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구석진 시골마을.. 반짝이는 '삶의 이야기'가 흐른다




(126) 영화 ‘라디오 스타’의 배경… 강원도 영월
20년전 왕년의 스타 가수가
시골 라디오 디제이로 전락
막무가내식 방송 이어가다
주민과 소통하며 다시 인기
KBS 영월 방송국이 주무대
2004년 지역방송국 통폐합
지역민들 무대 보존 요구로
‘라디오스타 박물관’ 재탄생
‘저혼자 빛나는 사람은 없어’
명대사 읊던 별마로 천문대
서부시장 안의 청록다방 등
읍내 공간들도 아직 영업중
지난 4일 개봉한 영화 ‘변산’은 이준익 감독 연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감독은 ‘왕의 남자’ ‘황산벌’ 등 사극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현대극에도 능하다는 걸 작품을 통해 증명해 왔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지난 2006년 개봉한 ‘라디오 스타’를 꼽을 수 있다.
‘라디오 스타’의 주요 배경은 단종의 애환이 깃든 강원 영월이다. 서울에서 2시간 남짓한 거리, 강릉 방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제천 IC에서 38번 국도로 들어서면 충북 제천, 단양과 경북 영주, 봉화에 접해 있는 영월이 모습을 드러낸다. 태백산맥과 차령산맥 그리고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그 사이를 평창강과 동강이 흐른다. 여행자들에게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선사하는 곳이나 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조선 시대 세조는 조카 단종의 유배지로 영월을 택했다.
영화 ‘라디오 스타’는 왕년의 스타가수가 라디오 DJ로 영월에 오게 되면서 주민들과 소통하고 매니저와의 깊은 우정을 확인하는 과정을 웃음과 감동으로 그려냈다. ‘왕의 남자’의 최석환 작가와 이 감독이 다시 만나 만든 영화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가슴 따뜻한 이야기는 물론 작품성과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인정받았다.
극 중 ‘비와 당신’이라는 곡으로 1988년 가수왕을 수상한 최곤(박중훈)은 20년이 지난 지금 퇴물로 전락했다. 사고뭉치이자 철없는 최곤 옆에는 일편단심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뿐이다. 어느 날, 미사리 카페촌에서 노래를 부르던 최곤은 손님과 시비가 붙어 유치장 신세를 지고, 민수는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그러다 방송국 국장을 만나 최곤이 영월에서 DJ를 하면 합의금을 내준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DJ 역할을 우습게 여기며 막무가내로 방송하는 최곤 때문에 민수는 계속 난처한 상황을 겪는다. 급기야 최곤은 청록다방의 김 양을 즉석 초대 손님으로 방송에 등장시키는데 예상과 달리, 김 양의 사연이 많은 청취자의 심금을 울리며 큰 호응을 얻는다. 지역민들과 소통하는 영월의 인기 방송으로 자리매김한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전국 방송이라는 영광과 함께 최곤에게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최곤이 다시 인기를 얻자, 민수는 대형 음반기획사와의 계약을 도와주며 그의 곁을 떠나는데….
이런 줄거리를 회상하며 최근 영월을 찾았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영화 ‘라디오 스타’의 배경이 된 KBS 영월방송국이다. 지금은 ‘라디오 스타 박물관’으로 바뀐 KBS 영월방송국은 극 중에서는 MBS 영월지국으로 나온다. 최 작가가 지난 2004년 재정적인 문제로 문을 닫은 KBS 영월방송국 앞을 우연히 지나다가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다. ‘대스타였지만 한물간 록가수가 영월에서 방송을 한다면 어떨까’라는 물음에서 비롯된 발상은 이 감독을 만나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로 완성된다.
험난한 산맥들로 둘러싸인 영월은 곳곳에 탄광이 산재했다. 영월 광산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부터 조업을 시작해 197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영월에서 지하자원을 채굴하면서 인구가 집중되고 경제가 활성화됐다. 영월 지역에 장터가 많이 생겨났던 것도 이때부터다. 1965년 7월에는 KBS 원주방송국 영월중계소가 개소한다. 1975년 12월에는 영월중계소 청사를 증축 준공하면서 출력을 증강했고 1976년 4월에는 영월방송국이 개국해 방송이 시작됐다. 그러나 198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2000년대 들어서는 4만 명 정도만 영월에 거주하게 됐다. 군 단위 행정구역 중에서 방송국이 있는 지역은 영월이 유일했지만 2004년 지역방송국 기능조정 통폐합 정책에 따라 폐지됐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은 방송국을 없애는 것보다 보존하기를 원했고 영월군에서는 방송국 건물을 매입해 2015년 ‘라디오 스타 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다.
박물관에는 라디오에 깃든 추억을 따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코너가 만들어져 있으며, 실제로 DJ를 체험할 수 있는 시설도 구비돼 있었다. ‘라디오 스타’ 코너에서는 영화의 배경이 된 ‘청록다방’과 ‘좋은 소리사’의 대형 사진과 더불어 OST를 통해 영화 ‘라디오 스타’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영월 지역에는 현재 16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는데 영월이 국내 유일의 ‘박물관 고을 특구’로 지정될 수 있던 계기는 영화 ‘라디오 스타’ 때문이다.
박물관을 나오니 좁게 길이 난 산책로가 보였다. 최 작가가 걸었던 그 길을 걸어봤다. 아름다운 동강을 내려다보며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김삿갓 시비(詩碑)가 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나니 금강정(錦江亭)이 나온다. 1428년(세종 10년) 김복항이 지은 금강정은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던 장소다. 그리고 금강정 아래쪽에는 깎아지른 절벽 낙화암이 있는데, 여기는 단종을 모신 궁녀와 신하들이 단종이 승하하자 올라와 동강에 몸을 던졌던 곳이다. 영화에서는 최곤이 방송사고를 치자 민수가 이곳에서 “우리 같이 동강에 빠져 죽자”라고 말한다. 최 작가가 이곳을 지나면서 대사를 생각해낸 것은 아닐지…. 박물관은 동강이 흐르는 금강정의 절벽 위쪽에 있다.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는 천문대가 자주 등장한다. ‘별마로천문대’는 라디오 스타 박물관 뒤 해발 800m의 봉래산에 있다. 구불구불 1차선 도로를 올라가다 보면 넓은 마당에 별을 관측할 수 있는 천문대가 나온다. 밤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매우 낭만적인 일이다. 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서로 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해진다. 최곤과 민수는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며 명대사를 읊는데 이는 천문대 관측실에서 촬영한 것이다. 민수는 최곤의 재기를 위해 자신이 떠날 것을 다짐하고, 대형 기획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곤아, 너 아니? 별은 말이지…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 세상에 혼자 빛을 내는 사람은 없어.” 그리고 진심으로 최곤이 재기하길 바라며 민수는 떠난다. 관객들 뇌리에 깊이 기억되고 있는 민수의 대사는 영월 읍내의 영월맨션아파트에 벽화로도 새겨져 있다.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이 100회 특집을 맞아 첫 공개방송을 하던 장소 또한 별마로천문대 앞마당이다. 현실에서의 별마로천문대는 영화에서만큼이나 낭만적인 장소다. 도로가 좁고 가팔라서 천문대까지 올라가기가 쉽지 않지만 봉래산 정상에 오르니 활공장(滑空場)이 있어 넓은 시야로 동강과 영월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영월의 풍경은 천체 관측과 함께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발걸음을 옮겨 영월 서부시장으로 향하는 길. 영월 읍내는 워낙 작은 마을이라 촬영 명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서부시장을 향해 가는 길목에 꽃집 총각이 짝사랑했던 아가씨가 근무하던 농협이 눈에 띈다. 길 건너 맞은편에는 청록다방도 보인다.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청록다방의 김 양이 철물점과 세탁소 주인에게 외상값을 갚으라고 말하고 엄마를 향해 절절한 사과를 한 뒤부터 영월 주민들의 상담소가 됐다. 꽃집 총각은 사랑 고백을 하고, 할머니들은 고스톱을 치다가 막판 싹쓸이 규칙이 있는지도 물어본다. 실업 청년이 취업에 대한 고민을 늘어놓는가 하면 서울로 간 아들에게 사랑의 말을 전하는 아버지도 나온다.
영화 ‘라디오 스타’는 거의 모든 장면이 영월에서 촬영됐고 방송국, 청록다방, 중국집, 철물점, 세탁소, 미용실, 기찻길, 모텔까지 영월 읍내의 모든 공간을 활용했다. 영화의 주요 공간은 지금도 영업 중인 실제 장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영월은 영화를 촬영했던 그 시절 그대로 변함없다. 순박한 영월 사람들, 사람들만큼이나 소박한 영월의 풍경, 이 모든 것이 영화 속 장면들과 오버랩되며 아련하게 다가온다.
영월의 광업소가 꾸준히 성장하던 1970년대까지 영월의 정기시장과 상설시장이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2005년 새롭게 단장한 영월 서부시장은 편리한 시설과 다양한 먹을거리로 이용객들에게 호응을 얻는 전통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시장에 들른 김에 서부시장을 대표하는 음식인 닭강정과 메밀전병의 맛도 즐기고 전통시장의 분위기도 한껏 느꼈다. 이 감독은 영월의 대표시장인 서부시장과 중앙시장의 모습을 담아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정감 있는 영상을 선사했다.
영화 ‘라디오 스타’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은 친근감과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안성기와 박중훈과 같은 스타배우들이 나오지만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푸근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관객들을 무장해제시켜 영화를 편안하게 보게 만든다. 정석용, 윤주상, 정규수 등 조연배우의 생활 연기도 퍽 자연스럽다. 여기에 영화스태프들과 영월 주민들이 카메오로 등장해 하모니를 이룬다. 미용실 주인과 손님, 버스 운전기사와 승객, 공개방송에 찾아온 주민들과 학생들은 실제 영월 주민들이었다. 꽃집 총각은 미술부장이었고 농협 아가씨는 영화사 총무과장이 맡았다. 연출부 막내는 실업 청년으로 출연했다. 심지어 중국집 영빈관 주인으로 이 감독이 출연했다. 다방종업원 김 양 역의 신인배우 안미나는 신인 같지 않은 연기를 선보여 감탄을 자아냈다. 최곤보다도 더 철없는 록밴드 이스트리버로 출연한 가수 노브레인은 영화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살아 있어 그 인물에게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있었다.
OST 선곡도 좋았다. 조용필의 노래는 웬만해서는 OST로 사용할 수 없는데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와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 버글스(Buggles)의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Video Killed The Radio Star)’, 박중훈이 부른 ‘비와 당신’까지 영화 속 분위기와 제대로 맞아떨어진 선곡들이었다.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가 흘러나올 때 주민의 모습을 몽타주한 것도 인상적이다.
인구 4만 명의 조용한 소도시, 영월. 소도시라고 하지만 여전히 농촌사회의 정이 남아 있는 소박한 고장이다. 이 감독은 영월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평범한 우리의 삶을 정감 있게 들여다보며, 가장 소중한 것은 결국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주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글·사진 = 양경미
영화평론가 ·연세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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