬 뒤에도 브라는 축축했다. 잘 마르지도 않았다. 꿉꿉하고 불쾌했다.
일순간 브라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여성 속옷으로, 낯부끄럽고 때론 성(性)적으로 여겼을 브라였다. 그런데 그게 아녔다. 족쇄나 억압 도구처럼 느껴졌다. 브라에 왜 '해방'이란 단어를 쓰는지 알게 됐다. 착용 불과 6시간 만이었다.
퇴근길 만난 여성들도 이런 불편함을 호소했다. 직장인 이수진씨(28)는 "정말 밖에 돌아다닐 때도 브라를 안하고 싶다. 집에 와서 벗으면 얼마나 해방감을 느끼는 지 모른다"며 "하루 하신 것도 불편한데 수십년 한 여성들은 오죽하겠느냐"고 토로했다. 직장인 황수연씨(31)도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찼더니 답답함에 익숙해졌다. 여름엔 땀 나서 특히 고역"이라며 "여성이라 정말 불편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브라를 벗어 던졌다. 12시간 만이었다. 거실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기분은 뭐랄까, 30년 넘게 살면서 느껴본 해방감 중 손꼽을 정도였다. 역대급 체헐리즘이었다. 평소보다 세 배는 힘든 하루였다. 눈알도 뻑뻑하고 머리도 아팠다. 속도 더부룩했다. 진통제를 한 알 먹고, 그대로 대(大)자로 뻗었다. 그리고 가슴을 낯설게 내려다 봤다. 이게 뭔 죄라고, 이렇게까지 가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브라를 했다. 이번엔 잘 드러나도록 얇고 딱 붙은 흰 티를 입었다. 이번엔 '불편한 시선'을 느끼고자 했다. 여성이 '노브라' 하는 게, 남성이 '브라' 하는 것만큼 시선을 받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결은 다르다. 하지만 금기(禁忌)를 깬 단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여겼다.
예상대로 밖에 나오자마자 시선이 쏠렸다. 동네 어르신도, 산책하던 아저씨도, 버스 정류장 여성들도, 등교하던 학생들도 '동공지진'이 일었다. 대놓고 빤히 쳐다봤다. 시선은 가슴 쪽에 한 번, 얼굴에 한 번 머물렀다. 길에서 만난 행인 100명 중 90명 이상이 쳐다봤다. 때론 눈길이 따라가기도 했다. 민망하고 위축됐다. 팔을 자꾸 올리게 되고, 가슴에 눈이 달린듯 했다. 가방을 돌려서 멜까도 생각했다.
회사에 오자마자 폭소가 터졌다. "고생이 많다"는 위로가 들렸다. 자리서 움직일 때마다 후배들이 킥킥댔다. 움직임을 최소화하게 됐다. 화장실도 가급적 참았다. 타인 눈길에 초연한 편인데도 사회적 시선을 이기긴 쉽잖았다.
아마도 대다수가 무관심했다면 편히 다녔을 것이다. 원할 때 노브라를 하는 게 어려운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23일 오후, 브라를 결국 벗었다. 불편함보다 더 힘든 건 불편한 시선이었다. 이를 절실히 깨닫게 됐다.
체험을 마치며 아내가 가끔 동네 나올 때 '노브라'로 다니지 말라며 핀잔줬던 일이 생각났다. 문득 미안해졌다. 생각한답시고 뱉은 말이 결국 '억압'이었다. 가뜩이나 답답한데, 가장 가까운 배우자까지 이렇게 몰랐다. 똑같은 사회적 시선을 들이댔던 거였다.
동시에 집에서 덥다고 팬티 바람으로 있었던 게 생각났다. 남성은 괜찮고, 여성만 왜 부끄러워야할까. 남성은 유두를 내놓아도 되고, 여성은 감춰야 할까. 가슴은 감춰야 할 대상인가, 원할 때 얼마든 숨쉬어도 좋을 소중한 몸인가. 그렇다. 브라를 차는 이유는 많지만, 원한다면 노브라도 괜찮단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이라도 같은 생각을 한다면, 조금씩 편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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