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0)김두한, 장군의 아들인가..테러리스트인가

2018. 8. 1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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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김두한은 정치라는 모래판에 던져진 가장 악취 나는 인물이다”

국회 본회의에서 한독당 김두한 의원이 삼성 밀수사건에 관한 발언 도중 국무위원석에 오물을 뿌리려는 장면(1966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버치가 남긴 문서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김두한이다.

한국의 장년 세대들에게 ‘장군의 아들’로 유명한 인물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는 긴또깡이라는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면서 경성에 있던 일본 깡패들을 신나게 혼내주던 식민지 조선의 주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속의 그는 일본의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받던 경성의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로빈 후드였고, 근대판 임꺽정이었다. 준법정신이 뛰어난 시민은 아니지만, 정의의 사도로서 악을 응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버치의 문서 속에 나타나는 김두한은 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버치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미군정하에서 그의 경험에 대해 묻는 편지가 날아들었고, 1973년 12월3일 그는 답장을 보냈다. 그 답장에는 김두한과 관련된 그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울비스씨에게, 나는 1945년 12월15일에 한국에 처음 도착했다. (중략) 나는 사령관과 미소공위의 자문으로서 1948년 5월 말 공위가 붕괴될 때까지 일했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에서의 진행상황을 보면서 철저하게 실망했고, 용기를 잃었다. (중략) 이승만 활동의 한 예로서 나는 김두한의 이야기를 인용할 것이다. 그는 정치라는 모래사장에 던져진 가장 악취 나는 타입의 인물이다. 김은 알카포네가 대중적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그는 일본 경찰의 스파이였다. 그는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끼자 꽁무니를 뺐고, 공산주의를 희롱하였다.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 반을 점령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찾은 것처럼 그는 새로운 빛을 보았다.’

그는 일본 경찰의 스파이였다 일본이 물러나고 미군이 오자 또 다른 기회를 얻는다 민청을 조직, 군 보급품 강탈 종종 정치적 반대파를 급습 고문과 살인을 자행했다

버치가 알고 있는 김두한은 영화 <장군의 아들>에 나타나는 긴또깡이 아니었다. 김두한이 부패한 경찰에 맞서는 전설적인 갱 ‘알카포네’와 비슷했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그는 변절했고, 친일 부역자들과 비슷하게 미군의 진주로 또 다른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승만의 추종자로 군정이 체포, 사형을 선고하나 이승만 정부 수립 후 석방됐다

‘그는 조직원 중 누구도 25세 이하가 아닌 상황이었지만 민주청년운동을 조직했다. 그의 청년그룹은 육군의 보급품과 관련해 부당이익을 취하고 중간에서 강탈하는 데 전문적이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의 본부를 습격하고 고문과 살인을 종종 실행했다. CIC(미군 방첩대)의 폭력대응팀이 그와 그의 그룹을 공격한 밤에도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날 밤 하지에게 이들의 체포 소식을 알렸고, 그들을 미 군사법정에서 다룰 것을 요청했다. 하지는 ‘그것을 나에게 문서로 써서 다음날 아침에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답변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겨우 러치 장관(러치는 미군정 민정장관으로 하지의 보좌관이었다)을 거쳐 하지의 사무실로 갔다. 러치는 나의 권고에 대한 답변으로 ‘최근의 보고서처럼 버치의 이번 권고는 나의 한국화 계획을 뿌리에서부터 망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법정은 그들을 VIP로 대접하고 그들에게 22센트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나는 하지에게 이 모든 일에 대한 새로운 메모를 썼고, 하지는 나의 권고를 따랐다. 그는 한국 법원의 결정을 거부하고 미국 법원에서의 재판을 명령했으며,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승만은 미 태평양사령부에 있는 친구로 하여금 사형 집행을 2년간 미루도록 하였고, 2년 후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를 풀어주었다. 그는 새로운 정부의 영웅으로 꾸며졌다.’
버치의 메모에는 김두한이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장군의 아들’이라는 일부 인식과 달리 버치는 김두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 메모는 김두한과 그가 이끄는 대한민청의 극작가 동맹 습격사건(1947년 4월)과 관련한 것으로 보인다.

버치가 김두한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버치가 받은 김두한의 활동과 관련된 보고서는 모두 부정적인 것이었다. 버치는 김두한과 그의 그룹들이 러치 민정장관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법부와 경찰에 의해 비호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경찰과 여운형’, 1947년 7월21일자, 버치 문서 박스 1).

‘이 메모는 기억에 의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인용한 날짜에 실수가 있을 수 있다. 아래의 상황들은 현재의 문제들을 보여준다. (중략) 대한민청은 공식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존재한다. 이승만의 가까운 추종자이다. 김두한은 이승만의 집에 자주 나타난다. 살인, 압박, 고문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남한 전기공사의 파업을 깨버린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보수주의자인 이태원 사장에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 다시 돌아와서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김두한이 체포되었지만, 체포된 지 얼마 후에 그의 사건은 기각되었다. 김두한은 감옥에 갈 때마다 곧 자유롭게 풀려났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난봄 그가 재판을 기다리면서 이론적으로는 감옥에 있어야 할 때에 장미그릴(Rose Grill)이라는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이 문제를 경찰에게 얘기하자 그들은 습관적으로 그가 풀려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기록을 보여주곤 한다. 김두한이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 그것은 심문하기 위해 데려가는 중이었다고 설명되었다. 약 5개월 전, 김두한의 직접적인 명령과 감독하에 젊은 범죄자 그룹이 불법적으로 10~15명의 극작가 동맹 회원들을 체포하여 김의 사무실로 끌고 가 하루 반 동안 고문을 했다. 이러한 행동은 그의 개인적인 감독하에서 이루어졌고, 그중 한 명은 죽었다(나는 이 건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지만, 그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몇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CIC 요원들은 그 장소를 습격해 김과 그의 부관들을 체포했다. 재판에서는 두 명을 죽이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며, 김두한에게는 160일의 징역과 2만엔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극작가 동맹원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그중 한 명은 죽였다 전력회사 파업 깨기도 가담 사장에게는 살해 협박도

극작가 동맹과 관련된 사건은 1947년 4월에 발생했다. 극작가 동맹은 원래 불교사원이던 곳을 예술학교로 이용하려는 신청서를 냈고, 미군정은 이를 허가했다. 버치의 문서에는 불교사원으로 되어 있는데, 남산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의 신사 자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곳을 김두한과 그가 실질적으로 이끌던 우익청년단체인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 인사들이 습격했다. 미군정의 CIC는 이들이 ‘우익’이라고 정치적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문적인 살인강도범’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좌익과의 싸움에는 잘 개입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지원해야 할 사람들을 위협하여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김두한이라는 이름이 보이는 버치의 또 다른 메모.

1947년 5월의 전력회사 파업에 개입했을 때에도 김두한 그룹의 행동은 논란이 되었다. 회사의 사장은 파업한 노동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회사로 돌아오도록 협상을 하고 있었고, 거의 설득이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김두한과 대한민청 그룹이 개입하면서 파업 노동자 중에서 피살자가 발생했다. 청년단원들에게 항의하던 사장의 사무실을 김두한이 방문했다. “이 사장 나를 보시오. 내 이름은 김두한이오. 당신은 우리 그룹의 행동을 방해했소. 90일 이내에 나는 힘을 가질 것이고, 내가 힘을 갖게 되면 돌아와서 맨손으로 당신을 죽일 것이오.”(‘김두한의 체포’, 1947년 4월21일자, 버치 문서 박스 4)

김두한과 관련된 사건은 단지 폭력사건만이 아니었다. 마약 사건과 관련된 문서도 있다. ‘1946년 2월 김두한의 대한민청에서 압수한 아편을 사법국에서 전량 파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법국과 법원의 일부 관리들이 지난 18개월 동안 이 아편을 시중에 판매했다고 한다. 핵심적인 사람들은 이×, 김××, 옥××, 김××, 강××, 양×× 등이다. 이×은 검찰총장이고, 김××는 사법국장이다.’(‘아편’, 버치가 하지 사령관에게, 1947년 11월22일자, 버치 문서 박스 1)

마약 사건과 관련된 범죄 행위에 대해 제보를 한 사람은 경찰 내에 있었던 최능진이었다. 그는 CIC와 공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48년 5·10 총선거에서는 서울 종로를 지역구로 출마해 이승만과 경쟁했던 인물이다. 그는 전쟁 중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버치는 김두한을 체포함으로써 미국이 법과 질서를 지키는 나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지 사령관에게 미군정이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사회적 요소를 제거하는 정부로서의 권위를 세우기를 희망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번번이 물거품이 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김두한은 풀려났다.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로 기억되는 알카포네였는가, 버치의 문서에 나오는 테러리스트였는가? 김두한은 3대 총선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사사오입 개헌을 비판하고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난했다가 국회의장의 징계를 받았다. 진보당 준비위원회에 잠시 참여하기도 했던 김두한은 제2공화국에서 집권 민주당의 친일 경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1966년에는 삼성의 사카린 밀수를 비판하면서 국회에 오물을 투척하기도 했다. 김두한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우익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는 ‘전문 살인 강도범’이다 여운형 암살에도 관련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치가 김두한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여운형 암살 사건에도 그가 관련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김두한과 관련한 내용이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생성된 ‘경찰과 여운형’ 제하의 문서에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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