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우아한 아르헨티나]관객은 떠나도 극장에 남은 기억.. 찬란히 노래하던 '아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글·사진 김형규 기자 2018. 7. 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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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동 틀 무렵의 7월9일 대로.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 앞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뜻하는 알파벳 ‘BA’ 조형물이 보인다.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었다. 산업혁명도 식민지 경영도 없었다. 농축산물 수출이 비결이었다. 19세기 말 발명된 냉동선과 나날이 발전한 철도교통의 덕을 톡톡히 봤다. 드넓은 팜파스(대초원)에서 방목해 키운 소를 잡아 유럽과 미국에 실어날랐고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아르헨티나 연방의회 의사당(Congreso Naciona). 건물 구조와 돔의 형태가 워싱턴DC의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과 닮았다.

그 돈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드는 데 사용됐다.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남미의 파리’라는 별칭이 붙었다. 여러 차례의 경제 위기를 겪으며 지금은 쇠락해버렸지만 여전히 도시 곳곳엔 과거의 영광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Casa Rosada) 앞을 지키고 선 아르헨티나의 독립영웅 산 마르틴 장군의 동상.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7월9일’ 대로를 보면 당시 아르헨티나인들이 꿈꾼 수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너비 140m가 넘는 이 도로는 버스 전용차선 때문에 생긴 교통섬을 제외하고도 왕복 20차선이 넘는다. 있는 힘껏 달려도 5개가 넘는 신호등을 통과해 한 번에 길을 건너기 힘들 정도다. 1936년 대로의 한가운데 건설된 오벨리스크는 하늘을 찌를 듯 넘치던 자부심을 웅변하는 듯 서 있다.

■110년 된 극장에서 ‘인생 오페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찬란했던 옛 시절을 더듬어보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바로 콜론 극장(Teatro Colon)이다. 오벨리스크에서 두 블록 떨어진 이 극장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이나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와 비견할 만한 110년 전통의 세계적 극장이다. 지금도 오페라, 발레, 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공연이 연중 열린다.

1908년 개관한 콜론 극장. 1925년부터 전속 오케스트라와 발레단, 합창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3일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관람하러 콜론 극장을 찾았다. <아이다>는 1908년 개관 당시 첫 공연작이기도 했다. 미리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하는 게 당연하지만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쉽게 포기하기는 싫었다. 공연 시간인 오후 5시보다 1시간쯤 일찍 매표소에 가 당일 현장 판매 티켓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 역시 매진됐다는 말에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려는 찰나 한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자친구가 갑자기 약속을 깼다며 남은 표 한 장을 사지 않겠냐고 물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콜론 극장의 오페라 <아이다> 공연 팸플릿 표지

운 좋게 얻은 티켓은 7층 꼭대기 좌석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을 한참 오르고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여러 번 지나는 동안 빛나는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가구, 벽과 기둥의 섬세한 조각 장식에 차례로 시선이 갔다. 조금 낡은 느낌을 감출 순 없었지만 공들여 잘 관리한 티가 났다. 한창때는 얼마나 호화로웠을지 상상이 갔다.

콜론 극장은 소리의 울림을 키우고 반사율을 높이기 위해 내부 인테리어에 독특한 곡선 형태를 적용하고 유럽에서 수입한 최고급 건축 자재를 사용했다.

말굽 모양의 메인 홀은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도배돼 있었다. 2500여개의 객석은 빈자리 하나 없었다. 가벼운 기대와 설렘으로 들떠 있던 극장은 막이 오르고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거대한 침묵에 휩싸였다.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공연 내내 조그만 소음이라도 들릴라치면 어디선가 ‘쉬~’ 하고 주의를 주는 소리가 꼭 들려왔다.

배우들이 내뱉는 이탈리아어 대사도 무대 위 전광판에 뜨는 스페인어 자막도 해독 불가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미리 찾아본 줄거리에 맞춰 무대 위 상황을 유추하다 보면 자연스레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유명한 ‘개선행진곡’의 합창이 힘차게 울려퍼질 땐 ‘아, 이 장면이구나’ 하고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마이크 하나 없이도 배우들의 목소리는 생생하게 감정을 실어날랐고, 장면 전환에 따라 쉴 새 없이 들고나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다채롭게 변하는 무대장치도 즐거운 눈요깃거리였다.

공연이 없는 날은 가이드 투어로 극장 내부를 견학할 수 있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마주친 관객의 대부분은 노인들이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공연 감상을 주고받는 모습들이 동네 마실 나온 사람처럼 익숙하고 편안해보였다. 호세 카레라스와 루치아노 파바로티, 마리아 칼라스 같은 위대한 가수들이 콜론 극장 무대에서 노래할 때도 아마 그들은 객석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한 그들이 극장에서의 문화 생활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탱크를 위한 궁전

콜론 극장을 나와 서쪽으로 일곱 블록(약 1㎞)만 걸어가면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수도국(Palacio de Aguas Corrientes) 건물이 나온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궁전(Palacio)이라는 이름처럼 화려하기 때문이다. 특유의 색깔이 돋보이는 프랑스식 이중경사 지붕(mansard roof)에 건물 외벽은 영국과 벨기에에서 수입한 30만개의 테라코타 조각으로 장식했다. 건물은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천천히 둘레를 걸으며 겉모습을 살피다 보면 구석구석 작은 부분까지 아름답게 꾸민 정성에 감탄하게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물 공급을 책임졌던 시 수도국 건물.

1894년 개관한 이 건물은 애초 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됐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엔 콜레라 등 전염병이 여러 차례 돌았고, 밀려드는 유럽 이민자들로 도시 규모도 급격히 커지고 있었다.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할 상수도 시스템이 절실했다. 건물 안에는 7만2000t의 식수를 저장할 수 있는 12개의 물탱크가 들어갔다. 장식적인 외부와 달리 내부는 180개의 금속 기둥이 촘촘하게 들어차 건물 구조를 단단히 지탱했다.

수도국 건물의 외벽은 무려 30만개의 테라코타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돼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결국 물 보관 창고일 뿐인데 이토록 화려하고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단순함과 실용성을 강조한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라면 펄쩍 뛸 노릇이겠지만, 19세기 후반의 아르헨티나는 그런 나라였다. 진보된 기술에 예술적 혼마저 더하려 했고, 사소한 부분에까지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했다.

건물은 지금도 시 수도국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한쪽엔 오래된 타일과 수도꼭지, 변기, 비데 등을 전시하는 작고 특별한 박물관도 운영하고 있다. 정해진 날짜에만 가이드 투어가 가능하니 관심 있다면 미리 홈페이지 등에서 정보를 찾아봐야 한다.

■왕과 귀족의 자리에서 독서를…

엘 아테네오 서점 입구. 서점 간판 뒤로 ‘그랜드 스플렌디드’라는 옛 이름이 보인다.

수도국 건물에서 북쪽으로 5분, 세 블록만 걸어가면 100년 넘은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엘 아테네오 서점(El Ateneo Grand Splendid)이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008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10곳을 소개하며 이 서점을 두 번째로 꼽았다.(첫 번째는 13세기에 지어진 도미니코회 교회를 개조한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의 서점이었다)

20만권의 장서와 3만점의 음반을 갖춘 엘 아테네오 서점. 연간 100만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다.

주인이 몇 차례 바뀌며 극장은 1970년대부터 잉마르 베르히만, 프랑수아 트뤼포 등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변신했다. 2000년 ‘엘 아테네오’와 ‘예니’(yenny)라는 서점 브랜드를 가진 프랜차이즈 기업이 인수하면서 극장은 마침내 거대한 서점이 됐다.

2층 홀에서 내려다 본 서점 로비 모습

입구에 들어서면 마주치는 로비는 서가가 들어찬 여느 서점과 다를 바 없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메인 홀에 다가가면 금세 입이 떡 벌어진다. 객석이 있던 자리는 이제 20만권의 장서와 3만점의 음반이 채우고 있다.

1층과 2층엔 서적이, 3층엔 클래식과 탱고 음반이 전시돼 있다. 지하층에선 어린이 서적과 대중음악 음반을 판매한다.

한바탕 떠들썩했을 무대는 조용히 책을 읽고 차를 마시는 카페로 변신했다. 귀족이나 부호들이 독차지했을 무대 바로 옆 박스석도 누구나 편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돔 천장의 프레스코화와 무대를 살짝 가린 거대한 붉은 커튼만이 과거 모습 그대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극장의 무대는 카페로 박스석은 책을 읽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책벌레들의 천국, 부에노스아이레스

서점은 개관 때부터 폴 오스터, 슬라보이 지제크,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에르네스토 사바토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출판기념회나 낭독회 등 행사를 열며 독자와의 만남을 주선해왔다. 새로 음반을 낸 음악가들도 종종 서점의 무대에 선다. 덕분에 서점은 여가를 즐기는 시민과 명성에 이끌린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연간 방문객은 100만명 이상이다.

1차대전 후에 찾아온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천장화에는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 여신과 올리브나무 가지를 부리에 문 비둘기, 아기천사 등이 그려져 있다

놀라운 점은 엘 아테네오 서점의 인기가 ‘독특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도시문화포럼(WCCF) 자료에 따르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세계에서 인구 대비 서점이 가장 많은 나라다. 280만명 인구에 서점이 730개가 넘는다. 대략 10만명당 26개꼴이다. 식민 모국이었던 스페인 마드리드가 16개, 셰익스피어의 나라 영국 런던이 고작 10개인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숫자다.

서점 3층에서 촬영한 파노라마 샷

실제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걷다 보면 쉽게 눈에 띄는 게 서점이다. 서울로 치면 명동쯤 되는 쇼핑가 플로리다 거리에도 엘 아테네오의 체인점이 두 곳이나 더 있다. 헌책을 파는 중고서점도 100여곳이 성업 중이다. 많은 헌책방이 자정 넘어서까지 불을 밝히고 책벌레 손님을 맞는다.

서가를 둘러보는 손님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를 걷다 보면 헌책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우아한 여행자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잠들지 않는, 잠들기 아까운 도시다. 아름다운 조각공원이나 다름없는 레콜레타 묘지, 프랑스 회화의 보고와 같은 국립미술관도 많은 여행자들을 유혹하는 명소다. 천천히 둘러보며 나만의 감상을 음미하기엔 일주일도 부족할 것이다.

대표적 쇼핑가인 플로리다 거리의 한 서점
레콜레타 묘지
여전히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의 사랑을 받는 에바 페론의 묘. 그의 무덤가엔 늘 싱싱한 꽃이 가득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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