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패전 후 日 여성들, 소련군 성접대 내몰렸다

이가영 2018. 8. 1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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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패전 이후 만주에 남아 있던 일본‘만몽개척단’의 어린 여성들이 소련군 성접대에 내몰렸다는 증언이 나왔다. 만몽개척단은 일본 정부가 1936년부터 국책으로 만주 개척 정책을 추진할 때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이다.

만주사변 당시 만주로 진격한 일본 관둥군. [사진 일본 태평양전쟁연구회]
아사히신문은 15일 ‘개척단의 성접대 고백…없었던 일로 할 수 없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같은 증언을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기후현의 구로가와(현 시로가와 마치) 마을에서 만주로 이주한 개척단 여성들에게 패전 직후 개척단 간부가 소련군 성접대를 지시했다고 한다.

이달 10일 기후시민회관에서 열린 증언집회에 나선 사토 하루에(93ㆍ종전 당시 20세)는 “당시 간부들이 ‘남편이 군대에 간 부인들에게 부탁할 수 없으니 당신들이 희생해줘야 겠다’고 말했다”고 털어놨다.

구로가와 마을의 만몽개척단은 41년 이후 600여명이 중국의 지린성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런 식으로 중국에 간 일본인들이 전체적으로 27만명에 이르렀지만 패전 당시 일본의 관동군 주력이 먼저 철수함에 따라 이들의 대피 등이 문제가 됐다. 실제로 일본 정부의 귀국 지원이 늦어지면서 현지 주민과 옛 소련군에 의해 폭행과 약탈을 당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구로가와 개척단 역시 패전후 일본군에 의해 내팽겨쳐져 현지주민들의 폭행이나 약탈에 시달렸고 인근의 다른 개척단 주민들이 집단 자결했다.

1931년 9월 19일 새벽 일본 관동군이 일방적으로 장쉐량 군을 공격해서 봉천성을 장악한 뒤 환호하는 모습. 만주사변의 출발점이 된 이 사건 이후 조선은행은 만주에서 군자금을 취급하면서 영업이익을 늘릴 수 있었다. 그리고 1925년 이후 계속되었던 긴축경영에서 벗어났다.
당시 구로가와 개척단의 간부가 근처의 구 소련군부대에 마을의 치안유지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려면서 17~21세의 여성들 15명 가량을 구 소련군 성접대에 내보냈다는 것이다. 이는 45년 9월~11월까지 이어졌다. 일부는 중국군을 접대해야 했다.

당시 17세였던 한 피해여성(90)은 처음엔 술자리 접대인 줄 알고 나갔다가 이불이 많이 깔린 칸막이도 없는 방에서 다른 여성들과 함께 폭행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도망치려다 잡혀 삽자루로 얻어맞았다고 한다. 그가 베껴쓴 간부들의 메모중엔 “여자들을 바치고 수백의 목숨을 지킨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이 피해 여성은 자신을 성접대로 내몬 어른들을 용서하지 못해 일본으로 귀국한 뒤 고향인 구로가와를 딱 2번만 찾았다.

당시 21세던 야스에 요시코(2016년 91세로 사망)은 2013년 강연에서 “성접대에 가게 된 여성들을 울었고, 마을의 노인들이 ‘어차피 일본은 안되니 함게 죽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개척단 부단장이 ‘개척단을 지킬지, 자멸할지는 너희에 달렸다. 너희는 힘이 있다’고 설득했다”고 증언했다. 성접대에 몰린 여성들 중 최고참이었던 요시코는 자신을 접고 친구와 “시집을 못가게 되면 함께 인형가게를 하면서 살자”고 얘기 나눈뒤 성접대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얼빈에 입성하는 일본군. 관동군은 와카쓰키 내각의 확전불가 방침을 비웃듯 하얼빈에 입성했다. [사진제공=사진가 권태균]
개척단에는 의무실이 마련됐다. 성병과 임신을 막기 위해 희석한 소독 약으로 여성들의 체내를 닦아냈다. 소독작업을 도운 스즈무라 히사코 (89)는 당시 16세로 역시 성접대에 차출된 뻔 했지만 요시코가 협상에 나서 성접대를 면할 수 있었다.

개척단은 46년 9월 귀국했다. 최종적으로 약 400명이 돌아왔다. 스즈무라는 “돌아온 건 요시코 언니 덕분”이라고 말했다. 스즈무라는 아이를 갖지 못한 요시코에게 자신의 차남을 양자로 보냈다.

증언에 따르면 접대를 강요받은 여성 중 4명이 성병과 발진 티푸스 등으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귀국 후 장기 입원한 사람도 있었고, 성접대 소문이 퍼지면서 독신으로 지낸 사람도 있다고 한다. 피해 여성 대부분은 구로가와 마을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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