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 선생, 8월의 독립운동가

2018. 7. 3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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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은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1867~1923)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8월 한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김교헌 선생에 대한 전시를 개최한다.

조선총독부가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하자, 선생은 대종교 본사를 만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46개의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해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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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 [사진=독립기념관]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재직중 일제와 갈등
-대종교에 입교해 제2대 교주로 취임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독립기념관은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1867~1923)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8월 한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김교헌 선생에 대한 전시를 개최한다.

1867년 7월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해 예조참의, 성균관대사성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

독립협회 간부진들이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독립협회의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재직할 당시 일제에 맞서다 해직됐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고, 대종교 총본사의 요직을 맡으며 민족종교로서 대종교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했다.

조선총독부가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하자, 선생은 대종교 본사를 만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46개의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해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에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해 단군과 대종교의 근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1916년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취임했고, 일제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했다.

이후 민족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 앞장섰고 교세를 크게 넓혔다.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일, 현천묵 등 대종교 인사 중심으로 조직된 북로군정서에 참여했고, 이듬해 10월 북로군정군은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지휘하에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보복 차원에서 그 일대 대종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고, 대중교의 독립운동 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김교현은 본부를 영안현으로 옮겨 재건을 준비했으나 1923년 11월 병으로 만주에 있던 대종교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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