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일요기획]"의로운 말 묻힌 파주 '의마총' 향토문화유산 지정을"

전익진 2018. 8. 19.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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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사흘 달려와 이유길 장군 죽음 알려
광해군이 직접 이름 하사한 유일한 말 무덤
연안 이씨 중중, 흙에 묻혀 있던 무덤 복원
지역 단체, 파주시에 향토문화유산 지정 신청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파주 ‘의마총(義馬塚)’. 전익진 기자

지난 16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183번지. 광탄면과 양주시 광적면을 잇는 발랑저수지 인근 이곳은 잊혀져 버린 역사의 현장이다. 연안 이씨 종중의 묘역 내에 사라져가는 역사의 현장인 ‘의마총(義馬塚)’이 보존돼 있다.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이라는 뜻의 의마총은 약 400년 전 조성됐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원형에 가깝도록 보존이 잘 돼 있었다. 말 무덤은 각종 문헌이 전하는 대로 3단으로 돌을 쌓아 만들어졌다. 돌무덤 앞에는 ‘義馬塚’이라 쓴 비석과 연안 이씨 종중이 설치한 돌로 만든 표지석도 있었다.

이날 의마총을 답사한 우관제 파주문화원 원장은 “청동기 시대 돌로 만든 사람의 무덤인 지석묘(支石墓, 고인돌)가 두루 분포해 있는 파주 지역에 수백 년 전 만들어진 말의 돌무덤이 함께 보존된 것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우관제 파주문화원 원장이 지난 16일 오후 파주 의마총을 소개하고 있다. 전익진 기자

말 무덤이 원형을 유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현장을 안내한 이호재(74) 연안 이씨 수도권 종친회장은 “그동안 돌무덤이 흙에 파묻혀 돌 윗부분만 땅 위로 드러난 채 훼손돼 있었는데, 파주시와 문화재 전문가 등의 자문을 거쳐 최근 흙을 파내고 원래의 형태로 복원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가치가 높은 역사의 현장이 제 모습을 잃어버리면서 충직하고 의로웠던 말의 이야기도 잊혀지지 않을까 안타까워 복원했다”고 말했다.
원형을 되살려 놓았지만 지역 주민 가운데 이 곳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아직 많다. 인근 도로변에도 의마총을 알리는 안내판이 없다. 묘역 옆에 거주하며 의마총을 관리하는 연안 이씨 청연공파의 종손 이봉규(75)씨는 “물어물어 의마총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있긴 하지만, 의마총이 역사문화유적으로 지정되지 않아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변변한 역사관광 안내 시설도 없다”고 말했다.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파주 ‘의마총(義馬塚)’. 전익진 기자

‘의마총’은 조선 시대 왕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유일한 말무덤이다. 자신이 태우던 장군이 전장에서 죽음을 앞두고 애마를 집으로 돌려보내자 이 애마는 사흘을 달려 집에 도달해서는 장군의 죽음을 알리고 숨이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의마총은 바로 이 말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말의 주인은 이유길(1576∼1619) 장군으로 전해진다. 본관이 연안인 이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을 따라 19세에 출정하며 무인(군인)의 길을 길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9품직을 제수받았다.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파주 ‘의마총(義馬塚)’. 전익진 기자

그는 이후 1619년 도원수 강홍립의 부장으로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됐다. 명나라는 과거 만주족의 한 부족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세운 뒤 대륙으로의 확장을 꾀하며 공격을 해오자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1만3000명의 조선 원군이 파견됐지만, 1619년 심하(深河, 지금의 중국 심양 지역)의 후차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대부분 전사했다. 이 전투를 지휘했던 이유길 장군도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이 장군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 죽음을 알리는 ‘(음력)3월 4일 죽다’라는 뜻의 글 다섯 자 ‘3월4일사(三月四日死)’를 자신의 삼베적삼 옷자락에 핏물로 적어 말의 안장에 매어 주고선 말을 채찍질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파주 ‘의마총(義馬塚)’. 전익진 기자

이 장군의 말은 압록강을 지나고 산을 넘어 1000㎞ 정도 거리를 사흘 만에 달려 현재 의마총이 있는 이 장군의 집으로 돌아왔다. 장군의 말은 몸에 매단 옷자락의 글을 통해 장군의 전사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고는 슬피 울다 쓰러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 광해군(1575∼1641)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1621년 이유길 장군에게 병조참판 직을 내렸고, 말의 무덤을 의마총이라 부르게 했다.
이유길 장군의 무덤도 의마총 옆에 함께 조성돼 있다. 말은 돌아와 땅에 묻혔지만, 이 장군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어 가묘로 조성돼 있다. 이 장군은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아 200여 년 후인 1829년(순조 29년)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이유길 장군의 활약과 교지 등이 담긴 ‘연안 이씨 이유길 가전 고문서’는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돼 있다.
의롭고 충성스런 말의 무덤인 파주 ‘의마총(義馬塚)’. 전익진 기자
의마총 위치도. [사진 파주시]

최근 의마총을 향토 문화재로 지정해 사라져가고 잊혀가는 역사의 현장을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유길 장군의 후손인 연안 이씨 청련공파 도문회가 의마총에 대한 원형 복원작업을 마친 후 파주시에 향토문화유산 지정 신청서를 최근 제출했다. 이에 역사문화계와 지역사회 인사들이 호응하고 나섰다.
이영춘 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은 “이유길 장군의 초혼묘(招魂墓)도 드문 사례이며, 충직한 말의 무덤을 함께 만들어 몇백 년 동안 기려온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군의 묘소와 의마총은 충의의 정신을 선양하는 유적이며,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지방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높다”고 했다.
의로운 말의 무덤 ‘의마총’ 옆에 있는 말의 주인인 이유길 장군의 묘. 전익진 기자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이유길 장군과 그의 의로운 말이 보여준 충절의 정신은 후손들에게 전승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의와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며 “의마총을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할 것을 적극 추천한다”고 말했다.

이용준(75) 파주시민회 부회장은 “지역의 중요한 문화유산인 의마총이 체계적으로 보존되고, 후대의 역사자료로 남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찾아 소중한 역사와 의로운 말의 이야기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되살아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호재 연안 이씨 수도권 종친회장은 “전설에서나 나옴직한 의로운 말의 이야기와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파주=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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