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경제, 쉬운 길과 어려운 길

김준기 논설위원 입력 2018. 8. 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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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요즘 ‘경제’가 화두다. 국정농단 사태와 촛불집회, 문재인 정부 출범, 전방위적 적폐청산, 역사적인 남북, 북·미 정상회담 등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2년여 동안의 한국 사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경제 문제가 새삼 부각하는 데는 당연히 경제적 요인이 있을 터다. 지표상으로 보면 고용과 투자는 부진하고 성장률은 떨어지고 있다. 급기야 정부는 당초 3.0%였던 올해 성장률 목표치를 2.9%로 떨어뜨리고, 일자리 증가 목표도 32만명에서 18만명으로 크게 줄였다. 경제가 화두가 된 데는 정치적 요인도 크다. 보수진영은 경제를 문재인 정부의 약한 고리로 포착하고 집중 공격을 하고 있다. 80%를 넘어 고공행진하던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60%대 초반까지 밀린 데는 경제 문제가 있다고들 한다. 총선까지 2년도 안 남았다. 결국 문재인 정부도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는 모양새다. 문 대통령이 강도 높은 목소리로 규제 완화를 주문하고 재판이 진행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난 게 그 일환이다.

정부의 경제 살리기 선택지에는 손쉽고 익숙하며 효과가 빠른 길과, 어렵고 낯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길이 있다. 손쉬운 길의 예 중 하나가 외환위기를 물려받은 김대중 정부의 경제 살리기다.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인 경제정책은 건설경기 부양과 신용카드 활성화였다. 경기부양에 ‘땅파기’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은 오래된 신화다. 대규모 투자와 고용이 동반되는 대형 토목·건축 공사는 즉각적인 효과를 낸다. 성장률 등 경제 지표는 빠르게 회복됐다. 그러나 건설경기 부양은 노무현 정부의 집값 급등으로 이어져 정권에 치명적 타격을 줬다. 길거리에서 현금을 뿌려가며 마구잡이로 발행된 신용카드는 결국 거품이 터지며 ‘카드사태’로 이어졌다.

손쉬운 길 중 또 하나는 대기업을 이용하는 거다. 대기업이 마음껏 사업할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풀어주고, 그들이 가장 걱정하는 총수 지배구조를 위협하지 않는 대신 투자와 고용을 독려하는 것이다. 며칠 전 SK가 34만여명의 고용창출이 전망된다는 총 15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내놓았고, 삼성도 조만간 그 이상의 것을 발표한다고 한다. 하지만 고용창출 능력은 대기업계보다 중소기업계가 크다는 것은 경제계의 상식이다. 제대로 된 고용 증대를 위해서는 대기업 지원보다 튼튼한 중소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바른길이다. 과거에 이른바 ‘모피아’로 불렸던 경제 관료들에게 경제 운용을 맡기는 것도 손쉬운 길 중 하나다. 그들은 지침만 내려오면 그에 맞춰 우리 경제의 미래 청사진을 최대한 아름답게 그려내는 그야말로 전문 기술자들이다. 개혁을 하겠다고 집권한 노무현 정부가 ‘경제는 전문가에게’라는 명목으로 관료들에게 의존한 것은 이후 내내 지적을 받았다.

반면 어려운 길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쟁’ 등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같은 것이 해당될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복지확충으로 저소득층의 소득을 높여 소비를 진작시키고 이를 생산과 투자·고용 등 전반적인 경기 활성화로 이어간다는 것이다. 하청업체와 가맹점을 등치는 대기업과 가맹본사의 ‘갑질’을 뿌리뽑고 4차 산업혁명에 맞는 혁신적인 신산업을 육성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세 가지 요소가 이론대로 맞아 돌아간다면 한국 경제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길은 쉽지 않다. 우선 자신들의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대기업과 기득권층의 반발이 크다. 복지를 대폭 확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세금을 늘리는 것은 국민적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몇 년간의 재정적자를 각오하면서라도 복지를 늘리자고 하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선뜻 선택하기엔 겁나는 일이다. 이 길은 역대 어느 정부도 제대로 가본 적이 없어 검증도 안돼 있다. 그래서 최저임금 인상에 영세상공인들이 힘들어하는 등 ‘시행착오’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효과를 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정부는 고심하고 있다. 어려운 길만으로는 가시적 성과가 안 보이니 손쉬운 길을 기웃거린다. 물론 두 길이 배치되는 것만은 아니다. 소득주도, 혁신성장을 하는 데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이나 업무 추진력이 뛰어난 경제 관료의 힘도 필요하다. 하지만 손쉬운 길에 잘못 빠지면 후유증이 크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선택과 실천은 문재인 정부에 달렸다. 당장의 지지율 하락에 대응하는 대증요법만 쓰거나, ‘경제는 심리’라며 레토릭·제스처를 활용하는 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정교한 정책 조합을 만들어 내는 능력과 국민들을 납득시킬 지혜가 절실한 때다. 실패한다면 좌우 양쪽에서 협공받았던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김준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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