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 소시지 직접 못 자르십니까

2018. 8. 1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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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한겨레]

자유한국당 김성태(앞),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가 지난 7월23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전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 들어서고 있다. 노 전 원내대표는 생전에 국회의원 특권 거부와 선거제도 개편 등 정치개혁을 줄곧 주장했다. 사진공동취재단

포크, 칼이 나왔다. 대사관 간부와 나이 육십이 넘은 현지 기관장이 일어서서 출장 온 국회의원 3명 앞에 하나하나 놓아주었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두 사람은 칼을 들고 몇 접시의 소시지와 돼지고기를 먹기 좋게 썰었다. 더 의아했던 건 의원들의 무덤덤한 반응. 누구도 “제가 썰죠” 이런 의례적 말이라도 건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의원들은 가이드 격인 대사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미니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 체류 중이던 2016년 말, 우연히 맥주 집에서 보게 된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 대한 기억의 한토막이다.

2013년 1월 초, 헌정 사상 처음 해를 넘겨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킨 국회를 향한 여론이 차갑던 때. 그 예산안 금액을 조정했던 여야 의원 9명이 예산안 통과 직후 두 팀으로 쪼개 중남미, 아프리카로 떠났다. 국회의장이 국회 특별활동비로 주는 비공개 여행 ‘용돈’을 빼고도, 공식 출장비용은 1억5000만원. 그들 스스로 ‘예산안이 통과하면 관례대로 가던 위로 성격’이라고 말한, 외유성 출장이었다. 비판이 쏟아지자 홍영표 의원(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 민주당 의원 2명은 첫 도착지 케냐에서 조기 귀국을 결정했지만, 새누리당 의원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여정을 이어갔다.(이 팀에 김성태 원내대표가 포함돼 있었다.) 다른 취재차 케냐에 있던 나는 민주당 의원들 숙소를 수소문했다. 그들을 만난 곳은 골프장이 달린 5만평 규모 5성급 호텔이었다. 다음 날 귀국을 앞두고 이들은 케냐 주재 한국 대기업 관계자와 ‘아프리카 디너쇼’를 보며 마지막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의원이 된 지 3년을 갓 넘겼을 뿐인 홍 의원은 관례라는 이유로 이 출장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홍영표·김성태, 두 원내대표가 최근 국회 특활비 폐지 여론 앞에서 머뭇거릴 때 엉뚱하게도 그날의 두 사람이 스쳐갔다. 권위는 소시지를 직접 자르지 않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며, 오래된 관례와 특권적 관행을 거부하는 데 주저하면 여론의 상식과 더 멀어진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렇게 우려했다. “특활비 논란을 겪으며 좋지 않은 잔상을 남겼다. 개혁하라고 했더니 기득권에 안주한다는 이미지 같은 것.”

결국 두 사람이 여론 압박을 받고서야 국회 특활비 폐지에는 동참했지만, 아직 내놓지 않은 보따리들이 있다. 정당에 분기별로 주는 국고보조금 배분 혜택도 그 중 하나다. 가령 100원을 나눌 때 민주당·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등 교섭단체(의원 20명 이상)들이 먼저 절반(50원)을 떼어가 자기들끼리 똑같이 나눈 뒤, 다시 교섭단체 포함 모든 정당이 남은 돈을 의석수, 최근 총선 정당득표율 등에 따라 나눈다. 정의당 등 비교섭단체들은 “처음부터 50원을 가로채지 말고, 100원을 놓고 의석수·정당득표율에 따라 나누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지난해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교섭단체에 유리한 배분 방식을 고쳐달라”고 했지만 큰 정당들이 꿈쩍 않는다.

‘의원 20명 이상’이란 교섭단체 기준을 낮추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20명 기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1972년 국회 해산, 유신헌법 선포를 단행한 이후 비상국무회의가 1973년 2월 국회법을 고쳐 만들었다. 여러 정치세력의 성장을 막으려고 ‘의원 10명’이었던 기준을 20명으로 올린 게 45년째 이어졌다.

소수정당들은 ① 현행 승자 독식 선거제도 탓에 민심이 지지해준 정당득표율보다 의석수를 적게 가져가고→ ② 다시 의원 20명 교섭단체 기준에 막혀 국회 운영 논의·법안 처리 협상에서 배제되고 보조금 차별을 받는 상황을 반복한다. 이는 소수정당을 지지하는 민심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위험을 낳는다.

불공정한 선거제도, 정치제도를 손보는 정치개혁은 큰 정당이 반대하면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과거 노동운동을 하며 불합리에 맞섰다는 홍영표·김성태 원내대표는 9월부터 시작되는 정기국회에서 오랜 관행을 깨는 정치개혁에 적극 나설까, 다른 사람이 썰어주는 소시지를 찍어먹는 것에 안주할까.

송호진 정치에디터석 정치팀장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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