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Interview] 이만수

조회수 2018. 7. 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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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선샤인

지난 6월 라오스의 첫 야구팀인 라오J브라더스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 이번에도 선수단을 이끈 건 이만수 감독이었다. 현재 라오J브라더스 이사장으로 재임 중인 그는 4년 전 야구 불모지 라오스로 건너가 새 시대를 열었다. 이만수 감독은 야구를 통해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고 삶의 목표를 건설할 힘을 길러주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감정, 가장 목말라했던 관심을 사랑의 야구로 채워준 것이다.

Photographer 박경식  Editor 표권향  Location 덕수고등학교



서울 덕수고가 손님맞이 준비로 분주했다. 선수들은 일찌감치 오전 훈련을 마치고 운동장과 식당을 정리했고, 어머니들은 불고기와 잡채, 과일 샐러드 등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인데도 기쁜 마음으로 환영만찬을 마련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이만수 감독과 라오스 선수단이었다.


덕수고 정윤진 감독은 이만수 감독과 라오스 선수단의 한국행 소식을 듣고 이들을 학교로 초청했다. 대선배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선배의 큰 뜻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본 라오스 선수단이 직접 느낀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짜릿함은 야구장에서도 이어졌다. 지난 6월 5일 잠실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를 직접 관람한 선수단은 2만7000여 관중보다 ‘친절한 할아버지’로만 생각했던 이만수 감독의 유명세에 놀랐다. 이만수 감독의 등장에 야구장을 찾은 많은 팬이 선수단을 위해 음료와 과자 등을 선물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인기를 실감했다.


이역만리 날아간 야구 전도사


이만수 감독이 라오스로 날아간 지 벌써 got수로 5년째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바람처럼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지만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땐 막막함이 밀려왔다.


라오스와의 첫 인연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즌 종료 후 11월 라오스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 이만수 감독에게 접촉을 시도한 이가 바로 현재 야구단 대표인 권영진 씨다. 이만수 감독은 권영진 대표로부터 “라오스에 한 번 와줬으면 한다”는 제안을 받았고 예의상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는 예의를 갖춘 거절이었다. 그러나 권영진 대표는 이 대답을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재능기부를 부탁했다. 당장 달려갈 수 없었기에 2014년 5월 사비 1,000만 원으로 다양한 도구를 구매했다. 그리고 SK 와이번스 선수들에게 안 쓰는 유니폼, 스파이크, 모자, 가방 등 다 가져오라고 했다. 다 모으니 열다섯 박스였고 컨테이너에 실어서 보냈다.”



이만수 감독의 화답에 권영진 대표가 곧바로 한국행에 올랐다. 그렇게 이들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하지만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뭔가 찜찜함이 있었다. 이만수 감독이 기억하는 권영진 대표의 소개는 황당 그 자체였다고 한다.


“야구선수 출신이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대답했다. 현역시절 러시아에 봉사했다가 사기를 당한 적이 있었기에 또 사기당하는가 싶어 불안했다. 요즘 생활 체육 야구가 많으니 혹시나 했더니 야구의 ‘야’자도 모른다고 하더라. 또 사기당했다는 생각에 쇼크를 받았었다. 그래서 어떻게 야구하겠다고 찾아왔느냐고 질문하니 ‘한국 최고 인기 스포츠는 야구, 아는 사람은 이만수뿐! 수소문해서 무조건 연락했다’고 말하더라.”


참 기묘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사기에 대한 의심은 사라졌다. 그때부터 이만수 감독은 자신을 찾아온 권영진 대표에게 훈련방식과 기술 훈련, 야구장 시설·관리 등을 비디오로 촬영하게 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의 라오J브라더스의 운영과 구장관리, 전력분석 및 스카우터의 역할을 직접 가르친 셈이다.


확실한 인연은 이만수의 아내 이신화 씨의 역할이 컸다. 2014시즌을 마치고 감독직에서 사퇴했을 때 적지 않은 악성댓글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특히 이신화 씨가 받은 상처가 깊었다. 이만수 감독은 미안한 마음에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신화 씨는 이벤트 대신 남편의 라오스행을 지지했다.


“아내를 위해 보름 동안 동유럽의 호텔과 식당 등을 예약했다. 그런데 와이프가 ‘당신! 감독할 때 늘 라오스에 가서 재능기부 한다고 했잖아요. 왜 안 가세요? 약속 지키셔야죠!’라며 ‘거긴 언제든지 갈 수 있어요. 지도자이자 리더인데 약속을 안 지키면 누가 당신을 믿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일주일 만에 보따리를 싸서 라오스로 떠났다.”


라오스의 태양은 밝게 빛났다


2014년 11월 12일 라오스에서의첫날 야구선수를 모집하는 테스트를 열었다. 빵과 물을 주니 10대부터 20대까지 약 200여 명이 맨발로 야구장에 몰려왔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야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 그대로 백지였으며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열대지방 동남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기에 돈이 제일 안 드는 축구가 유명했다. 야구라는 단어조차 없어 한글과 영어로 적어줬다. 야구공이 굴러오니 맨발로 차더라! 다행히 어디 부러진 곳은 없었지만 많이 아파했다.”


일단 달리기로 선수를 추렸고 공을 던지는 것을 시켰다. 이렇게 45명의 선수단이 구성됐고, 공이라면 무조건 발로 차던 아이들이 공을 받고 던지기 시작했다. 조금 무뎌서 그렇지 이젠 야구의 규칙도 익혀 중계 플레이, 수비 시프트 등을 곧잘 한다.



강을 건너니, 산이었다. 언어는 둘째 치고 문화차가 심했다. 거기에 할아버지와 손자뻘이었으니 서로의 관계가 쉽게 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만수 감독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성격 자체가 밝지만, 미국에서 10년 동안 지도자 생활하면서 마인드가 바뀌었다. 그곳에서는 선수와 지도자 간에 거리가 생기면 ‘F**k u!’ 한다. (웃음) 어른이나 아이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내 성격에 맞다. 라오스는 공산국가이기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하다. 만약 우리나라 식으로 근엄하게 했다면 아무도 안 따라왔을 것이다.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엉덩이도 때리며 안아줬더니 금세 친해졌다.”


이는 이만수 감독이 초등학교와 리틀야구단에서 재능기부하면서 터득한 비결이었다.


“어렵지 않다. 아이들을 만날 땐 항상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돼서 같이 놀고 춤추는 것이다. 프로선수와 아마추어 선수를 대하는 방식을 그들에게 맞추면 거리낌 없는 사이가 될 수 있다.”


이만수 감독의 노력으로 라오J브라더스는 올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게 됐다. 이번 한국 방문도 대회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평소 ‘형님, 아우’하는 채인석 화성시장과 이만수 감독의 팬이었던 화성시의회가 모든 비용을 지원해줬다. 덕분에 21일 동안 열린 미니 캠프를 통해 ‘진짜’ 야구장에서 훈련과 연습 경기를 펼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다. 하루 삼시 세끼 먹는 것이 인생의 소원이었던 아이들에게 삶의 목표란 것이 생겼다. 문맹이 많으니까 선생님이 되어 글을 가르쳐 주겠다는 아이, 병원이 없어서 태국까지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데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싶다는 아이, 정치인이 되어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는 아이 등 미래를 보는 눈을 뜬 것이다.


“아이들이 2년 전 부산국제교류제단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에 온 뒤 귀국하여 친구들에게 한국이 너무 좋다고 자랑하더라. 어떤 아이는 돌아가기 싫다고 울었다. 아이들을 처음 봤을 때 ‘꿈이 뭐냐’고 질문했었다. 거창할 줄 알았는데 하루 3끼 밥 먹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야구로 비전과 꿈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다녀와서 꿈이 바뀌었다. 꼭 공부가 아닌 야구로도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에 야구인으로서 보람을 느꼈다.”


자신을 내려놓은 최초의 사나이


이만수 감독은 역대 최고의 포수이자 수많은 1호 기록을 보유한 최초의 사나이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그는 1호 안타, 타점, 홈런을 때려냈으며 최초 100홈런과 200홈런, 트리플 크라운, 3년 연속 홈런왕 등 다양한 부문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16시즌 동안 리그 최정상 타자로서 삼성 라이온즈의 원클럽맨이었으며 명실상부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그렇다면 이만수 감독의 50년 야구인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당연히 프로야구의 첫 안타, 타점, 홈런을 터뜨렸던 1982년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청룡과의 개막전이었다.


“야구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남아 자손들에게도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 두 번째는 88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이다. 우승 반지와 와이프를 위한 목걸이는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시계는 아들에게 줬다. 세 번째는 다 내려놓고 낯선 라오스에 건너가 맞닥뜨린 기적이다. 4년 만에 야구협회가 생겼고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게 됐다. 또한 (팀이) 10년 뒤쯤이나 한국에 올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는데, 벌써 두 번이나 왔으니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감사한 일이다.”


여기서 잠깐! 이만수 감독이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저리그 코치라는 것에 논란이 있다. 당시 이만수 감독은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포수였는데 한국 프로야구로 보면 불펜코치 즉 배터리코치의 보조직으로 볼 수 있다. 메이저리그 구단별로 이 보직에 대한 공식 로스터 등록에 차이가 있지만, 이만수 감독이 속한 화이트삭스는 정식 코치로 승인한 구단이다.



야구를 하면서 우승 한 번 하기 어려운데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에서의 우승이라니! 이만수 감독은 구단과 선수단에 공헌했다며 카퍼레이드에서도 S급 공신들만 탈 수 있는 맨 앞 버스에 올라 손을 흔들었다. 당시 그의 옆에는 MVP 제메인 다이어가 타고 있었다.


월드시리즈 우승 당시 구단은 한국에 있는 이만수 감독의 온 가족을 미국으로 초청해 최고의 대우를 해줬다. 선수들은 그에 대한 좋은 기억과 감사의 표현이었을까. 많은 메이저리거의 호의적인 인터뷰 릴레이가 계속됐다. 폴 코너코는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이만수의 나라에서 온 방송국의 인터뷰라면 당연히, 무조건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과 가까웠던 것은 아니다. 언어와 음식의 장벽, 너무 다른 문화로 인한 충격에 눈물로 지새운 날이 더 많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매일 밤하늘을 보며 고민했다.

“미국에서 인생을 배웠다. 대한민국에서는 ‘나’인데 미국에 가니 누구도 이만수를 몰랐다. 세상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만수는 진짜 이만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처음 알게 됐다. 지금까지 착각 속에 살았구나. 다 버리자고 생각했다. 지도자로서 첫발을 내딛기에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뒷바라지하고, 공 던져주고, 도구도 일일이 챙겨줬다. 먼저 가서 스킨십도 했고 더듬더듬 말했지만 어려울 땐 상담도 해줬더니 그리 좋아하더라. (웃음)”


문무 겸비한 야구인


이만수 감독은 남들보다 늦은 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미 야구에 익숙해진 다른 친구들보다 성장속도가 더뎠기에 유급해 중학교만 4년을 다녔다. 그러나 질 수 없었다. 늦은 만큼 2배 아니 10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깨달았다. 그때의 습관이 현역까지 이어져 하루 4시간씩 자며 야구에 매진하게 했다. 독종이었다.


현역 시절에는 전방 3m에 작은 점을 찍고 그것만 뚫어져라 봤다. 스즈키 이치로가 차량 번호판으로 시력 검사를 하며 8자를 모조리 외우는 것처럼 집중력을 키우기 위한 자신만의 훈련법이었다.


이만수 감독은 SK 지도자 시절 다양한 훈련을 시도했다. 사실상 자율야구는 실패했지만 이후 철저한 관리야구를 선언하며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그중 2013년 가고시마 마무리 훈련에서 수비 강화에 초점을 맞춘 일명 ‘1인 4포지션’은 지금의 나주환을 만들었다. 그 결과 팀은 2014년 정근우의 FA로 인한 수비 공백을 채울 수 있었다. 성공적인 이 한수 안에 숨은 뜻은 더 완벽하다.



“선수들끼리 오랜 시간 동안 멀리 떨어져 한 가지만 했을 때 자칫 충동적인 사고가 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재미있게 캠프를 진행하려고 노력했다. 자꾸 재미를 줘서 충동적인 심리를 잡기 위해 여러 가지 게임을 했다. 그중 선수들이 자기 포지션만이 아니라 다른 포지션도 경험하게 한 것은 재미와 더불어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라는 마음도 포함돼있었다. 투수가 야수의 마음을 알아야 동료애가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훈련은 공부였다. 선수들에게 귀에 딱지가 붙도록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자존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기록하는 습관과 독서를 통해 미래 설계와 원만한 관계를 스스로 터득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필기할 노트와 읽을거리의 책을 직접 선물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는 공부를 병행해도 된다. 하지만 고등학교부터는 전문적으로 심층단계에 들어간다. 4시까지 수업을 듣고 운동하라고 하면 몸이 따라가겠는가? 공부도 운동도 못 따라간다. 대신 일기와 일지를 써라. 내 장점, 보완할 점, 상대 투수의 구질 등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기록밖에 없다. 야구는 상대성이다. 지금의 동료가 프로에 가면 갈라진다. 오늘의 친구가 다음날 적이 된다. 기술적인 면은 어느 순간 멈춘다. 나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것은 기록이다. 나와 상대를 알고 있는 기록이 있어야 큰 선수가 된다.”

초반에는 ‘책 많이 읽으면 눈 나빠진다’며 귀찮아했던 선수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스로 나이를 내세우며 독서를 권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수들의 가방과 라커룸에는 항상 책이 있었고 서로 추천하며 돌려 읽기도 했다.


“우리 집 전체가 책이다. 소설은 한 번 빠져버리면 밤을 새워야 하니까 안 본다. 대신 에세이를 많이 읽는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는 것은 책이다. 특히 자서전인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난 40년 넘도록 일기와 야구일지를 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지금 강연할 수 있는 자료로 쓰인다.”


인간미 넘치는 헐크


‘나는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사랑하는 팬이다. 이번 월드시리즈를 보기 위해 8살 딸과 함께 야구장을 찾았다. 선수들의 훈련을 보기 위해 일찍 도착했고 사인을 요청했으나 받지 못했다. 그런데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우리가 야유를 보내는데도 인사를 해주며 사인을 해줬다. 그들의 훈련 파울볼이 내 딸의 팔을 강타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팔을 본 내 딸은 서럽게 울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의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그들보다 먼저 이만수 코치가 달려왔다. 그는 내 딸의 상태를 살피면서 놀란 딸에게 야구공을 주며 달랬다. 그리고 훈련 후 파울볼을 때린 제프의 사인 배트와 사인볼을 선물해줬다. 난 애스트로스를 사랑하지만 오늘부터 화이트삭스와 이만수 코치를 응원할 것이다.’


이만수 감독이 화이트삭스에서 우승했던 2005년 구단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다. 짧은 글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이만수 감독은 SK 감독시절 감정표현이 확실하고 몸짓이 크다는 이유로 오해와 눈총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지도자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반응에 이만수 감독은 비난에 신중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의식하지 않았다. 선수만큼 지도자의 멘탈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SK 2군 감독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확실히 자리를 잡지 못했던 김광현에게 힘을 불어주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우리 김광현 선수 파이팅! 광현 씨 팬입니다”라는 농담을 자주 하며 힘을 불어 넣어줬다. 1군과 2군을 오가던 최경철이 훈련 도중 1군에 콜업됐을 땐 “갔다가 오지 마! 제발 오지 마”라고 소리친 후 안아주면서 “떨지 말라”고 응원했다. 수석코치 시절에는 정근우가 그의 볼에 뽀뽀한 사건(?)도 있었다. 그만큼 선수들에게 감독, 코치이기 전에 아주 가까운 동료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매장당할 뻔했다. 팔불출에 오두방정 떤다는 기사도 났었다.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선구자가 되는 것에 늘 어려워한다. 뭔가 나서서 하려고 하면 실패 확률이 높지만 성공하면 보람이 그만큼 크다. (웃음) 지도자는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수가 잘 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입장이다. 선수가 지도자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선수든 잘하거나 못 하거나 경기에 나가면 긴장한다. 다그쳐버리면 주눅 들게 된다. 무게를 잡아서 뭐 하는가. 습관이 안 됐을 뿐이지 좋게 말하는 것은 쉽다.”


상남자의 웃음과 눈


이만수 감독은 화이트삭스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방에 야구공을 30개씩 들고 다녔다. 영어를 못해서 무조건 웃으면서 야구공을 선물했다. 덕분에 미국에서의 첫 별명이 ‘빅 스마일 맨’이다. 두 번째 별명은 ‘앰버서더 오브 시카고 화이트삭스’. 팬들을 안아주고 야구공을 나눠주니 대사급 기부천사인 셈이었다. 구단에서 컴플레인까지 받았던 이만수 감독이었지만 그의 팬서비스는 멈추지 않았다. 친절하게 인사해주고 손을 흔들어주며 ‘손 키스’까지 날렸다. 그의 매력에 색깔이 강했던 보스턴 팬들까지 매료돼 화이트삭스 구단으로 카드가 아닌 흔하지 않은 선물까지 그에게 보냈을 정도였다.



국내 복귀 후에도 그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2007년 경범죄 처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원관중 앞에서 ‘알몸 러닝’을 뛰었다. “팬이 있어야 야구가 있다”는 그의 말은 스포테인먼트를 실현시켰고, 그날의 추억은 인천 문학구장 엘리베이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남다른 팬 서비스는 이번 한국 방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잠실구장을 방문했을 때 한 LG팬이 다가와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역광이었기에 이만수 감독이 먼저 반대편에서 찍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 팬은 예전에도 사진을 찍을 때 똑같이 말했었다며 반가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뇌리에 남는다는 것은 분명히 평생 추억담이 될 것이다. 이만수 감독이 현역 시절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고3 수험생에게 “힘내고 조금만 참으면 된다. 포기하지 말고 해라”고 응원했다. 세월이 지나 이만수 감독은 가물가물했는데 그 수험생이 의사가 되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고3이 아닌 라오스 팀을 위해 기부하는 천사로 말이다.


이러한 사연들은 이만수 감독의 유쾌한 성격에서 나온다. 현역 시절 이병훈 전 해설위원의 타석 때 그의 와이프를 강제로(?) 나이트에 보낸 일이 있었다. 이 말이 거짓임을 알게 된 이병훈 전 해설위원은 두 번째 타석 때 이만수 감독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이만수 감독은 “그걸 너는 믿나? 네 아내를 못 믿는 거 아이가?”라며 능청스럽게 되물어 현혹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故 최동원 감독의 마지막을 지킨 이가 바로 이만수 감독이다. 매년 추석마다 안부전화를 하던 이만수 감독은 암 투병 중이던 최동원 감독과 연락이 되지 않자 걱정이 앞섰다. 여러 차례 전화 끝에 최동원 감독의 아내와 통화가 됐고 추궁 끝에 그가 의식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신발 신을 정신도 없이 트레이닝복 차림에 맨발로 뛰어간 이만수 감독은 최동원 감독의 손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그때 기적처럼 최동원 감독이 잠시 의식을 차렸고 이만수 감독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날 이후로 매일 병원을 찾았고 사흘 뒤 가장 친한 친구를 먼저 떠나보냈다.


“대학 때부터 친구였고 삼성에서도 배터리였다. 암 투병 중이라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연락을 안 하더라. 어디 태백에 설악산 깊숙한 곳에 있다고만 했다. 그러던 중 추석에 전화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나중에 그의 와이프가 받으면서 알게 됐다. 일산에 있는 암병원이었는데 오늘내일 할 때였다. 갔더니 살아있더라고. 눈을 깜빡깜빡하며 손을 꽉 잡았는데… 아잇! 눈물 나게 하지 말고 이 내용은 통과!”


시조이자 선구자로서 말하는 야구


이만수 감독은 은퇴 후 ‘야구로 받은 사랑은 야구로 돌려주자’며 꾸준히 재능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야구 꿈나무들이 있는 곳은 물론 학교장이 야구부를 해체시키려고 했던 인천 서흥초, 폭행사태가 터졌던 화순초, 대구 소년원 등 남들이 꺼리는 곳까지 찾아갔다. 특히 대구 소년원에서는 “포기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강연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또다시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어떻게든 함께 바꿔나가고 싶다. 야구를 같이 하는데 다행히 엄청 좋아하더라. 나보다 덩치가 2배나 큰 아이들이 야구할 때만큼은 순한 양이 되더라. (웃음) ‘감독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라고 할 때마다 스포츠, 야구가 좋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매년 가서 아이들과 야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에는 라오스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각오하지 않으면 큰일을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알든 모르든,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어떤 한 사람이라도 변화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누구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만수 감독은 올해 역시 소년원과 교도소 10곳을 찾기로 약속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 야구로써 교화되기를 희망하면서.



“요새 프로야구계에 안 좋은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 한마디도 못 하는 것은 나에게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선배들을 보고 배운 것이기에 내가 제대로 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라는 생각에 부끄럽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고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못 드린다. 누구한테 돌을 던질 수 없다. 선배들의 잘못이다. 이만수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과를 받아주시길 바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좋았던 찬란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만수 감독도 프로야구 한 구단의 수장이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을까?


“다시 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프로리그를 맴돌면 피 말려서 내 인생이 없어진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 재능기부를 하다 보면 때가 되어 들어가는 것이고, 안 되면 계속 내 일을 하면 된다. 목 매일 필요 없다.”


현재 이만수 감독의 온 정신은 라오J브라더스와 이들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찾는 것이다. 선수들의 의식주 해결과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며 야구하고 싶은 아이들을 위한 좋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5월 KOICA의 도움과 한 장난감 회사의 지원으로 전 충주성심고 박상수 감독이 합류했다. 이만수 감독은 앞으로 더 많은 지도자가 함께 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50년 동안 야구를 하면서 거절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라오스와 국내 유소년 장학금에 대한 기부를 부탁하니 웃음기가 사라지더라. 사회의 쓴맛을 알게 됐다. 한 달이 지나도 만원도 안 들어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6개월이 지나자 사회인야구단과 팬들이 헌 유니폼과 글러브, 운동화 등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헐크 파운데이션 재단으로 기부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분은 회식하라고 돈을 주셨다. 모두 꿈같다.”


‘10+3=30+20’ 10년씩 꿈을 세 번씩 키웠다. 처음 10년은 중학교부터 시작한 야구이고, 두 번째 10년은 미국 지도자로서의 생활이며 마지막 10년은 한국 지도자의 삶이다. 마지막 ‘+20’은 마지막 인생 프로젝트다. 라오스에 야구장 4개를 지어 인도차이나 반도와 아시아,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나이 80세다. 그땐 아마 난 없을 것이다. 20년 동안 주춧돌만 놔주고 갈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내 뒤를 이어 오는 후배들이 이 꿈을 잘 받아서 이뤄주길 바란다. - 이만수 감독


더그아웃 매거진 87호(201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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