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파 감초 배우 정규수, "진정한 조연은 단단한 기둥과도 같은 것"

김시균 2018. 7. 2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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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승환 기자
[나는 조연배우다-19] 배우로 살아온 지 40여 년. 인터뷰가 생애 처음이라는 그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너무나 망설였다"며 스스로를 자꾸만 낮췄다. 음성은 가늘게 떨렸고, 말들은 더듬기를 여러 번.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점심은 무얼 드셨냐"고 물으니 그는 간신히 답했다. "긴장돼서 밤을 꼬박 샜습니다. 아침, 점심 전부 거르고 왔지요. 밥이 안 넘어 가더라고요." 그러면서 덧붙이는 거였다. "아무래도 나는 인터뷰할 만한 놈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위장된 겸손이 아닌 듯했다. 숱한 배우들을 만나왔으나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으므로, 당황스러운 건 도리어 그런 그를 마주한 나 자신이었다.

1957년 전남 무안군 태생. 이름은 정규수(61). 지금껏 영화 45편, 드라마 60여 편, 연극 100여 편에 출연했다. 고로 얼굴은 제법 낯이 익을 것인데,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그리 익숙진 않다. 왜일까. 수십 년째 고수 중인 그의 변함 없는 가치관과 이에 기반한 생의 행적 때문일 테다. 그는 언제고 낮은 곳을 자임해왔다. 자신이 빛나기보다 객석의 관객이 더 빛나길 바랐다. 조연의 역할은 극의 반석을 세우는 일이라 지금도 철썩같이 믿는다. 그 반석이 튼튼해야 주연들도 마음껏 연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그것이 조연 배우로서 도리"라고 본다.

/사진=이승환 기자

진실한 배우는 언젠간 알려지는 법이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대중에게 각인되는 계기가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2006)가 그 분기점일 것이다. 그가 연기한 MBS 영월지국 지국장은 서울에서 온 왕년의 록스타이자 DJ인 최곤(박중훈)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인물이었다. 당시 그의 연기가 워낙 실감났기에 방송국 관계자들 눈도장을 한눈에 받게 된다. 이후 그의 드라마 출연작이 급증하는 이유다.

그리고 한재림 감독의 '관상'(2013). 913만 관객을 모은 이 영화는 정규수 얼굴을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이다. 연홍(김혜수)의 심복 박첨지로 나온 그는 특유의 능청과 익살을 버무려 극에 모종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후에도 최동훈 감독의 천만 영화 '암살'에서 스파이 출신 꼽추, 775만 관객을 모은 '히말라야' 김 회장, 올해 이준익 감독의 신작 '변산'과 독립영화 '식구'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서민적·향토적 이미지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나는 별 얘기가 안 되는 사람"이라며 내내 겸양하는 그를 서울 충무로 한 찻집에서 만났다. 감색 칼라티에 하늘빛 모자, 그리고 허름한 청바지. 평소 옷차림 그대로라는 그는 "(남)명렬이 형님(나는 조연배우다 18회)에 비하면 말 주변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 걱정이 태산같다"며 멋쩍게 웃음 지었다.

-스스로를 너무 낮추시는 건 아닌가요?

▷아니, 정말 폐 끼치는 거 아닐까 싶어 두렵습니다. 오죽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왔겠어요.

-배우님의 방대한 출연 목록을 보면 외려 경이로워지는 걸요. 긴장해야 하는 건 도리어 저입니다.(웃음)

▷여기 오기 전에 아내가 저한테 그러대요. "여보, 모처럼 긴장해야겠네." 딸도 그러더라고요. "아빠, 떨지 말고 잘하고 와."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 위주로 활동 중이시지만, 오랜 기간 연극 배우로 무대에 오르셨죠. 초대 '품바'셨고요. 아무래도 이 얘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품바'는 일종의 모노 드라마였지요. 제가 3500회 정도 올렸습니다. 쑥스럽지만 아마 최다일 거예요.

/사진=이승환 기자

이쯤에서 잠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품바'는 고(故) 김시라 선생(1945~2001)이 각본과 연출을 겸한 1인극이었다. 1인 14역을 맡은 품바와 고수 한 명이 짝을 이뤄 각설이타령과 구전민요, 익살스러운 춤과 몸짓 등을 구현해 보인다.

품바는 한국 연극사상 처음 떠돌이 각설이패를 내세운 것이었다 . 이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하층민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현대사의 질곡과 애환을 나눈다는 것. 정규수는 애초부터 그렇게 밑바닥 광대를 자처해온 사람이다.

품바의 인기는 대단했다. 1981년 서울에서 초연돼 1996년 한국 연극사상 최초로 최장기 공연·최다 관객을 동원해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다. 1988년엔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타냈다. 외국 순회 공연도 잦았다. 1987년과 1993년 미국 순회 공연, 1993년 일본, 1997년 호주 공연 등이 그 예다.

주지할 것은 정규수가 이 마당극 닻을 올린 초대 품바라는 사실이다. 그가 1대 품바로 십수 년간 활동하면서 숱한 전수자들이 그 맥을 오롯이 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국내 일인극의 입지전적 인물이자, 이 세계의 가장 곤궁한 이들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한 보기 드문 배우다.

이 사실을 추어올리니 정규수는 양손을 허리춤 위로 올려 거듭 손사래를 쳤다. "아이구, 그런 소린 하지 말아요…."

-사실인 걸요. 그럼 '품바'를 시작할 당시는 어떠셨나요.

▷서울 초연이 1981년이지만 실제로 제가 연극을 시작한 건 1979년부터예요. 처음엔 질색을 했어요. 연기 경험이 전무한 데다 모노 드라마를 감히 제가 어떻게 하냐는 거였죠. 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속된 극단도 없었던 때였고.

-그런데 어떻게.

▷계기는 아주 사소했지요. 고교 졸업하고 곧바로 방위를 했어요. 제대 후 마을 예술제에서 뒤치닥꺼리하며 지냈고요. 예술제라고 했지만 별것은 없어요. 조그마한 마을 회관에 서예전 같은 걸 열고 그랬죠. 제가 하는 일이란 게 주변 청소와 뒷정리였어요. 그러다 공연 한번 해보자는 얘기가 나온 겁니다. 근데 할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규수야, 너가 한번 해보자."

-그렇게 올린 게 '품바'였던 거군요.

▷아뇨. 1979년에 '장군멍군'이라는 20~30분짜리 극부터 먼저 올렸어요. 어쩌다 하게 됐는데 무난히 동네에선 욕 안 먹을 정돈 하겠더군요. 10~20명 이웃 주민들 모아놓고 소소하게 벌인 거였으니까. 그러다 다음 회를 하게 됐는데 이런 얘기가 나오대요. '야, 이번에는 우리 작품 한번 올려보자.' 그렇게 시작된 품바입니다.

-준비는 어찌 하셨나요.

▷마을에 '천사촌'이라고 있었어요. 일종의 거지촌이죠. 거지들이 타령을 하잖아요. 저걸 따와 1인극으로 올려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다같이 녹취하러 간 겁니다. 근데 이분들이 허락하겠어요? 안 하지요. 혹시 자제분들이 "너가 그 거지 아들이냐"며 손가락질이라도 당할까 염려하시는 거예요. 그러다 결국엔 이분들과 술까지 마시게 됐죠. 막걸리 사드리며 취기가 오르시는 순간을 쭉 기다렸어요. 그러다 한 마디 한 마디 끄집어내 노래도 하시고 그러면 유심히 관찰하고 녹취해서는 돌아와 연습했어요.

-혹 기억나는 분이 있으세요?

▷유명한 양반이 있었어요. 우리 마을에 매일 동냥 다니던 분이었는데, 집집마다 누비며 궂은일도 도맡곤 하셨어요. 거지라고 하지만 주민들과 거의 식구처럼 지낸 분이었죠. 그분을 많이 참고했어요. 아무튼 그러다 매년 12월에 여는 예술제에 '품바'를 올린 겁니다.

-반응은 어땠어요?

▷처음엔 이런 것도 극을 올리냐며 의아해 하시더군요. 그러다 너무나 좋아하시는 거예요. 가볍게 시작한 건데 전국 공연으로까지 이어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홀로 극을 이끈다는 게 부담이 엄청났을 텐데요.

▷아무렴요, 그냥 울라면 울고 웃으라면 웃었어요. 왜 우는지 웃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하라는 대로 했어요. 내면에서 무언가 우러나와야 하는데, 그냥 시키는 대로 했으니 얼마나 어설펐을지. 그리고, 일화도 꽤 있어요.

-일화라고 하면?

▷1980년대 후반이었어요. 김시라 연출과 전국 공연을 다닐 때였죠. 부산에 있는 친구집에 놀러갔어요. 당시에는 스탠드 바, 나이트에서 각설이쇼 하는 친구들이 많았지요. 전국적으로 500명 정도 됐을 거예요. 아무튼 어느 날 부산에 있는 쇼를 보러 갔어요. 마침 각설이타령을 하더군요. 같이 간 친구가 그 친구를 불렀어요. 술 한잔 하자고요. 근데 그 친구가 내 옆에 턱 앉더니 그러는 겁니다. "안녕하십니까, 정규수입니다." 아니, 내가 정규수인데 말예요.(웃음)

-사칭하는 사람들도 많았군요.

▷그 친구가 소개하는 걸 가만히 들어봤어요. "여기 사장님과 잘 알아서 한 번씩 도와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니까 꾸며낸 이야기를 막힘 없이 풀어놓는 겁니다. 그러더니 친구가 그러대요. "규수야, 이 사람이 규수냐 너가 규수냐!" 그러더니 이 양반이 그제야 저를 알아본 건지 "어이구, 죄송합니다" 하대요.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외국 공연도 긴 기간 하셨지요.

▷미국은 일곱 군데를 돌았어요. 시카고, LA, 미니애폴리스, 디트로이트 같은 도시들이었죠. 현지인들 사는 곳, 교민들 사는 곳 가리지 않았어요. 어르신들이 참 좋아하시더군요. 서로 자기 집에 자고 가라고 그러실 정도로. 야외에서 공연을 벌이면 깡통을 가운데 둬요. 거기에 10~20달러씩 팍팍 넣어주시니 무척 감사했죠. 한번은 입양아, 지적장애아들이 많은 미니애폴리스에서 공연을 하는데, 코가 큰 백인 양반이 즐겁게 보고 계시더라고요. 그분한테 "나 따라 각설이타령 해보라"며 시키고 그랬는데, 나중에 그분이 분장실로 오시대요. 알고보니 레이니 전 주한대사였던 겁니다. 너무 즐겁게 보았다며 한국 가서 꼭 보자고 그러시더군요. 그리고 나환자촌도 여러 번 간 적이 있어요. 그분들에게 다가가 "나 왔소" 하면 굉장히 반겨주시곤 했지요.

/사진=이승환 기자

아내를 만난 것도 그즈음이다. 때는 1992년 초 대학로에서 품바 공연을 한창 벌일 때였다. 그의 공연을 난생 처음 보러 온 국민일보 기자가 한 명 있었다. 지금의 아내였다. 연극 담당 기자 대신 취재하러 온 거였는데, 그날 그의 공연을 본 이후 매일 같이 찾아오더라고 했다. 그렇게 닿은 인연은 2년 후 결혼으로까지 이어진다.

-한참 유명해질 때 만나신 거네요.

▷네, 아내는 18년간 기자로 일했는데요. 당시 저에게 최고의 조언자였어요. 그리고 가장 무서운 조언자였죠. 한번은 이런 적이 있어요. 제 연극을 보고 나서 아내 얼굴이 영 안 좋아요. 궁금하대요. 그날 밤 둘이 술을 마셨어요. "왜 그러냐" 물었죠. 아내가 그러대요. "그냥 술이나 해." 그러다 털어놓는 겁니다. "규수 씨, 지금부터 연극 인생 관 뚜껑 덮지? 오늘 관객들한테 규수 씨가 돈 환불해줘야 해, 연극 그렇게 하지마, 어떻게 연기를 그렇게 설렁설렁해." 그날 분위기는 참 싸했지요. 그러고 며칠 있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공연을 올렸는데, 그날은 아내 얼굴이 환해지는 겁니다. "진작 이렇게 하지"라며(웃음). 그만큼 꼼꼼했어요. 그리고 조언자가 더 계신데. 고(故) 강준혁 선생님(1947~2014)이셨어요. 공연기획하시던 분이세요. 이분께선 "연극인이 돈을 좇으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해주곤 하셨죠. 당시 품바 공연을 한 달간 스탠드 바나 나이트에 올리면 작은 빌라가 생긴다는 말까지 나돌았어요. 선생님은 "그러면 안 된다"고 잘라 말하셨던 분이에요. "처음엔 돈이 생길지 모르나 이내 타락하게 될 거라"면서. 그래서 저는 한번도 밤 무대에 올라본 적 없어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매너리즘에 젖어든다. 십수 년 1인극을 올리자 "내가 최고"라는 생각이 서서히 일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전국으로 유명세를 한참 탈 시기이므로 그럴만도 했다. 문제는 자신감을 넘어선 자만이었다. 언제부턴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스스로가 보였다. 부끄러워졌다. 정규수는 "내가 풍선이라는 느낌이 들더라"고 했다. "바늘 하나만 대면 빵 터질 것 같은 존재처럼 보였던 거죠. 아, 이건 아니다, 자세를 고쳐먹어야 겠다 싶었지요." 결심은 곧바로 실행으로 옮겨진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님에도 15년가량 변두리 역할만을 자처했다. 이를 테면 '주인공 외 다수'의 다수에 해당하는, 보이지 않는 보조 역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조연도 아니죠. 청년 1, 2, 3, 4 뭐 그런 것들만 긴 기간 고집했어요."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거군요.

▷그렇죠. 당시 품바만 한 건 아니었어요. 정극도 했는데, 자꾸만 품바 '쪼'가 나와요. 그게 잘 안 버려지는 겁니다. 나는 그게 편하고 그걸 제일 잘하니까. 그래서 다른 연극을 찾아다녔어요. 무보수로도 많이 했죠. 풍선 안 되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연기 전공자도 아니고, 품바도 사실 마을회관에서 시작한 거고, 제가 키가 크거나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때 연극 선배들도 그러셨어요. "뿌리도 없는 놈이 어디서 까불고 다니느냐. 너는 변방에서 노는 놈일 뿐이다."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출연을 하게 되신 것도 그런 자각의 일환이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첫 출연 영화가 이장호 감독님의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1989)죠. 당시 이 감독님이 연이어 영화 흥행에 실패하고 있던 시기에 제작된 작품인데. 아, 첫 영화이신데도 주인공이셨네요.

▷몸값이 싸서 불러주신 게 아닐까 해요. 제가 가수를 꿈꾸던 청년을 연기했는데, 필로폰 인신매매 조직에 연루되는 이야기예요. 아후, 처음 카메라 앞에 서는데 제가 생각해도 지지리도 못했죠. 구렁이한테 물리는 신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감독님이 구렁이한테 들이대라고 요구하셔서 다가갔더니 구렁이가 정말로 제 이마를 콱 물더라고요. 피가 철철 났어요. 그 피를 닦아주시면서 감독님이 한마디 하시더군요. "네가 한 연기 중에 제일 잘했다." 3층에서 떨어지는 것도 와이어 없이 그냥 떨어졌고요. 다치진 않았지만 다리가 어찌나 후들거리던지.

-연극 무대가 아닌 카메라 앞의 세상, 영화라는 세상은 어땠습니까.

▷굉장히 큰 경험이자 고비였어요. 영화를 시작하고부터 더 겸손해야 하겠더군요. 연극할 땐 그래도 경력이 있으니 딴에는 "좀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는데, 그럼 안 되는 거였어요. 영화가 피사체하고 카메라하고 나하고의 맞물림이 있어야 하고, 주연을 받쳐줘야 하고 감독과도 맞아야 하죠. 연극배우로서 기존 습관들이 전부 문제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좀 오버해야 하잖아요. 과장이 들어가는데, 영화는 그럼 안 되거든요. 감독님도 매일 "아니다, 아니다" 하시니 자연히 주눅이 들었고요.

-게다가 배우에겐 클로즈업에 대한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요.

▷운전하는 신이 떠오르는데요. 카메라 앞에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꾸 제가 핸들을 조금씩 움직이는 거예요. 불필요한 삐뚤삐뚤한 움직임들을 나 혼자 계산해서 넣는 겁니다. 뭔가 밋밋하다고 느껴져 연극하듯이 했던 거죠. 그런 걸 생각하면 첫 영화는 그리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창피해요.

-두 번째 필모그래피도 이장호 감독님 작품이에요. '명자 아끼꼬 쏘냐'(1992)라고.

▷약간 친일 캐릭터였어요. 한국 사람인데 조선인들을 못살게 구는 조조연 역할이죠. 그때 이 감독님 말씀이 기억나네요. "이 자식은 내 영화할 때는 연기 못하더니 남 영화에선 잘하네." 이 영화가 연출은 이 감독님이 했지만 제작은 김지미 선생이 했거든요. 러시아 사할린에서 찍은 작품이었죠. 전작은 이 감독님이 제작과 연출을 다 하셨고요.

-이후 '49일의 남자'(1994) '기막힌 사내들'(1998) 등에 조·단역으로 출연하셨는데, 이후 10여 년간 영화 출연을 안 하신 것 같던데요.

▷줄곧 연극 무대에 올랐어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돈은 상관없었어요. 누가 나를 써줄 수 있는 데면 무조건 갔어요. 잔심부름이라도 시켜주면 감사히 했고요. 그러다 당대 몇몇 유명 연출가들과 작업을 할 수 있었고, 그런 경험들이 전부 자양분이 됐지요. 그러다 '간첩 리철진'(1999)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캐스팅됐어요. 지금 유명한 신하균, 정재영, 임원희, 이문식이랑 같이 택시 강도단을 맡았지요. 저는 이들 대장이었는데, 이때 배운 게 많아요.

-배운 것이라면요?

▷이 사람들과 내가 호흡하려면 내가 최대한 낮은 자세로 임해야겠구나. 낮은 자세로 임한다는 게 형으로서 선배로서가 아니라 동료로서 최대한 들어주고 도와주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늘 연출 밑에 심부름을 도맡았어요. 그리고 아는 척 안 하고 늘 물어봤고요. 단원들한테 늘 "내 연기 어땠어"라고 자주 물어봤고요. 후배들이 "제가 감히 어떻게"라고 하면 술 사주며 슬쩍 물어보는 식이죠. "오늘은 물을 이렇게 마셨는데, 어제는 이렇게 마셨거든. 이 손이 낫니 저 손이 낫니." "내 대사 톤이 이랬는데 이게 나아, 저게 나아?" 영화도 마찬가지였어요.

/사진=이승환 기자

낮은 자세로 임한다는 것. 그가 이를 고수하는 맥락까지 더듬자면 저 멀리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일 무렵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가 아버지 얼굴을 기억 못하는 이유다. 가장의 부재. 이것은 그의 가정에 지워지지 않는 멍에였다. 어머니는 낮엔 행상을, 밤에는 파출부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혹독한 가난이 이어졌다.

 정규수는 "고교 졸업 때까지 용돈이란 건 손에 쥐어본 적이 없다"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빵, 떡, 과자, 커피, 튀긴 건 안 먹습니다. 당시에 이 다섯 가지는 그림의 떡이었어요. '저런 것을 탐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줄곧 해오며 컸기에 지금도 못 먹겠더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품위는 지키며 산 그다. 이 모두 어머니 가르침 덕이다.

당신이 요구한 건 두 가지였다. '호로자식 되지 말아라.' '어르신 만나면 인사 잘해라.' 이것은 그의 삶에 있어 거스를 수 없는 철칙이자 정언명령이 된다. "하루에 동네 어르신을 열 번 만나면 열 번 모두 깍듯이 인사하고 다녔어요. '진지는 잡수셨소?' '장에 가쇼?' '안녕합쇼'. 그러면 어르신들이 하나같이 그러세요. '느그 아버지가 그랬다' '느그 아버지가 꼭 그랬다'고요."

-다시 영화 얘기로 갈까요. 장진 감독의 '킬러들의 수다'(2001),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2'(2005) 등에 이르기까지 단역 위주 출연을 하시다 2006년 '라디오 스타'에 캐스팅되세요. 배우님이 영화 매체로 얼굴을 알리게 된 첫 작품이 아닐까 해요. 이준익 감독님이 '간첩 리철진' 제작자였으므로, 두 번째 만남이시네요. 당시 연극계 명배우들이 총출동한 작품이었죠. '왕의 남자'(2005) 에서 칠득, 팔복 역을 했던 정석용, 이승훈 배우도 함께 나오셨고.

▷이 감독이 지국장 역을 찾다가 "규수 형한테 물어봐야지"하고 연락하셨대요. 그런데 첫 리딩을 하는데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리딩 끝내고 불안감에 땀을 뻘뻘 흘리며 "저 어찌 해야 하죠"라고 물었어요. 감독이 웃으며 그러대요. "형 알아서 해요." 매 신마다 제가 A안, B안, C안을 들고 갔어요. 그럼 감독님이 쓱 보고 골라주세요. 그러다 3~4번째에 이르면 "에이 몰라, 형 알아서 해. 잘하면서" 하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서 역할이 조금씩 커졌어요. 신도 늘었고요. 뭐랄까, 이 감독님은 참 은인 같은 분이십니다. 이 영화 이래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2010)의 방짜쟁이, '평양성'(2011)의 고구려 보장왕, 최근 '변산'(2018)의 선미부까지 쭉 연기하게 해주셨으니.

배우 정규수는 영화 `암살`에서 연홍(김혜수)의 심복 박첨지를 열연했다. /사진=쇼박스

-'관상'(2013)에서 배우님이 연기한 박첨지 인기가 대단했죠. 김혜수 배우님이 연기한 연홍의 심복 역이었고요.

▷그냥 차비만 줘도 참여하고 싶다고 말한 작품이었어요. 한재림 감독이 감사하게도 제 눈이 참 좋다며 캐스팅해주셨어요. 그런 말씀 들으니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죠. 그리고 (송)강호 형이 나오는 작품은 꼭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

-배우님이 연배가 훨씬 위지 않나요? 왜 형이라고….

▷아, 저는 (이)병헌이 형, (최)민식이 형, (황)정민이 형 이렇게 불러요. 처음은 다들 부담스러워하는데, 나중엔 "규수 형 냅둬, 원래 그러시니까" 하고 넘어가요.(웃음) 저한테 이들은 배움의 대상이에요. 그리고 전부 스타잖아요. 저는 이들을 뒷받침해주는 데 충실해야 할 테고요.

-매우 귀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문득 기억이 나는데요. '관상'에서 김혜수 씨를 목말 태우는 신이 있어요. 그걸 찍을 때 현장에서 김혜수 씨를 27번을 들었다 놨다 했어요. 허리가 상당히 아파왔죠. 전혀 티를 안 냈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내가 이런 귀한 분들을 떠받쳐주고 위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이걸 행복으로 여겨야 한다. 나는 주인공이 못 되는 사람이지만 주인공들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같은 마음 자세 덕분일까. 이후 찍은 '암살'(2015)은 그가 나온 생애 첫 천만 영화로 기록된다. 그 이듬해 '히말라야'(2016) 또한 775만 관객을 모으며 크게 흥행했다. '암살' 초반부 자신이 임시정부 스파이였다며 증언하는 꼽추, '히말라야'의 김 회장 모두 극중 비중은 크지 않으나 주연들을 떠받치는 귀한 조연들이다. 세 영화 관객을 합치면 어림잡아 2900만명. 그럼에도 그는 "초심을 잃으면 안 된다"고 다짐조로 말했다. "지금도 배낭에 연필과 지우개를 담은 필통을 갖고 다녀요. 틈만 나면 대본에 쓰고 지우고 하니까."

`관상`은 정규수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작품이다. 연홍(김혜수)의 심복 박첨지로 나온 그는 특유의 능청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는 "연홍을 목마 태우는 신을 찍을 때 김혜수 씨를 27번을 들었다 놨다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허리가 상당히 아파왔죠. 전혀 티를 안 냈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내가 이런 귀한 분들을 떠받쳐주고 위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이걸 행복으로 여겨야 한다. 나는 주인공이 못 되는 사람이지만 주인공들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진=쇼박스

-이제 슬슬 마무리할 시간인데요. 앞서 여쭈려다 미뤄둔 질문이 있어요. 살아오시며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셨는지요.

▷(고민하며) 드라마 한 편을 끝내고 8개월가량 쉴 때가 있었어요. 40대 후반 때 일입니다. 작품이 안 오더라고요.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연기밖에 할 게 없더군요. 작품 활동이 없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것 같았어요. 주변 사람 눈치가 보이니 혼자 은둔형이 돼 가고요. 여기서 끝인가 보다.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죠. 아, 내가 여기서 마지막이구나.

-그걸 이겨낸 계기가.

▷어느 날이었어요. 혼자 공원을 누볐죠. 종로 탑골공원 같은 곳들을요. 유심히 어르신들을 관찰했어요. 전부 나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거침없이 말씀하시고 건강해 보이시더라고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나도 나이 먹어 저렇게 살려면 이렇게 지내선 안 된다. 일어나야 된다.' 그래서 움직였지요. 동료들 만나러 다니고 일부러 어울리고 정보도 얻고. 그러니 자연스레 새 작품 연락이 오대요. 절대 주저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어려운 때일수록 더 바삐 움직여야 한다는 걸요. 옛날에 읽은 도덕책 생각이 나요. 한 방앗간이 있어요. 근데 근처에 새 방앗간이 생겨 동네사람들이 죄다 그리로 가요. 그런데 원래 방앗간 주인은 손님이 없는데도 계속 작업을 이어가요. 멈추지 않고요. 왜일까요.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던 거죠. 그러더니 다시금 그 양반 방앗간이 잘되더라는 겁니다. 저는 힘들 때 자주 이 이야기를 떠올리곤 해요.

시간이 무르익을수록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건 그를 마주한 나 자신이었다. 삶을 진실히 대면하는 자에게서만 느껴지는 모종의 기품. 나에게는 부재한 그것.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가.

그렇게 마지막 질문에 이른 것이다. "앞서 '관상' 때 말씀주시긴 했는데, 배우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조연이란 뭔가요." 정규수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눈빛은 한층 또렷해졌고, 말마디에 막힘이 없었다. 그런 그의 답변을 있는 그대로 옮겨본다.

"진정한 기둥 같은 거죠. 그것도 큰 기둥. 그기둥들이 받춰줘야 영화가 완성되는 겁니다. 조연이 있기에 용마루가 올라가고 지붕까지 올릴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말이죠. 기둥은 그 기둥 역할에 충실해야 해요. 만일 기둥 하나가 다른 색으로 칠해지면 그건 '오버'인 거죠. 비록 두드러지진 않아도 기둥도 기둥 '나름의 멋'이 있으니, 우리는 그걸 즐기면 됩니다.(웃음)" 부러 꾸미지 않아도 '나름의 멋'이 풍기는 배우. 소탈히 웃음짓는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김시균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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