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세계유산 등재기념 아리랑 음반도 안팔려.. 國樂 현실에 충격"

이경택 기자 2018. 8. 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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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석 정효국악문화재단 이사장은 재단의 모범적인 성공사례에 고무돼 보다 많은 재력가가 국악 발전을 위한 기관과 단체 설립에 나서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김정석 정효국악문화재단 이사장

서울 와 신문배달 하며 고학

어렵게 대졸… 제일제당 입사

25년 삼성서 일하며 전무까지

퇴직후 15층 호텔 지어 운영

국악전공 졸업 매년 1000명

최영숙 명창마저 ‘월세살이’

사회 도움 덕 이만큼 살게 돼

사회환원차원 국악인 돕기로

50억원 사재털어 재단 만들어

우리 문화유산 저변확대 노력

“국악계는 요즘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우리가 잘살게 된 것이 얼마 안 됐잖아요.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며 어찌 국악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어요. 그래도 그냥 보아 넘기기엔 우리 국악 현실이 너무 열악했어요. 제가 늦게나마 2014년 정효(正曉)국악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국악 발전을 위해 몸을 바치게 된 것도 그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김정석(78) 정효국악문화재단 이사장은 국악인 출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국악과 관련 있는 일을 한 인물도 아니다. 그는 젊어서 한창 일할 때 ‘삼성맨’이었다. 1966년 제일제당(CJ그룹 전신)에 입사, 1990년 제일합섬 전무이사로 재직하다 퇴임할 때까지 그는 25년간 삼성그룹에서 임직원으로 근무했다. 그가 남들은 은퇴의 여유를 즐기는 노년의 나이에 국악계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2012년 12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7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아리랑이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이 당시 뉴스를 통해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아리랑만큼 국민에게 친숙한 민요도 없다. 당연히 김 이사장도 그 소식을 접했다.

“너무도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악에 대한 무지함 또한 느끼게 됐습니다. 회사 생활을 그만둔 후 퇴임 임원들과 함께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관람한 적은 있었지만, 민요 아리랑의 뿌리인 우리 국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예술의전당 바로 옆에 국립국악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여기까지였다면 정효국악문화재단은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히 평소 우면산 등지를 함께 오르던 지인으로부터 아리랑이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발매된 등재기념 CD를 받게 된 것이 김 이사장을 국악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한 기폭제라면 기폭제였다.

“아리랑 음반을 녹음한 최영숙 명창의 연구실이 마침 제 서초동 집 인근이었어요. 지인들과 함께 연구실을 찾았습니다. 이수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반갑게 저희를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얘기를 듣고 보니 딱하기 그지없었어요. 그동안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내며 연구실을 운영했는데 월세를 못 내 보증금을 다 까먹었고 결국 다음 달에 문을 닫는다는 사연이었죠.”

김 이사장은 그처럼 어려운 처지임에도 “1억 원을 들여 아리랑의 유네스코 등재 기념음반을 만들었다”는 최 명창의 얘기에 CD를 200장 구입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대신 팔아주겠다고 했다.

일단 김 이사장은 삼성 다닐 때의 동료들에게 CD를 보내줬다. 그리고 얼마 뒤 만나보니 대부분 CD 포장도 벗기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해야 했다. 그때 “우리 세대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50달러에 불과했던 우리 연령의 세대는 먹고살기가 힘들었고,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밤낮없이 일해야 했기 때문에 문화를 향유할 여유가 없었죠. 또 문화생활을 할 만한 사회적 기반도 매우 취약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그나마 어느 정도 살게 되니 대중가요의 인기에 밀려 국악은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의 삶 자체가 우리의 어려운 근·현대사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그는 강원 울진(김 이사장이 태어날 때는 울진이 지금처럼 경북이 아닌 강원도 산하 지방도시였다) 출신이다. 울진은 당시 수시로 무장공비가 침투하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곳에서 태어나 중학교(울진 평해중)를 마치고 1년 동안 농사일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쥐여주신 한 달 하숙비만 달랑 들고 단신 상경했다. 열일곱 살 무렵이었다.

경북 안동과 경주를 거쳐 이틀 동안 산 넘고 물 건너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새벽 5시였다. 분분히 벚꽃이 날리는 4월의 봄이었지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는 용산에 하숙을 마련했다. 용산을 첫 정착지로 정한 것은 한강과 가까워 찾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그의 삶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서러운 노래 ‘아리랑’처럼 애환(哀歡)으로 가득 채워진다.

신문배달에 구두닦이 그리고 연탄배달을 하며 고학으로 선린상고를 다녔다. 춥고, 배고프고 힘든 시절이었다. 고학하며 불량배들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다. 그러나 뛰어난 학업 성적 하나로 버텼다. 선생님들도 그를 강원도에서 온 ‘감자바위’라고 놀렸지만, 그의 성적을 인정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그의 첫 직장은 한국은행이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군 제대 후 그가 새롭게 선택한 직장은 삼성이었다. 1966년 현 CJ그룹의 모 회사인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에 입사했고 회사 경영진에게 인정받아 1969년 삼성전자 창립에 관여하며 승승장구…. 삼성에 다니며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보릿고개 아시죠. 저 어릴 때만 해도 아이가 많이 죽어 나갔어요. 굶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 껍질을 찧어 먹다가 그것이 장에 걸려 변을 못 봐 아이들이 잘못됐죠. 후일 대학을 마치고 삼성에 다니면서도 여유롭게 살 수 없었어요.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바로 출근했습니다. 와이프랑 영화 한 번 보러 갈 시간 없이 주말이건, 휴일이건 일만 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부분 그렇게 살았어요. 국악을 즐길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요.”

최 명창을 돕기 위해 음반을 팔며 그는 열악한 우리 국악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국악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밥을 제대로 먹고사는 사람이 손으로 꼽을 지경이었다. 대부분 어렵게 살고 있었다. 어떤 국악인은 하루 공연비 3만 원을 받기 위해 도시락을 싸 들고 출퇴근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매년 학교에서 졸업생 1000명 이상이 배출되는데 졸업생이 갈 곳은 없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2개의 국립 국악중고등학교와 30여 개의 사립 예술중고등학교를 비롯해 대학원 석사, 박사 과정을 포함해 전국에 국악과가 있는 대학이 28개교가 있습니다. 연간 배출하는 국악 전공 졸업생이 해마다 1000명을 넘어서고 있지만 이들이 사회에 나와 취업할 수 있는 기회는 소수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국악인들의 현실을 보며 문득 나를 반성해 보게 됐습니다.”

김 이사장은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SDI, CJ, 제일합섬을 마지막으로 1990년 삼성에서 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고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의 요청에 의해 새한그룹에서 새한미디어, 새한종합건설 사장으로 5년간 더 사회생활을 했다.

그리고 1995년 건설회사를 차리고 건설업계에 뛰어든 후 1997년에는 강남의 서초동 요지에 특급호텔인 15층짜리 프로비스타호텔을 차렸고, 현재도 운영 중이다.

“제가 호텔을 운영하면서 이만큼 사는 것도 다 사회적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젊어서 살았던 서초동의 아파트만 해도 그래요. 480만 원에 분양받았던 것을 팔 때는 2억5000만 원 받았죠. 그런 것이 바로 불로소득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불로소득이야말로 모두 사회적 도움으로 생겨난 것이죠. 개인적으로 35년간의 직장생활은 물론, 현재까지 사업 활동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그 같은 사회적 도움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 같은 반성과 함께 그에게 든 생각이 바로 미력하나마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사회로 환원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국악계의 어려운 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족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그는 2014년 국악인들을 위한 공간인 정효국악문화재단 설립에 나섰다. 불교의 8정도(八正道)의 정(正) 자와 원효대사의 효(曉) 자를 차용해 이름도 정효라 지었다.

“아직은 운영이 쉽지 않습니다. 50억 원의 사재를 털어 차렸고, 좋은 공연 유치를 위해 전 직원이 발로 뛰고 있습니다. 성공을 믿습니다. 재단이 국악의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되고, 국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무엇보다도 모범적인 성공사례를 남겨 보다 많은 후원자와 재력가들이 국악 발전을 위한 기관과 단체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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