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재벌개혁, 관료와 재벌에 또 '포획'되나

송진식 기자 2018. 7. 2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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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문재인 대통령이 7월 9일 열린 인도 노이다시 삼성전자 제2공장 준공식에서 참석자들과 테이프 커팅을 준비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문 대통령, 모디 총리. / 연합뉴스

소득주도 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로 대표되는 문재인 대통령의 ‘J노믹스’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면서 현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도 중대 기로에 놓였다. 정부는 이구동성으로 “세 가지가 한 바퀴가 돼 굴러가는 것이 J노믹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미 학계와 재계에서는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 중 어디에 중점을 둬야 하는지를 놓고 하루가 멀다 하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누가 나서서 규정한 바도 없는데 진보진영에서는 소득주도 성장을, 보수진영에서는 혁신성장을 각각 밀어붙이는 쪽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과거 정권에서 수없이 반복됐던 ‘분배냐 성장이냐’의 논란과도 무척 닮아 있다.

공정경제의 영역인 재벌개혁 문제도 이 논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이 공존할 수 없다면 어느 쪽으로 힘이 실리느냐에 따라 재벌개혁의 방향성 역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출범 1년이 넘도록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진보진영에서는 벌써부터 “참여정부가 겪은 재벌개혁 실패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문 정부 첫해 재벌개혁 점수는 0.5점” 7월 18일 진보진영 학자들이 모여 ‘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사회·경제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의 개혁을 기치로 걸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초심을 잃고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은 내용의 선언문이 발표됐다. 진보진영 학자 323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선언 중에는 재벌개혁 문제도 담겼다. 재벌개혁의 최적기를 맞고 있음에도 지난 1년간 정부가 해낸 것이 거의 없다는 지적이었다.

서명에 참여한 명단을 살펴보면 재벌개혁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온 국내 전문가들은 거의 모두 포함됐다. 명단에 없는 전문가를 꼽자면 서명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정도다. 굳이 더 찾자면 참여정부 초기 정책실장을 지내며 재벌개혁을 진두지휘했던 이정우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의 이름도 빠졌다. 이 교수는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경제정책을 총괄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지식인 선언에 동의하지 않아서일까. 그렇지 않다. 이 교수는 <주간경향>과의 전화통화에서 “지식인 선언에 나온 내용에 전반적으로 공감한다. 서명을 안한 것은 별개의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그럼 문재인 정부가 재벌개혁에 얼마나 미진했길래 지식인 선언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을까. 경제개혁연대 산하 경제개혁연구소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을 종합평가해 점수를 부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세부공약을 분류한 뒤 가산점을 부여해 정책 달성도에 따라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평가한다. 5월 11일 발표된 평가보고서를 보면 문재인 정부는 출범 첫해 경제민주화 정책 평가에서 23점(100점 만점 기준)을 받았다. 100점을 모든 공약이 이행된 상태라고 봤을 때 아직 5분의 1 정도밖에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4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최종구 금융위원장(왼쪽부터), 홍장표 당시 경제수석,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관료·재벌에 의한 포획’은 재현되는가 세부 평가내역으로 들어가 재벌개혁 과제 부문을 살펴보면 점수는 더 낮다. 핵심인 ‘재벌 경제력 집중 억제와 지배구조 개혁’ 과제의 경우 전체 10개 과제, 20점이 만점인데 문재인 정부는 0.5점을 받았다. 경제개혁연구소는 “평가대상 공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서 이루어진 개혁조치들이 상당수 있긴 해도 국민의 기대치에 비해 미흡했다”고 밝혔다. 특히 경제개혁연대가 친정인 김상조 위원장의 공정위에 대해서는 “갑질 방지와 갑질의 처벌 강화에서는 일정 성과가 있었지만 재벌개혁 핵심법안에 있어서는 성과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지식인 선언에서 문재인 정부의 재벌개혁을 아직 ‘실패’로 규정한 것은 아니다. 공통적인 지적은 “속도가 늦어도 너무 늦다”는 것이다. 진척이 없으니 의지가 없는 걸로 보일 수밖에 없다. 김상조 위원장은 6월 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진보진영의 개혁 조급증·경직성 탓에 정부의 개혁이 실패할 수 있다”고 항변했지만 선언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이 좌초되는 과정을 몸소 겪었던 이정우 교수 역시 속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교수는 “지금 재벌도, 보수정당도, 보수언론도 모두 힘을 잃은 상태”라며 “이럴 때 속전속결로 안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올해 안에 주요 과제들을 해내지 못하면 재벌개혁을 안 하는 걸로 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참여정부의 재벌개혁 실패는 진보진영에 과오인 동시에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서명에 참여한 한 지식인은 “서명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정말 참여정부처럼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고 토로했다. 관련해서 많은 분석과 연구가 나와 있지만 종합적인 결론은 비슷하다. 정부 초기 재벌개혁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였지만 번번이 정책이 좌절되자 성과를 낸다는 명분 아래 관료들과 재벌들에게 손을 내민 결과 개혁의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재벌의 무분별한 지배력 확장을 견제하던 출자총액제한제가 무력화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참여정부 때 국회를 통과했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지주회사의 자회사 주식 소유 기준을 상장회사 20%, 비상장회사 40%로 각각 낮추는 방안도 개정안에 포함됐다. 자회사 주식 소유 기준을 완화해준 것은 숱한 부작용을 낳았다. 재벌들은 손쉽게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고, 각종 규제도 피해갈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이 기준을 다시 높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재벌들은 “그렇게 했다간 회사별로 수조원이 필요해 기업들이 망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한 번 잘못 들어선 재벌정책을 되돌리기가 이렇게 어렵다.

최근 소득주도 성장이냐 혁신성장이냐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은 진보 지식인들에게 참여정부의 실패 트라우마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있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정부 내 논의의 흐름을 보면 소득주도 성장이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낙마로 꺾인 상태에서 기획재정부 등 관료들이 주도하는 혁신성장이 부각되고 있다”며 “과거 개혁정책의 실패를 가져온 관료주의가 다시 득세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중이고, 보수진영도 이에 합세하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혁신성장이 정부에서 힘을 얻을수록 문 대통령 역시 관료들에게 둘러싸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이다.

재벌에 의한 포획 트라우마도 살아나는 중이다. 문 대통령이 인도 방문과정에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달라”고 밝힌 것이 특히 결정적이었다. 일자리를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문 대통령이 올 들어 고용지표가 매달 악화되면서 큰 난관에 부딪힌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가운데 삼성그룹의 총수를 만나 일자리 창출을 당부한 것은 사실상 재벌에 정부가 손을 벌린 것과 다름없다는 게 진보진영의 시각이다. 더욱이 이 부회장은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2심까지 유죄판결을 받았고, 현재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다. 이 만남을 놓고 블룸버그는 24일 “대기업의 역할을 인정한 문 대통령의 태도 변환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정부부터 조급증 버려야 문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만남을 단순한 이벤트 정도로 보는 시각도 물론 적지 않다. 진보진영에서도 “대통령이 원론적으로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나”라는 의견이 나온다. 재계도 정부가 재벌에 손을 벌렸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글로벌 시대에 대통령이 당부한다고 해서 대기업들이 투자나 고용을 더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며 “투자나 고용 등의 문제는 주가나 총수의 리더십과도 연계된 문제여서 그렇게 즉흥적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통령과 재벌들이 가깝다고 해서, 더 나아가 정부가 친기업 정책을 편다고 해서 재벌들이 투자나 고용을 더했다고 볼 만한 사례도 실제로 없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년 발표해온 주요 대기업 투자·고용 집계 자료를 보면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한 2012~2015년 대기업들의 투자는 113조9000억원에서 116조6000억원으로 거의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 특이한 점은 이 기간 연초에 재계가 발표한 투자계획과 해당 연도 연말에 집계한 실제 투자실적 간에는 많게는 20조원가량 차이가 발생했는데, 이는 대기업의 투자 집행이 정권의 성향보다는 그때그때 다양한 대내·외적 경제여건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고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2013년 대기업의 신규채용은 14만4501명에서 2014년 12만9989명, 2015년 12만1801명, 2016년 12만6394명으로 오히려 감소추세였다. 박 전 대통령이 입이 닳도록 기업들의 투자와 고용을 촉구하고, 전경련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른바 ‘재계 입장’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친기업 행보를 지지하던 때의 일이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을 만나면서 이 같은 논란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는 게 진보진영의 시각이다. 비난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부회장을 만난 배경에는 ‘성과 조급증’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상조 위원장은 진보진영의 조급증을 탓했지만, 조급증을 버려야 할 건 오히려 정부라는 것이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 부회장을 만난 건) 일자리 지표가 악화되자 화들짝 놀란 정부가 마음이 급해진 것”이라며 “개혁정책은 중장기적으로 바라보고 가야지 단기적으로 볼 문제가 아니다. 재벌개혁이 실패냐 성공이냐를 따지기에 앞서 정부가 얼마나 적극성을 가지고 추진했는지부터 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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