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학대 증거 '몰래 녹음'.. 부모가 해도 한국은 불법, 美선 합법

이수빈 입력 2018. 6. 22. 18:05 수정 2018. 6. 2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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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팀 리포트
폭언 자백한 가해자 무죄 판결
법원서 '몰래녹음' 인정 안돼
법조계 "부모 몰래녹음 허용땐
아이 시켜 도·감청해도 합법"

미국선 가정 내 CCTV 허용
음성녹음행위는 지역마다 달라

[ 이수빈 기자 ]

Getty Images Bank


생후 10개월 된 아기가 울자 아이돌보미(보육교사)가 욕설을 퍼붓는다. 엉덩이를 때리는 듯 ‘찰싹’ 소리도 난다. 우는 아기를 내버려 둔 채 돌보미는 자신의 아들과 전화통화를 하고, TV도 본다.

이런 상황이 부모가 몰래 설치해 둔 녹음기에 고스란히 담겼다. 법정에 선 돌보미 A씨(48)도 자신이 욕설 등 폭언을 했다고 자백했다. A씨는 아동복지시설 종사자 등의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됐지만 대구지방법원은 지난 13일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화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부모)가 타인의 대화를 몰래 녹음한 파일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피고인의 자백은 다른 객관적인 증거가 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다.

부모의 ‘몰래 녹음’은 증거능력 無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만 0~5세 영유아 학부모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맘카페 등 인터넷 육아 커뮤니티에서도 일제히 법원 판결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동안 학부모들은 보육교사의 아동학대 증거를 잡기 위해 아이 옷깃, 인형 등에 초소형 녹음기를 숨겨 녹음하라는 ‘꿀팁’을 서로 공유해왔던 터다. 그러나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이 같은 시도가 사실상 무의미해질 전망이다. 다섯 살 아이를 둔 한모씨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학대 상황을 스스로 녹음해 증거를 남길 수 있겠느냐”며 “법률 대리인인 부모의 녹취를 (돌보미와의) 대화 당사자인 아이가 한 행위로 간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논리에 부정적인 기류가 지배적이다. 한 변호사는 “미성년자의 부모는 계약이나 소송 등 법률행위에 대해 대리인으로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만 녹음과 같은 사실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부모가 아이 대신 밥을 먹어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변호사도 “통신비밀보호법은 국가기관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입법 취지 때문에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며 “(부모의 몰래 녹음이 허용된다면) 부모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시켜 제3자에 대한 도·감청을 하더라도 100% 합법인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경기 수원의 한 시립 어린이집에서 녹음기를 발견한 교사가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수사 결과 어린이집 원장이 설치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원장이 아니라 학부모가 설치해도 불법이라는 설명이다.

CCTV도 사전 동의 없으면 불법

녹음파일과 달리 폐쇄회로TV(CCTV)는 법정에서 아동학대 증거로 인정된다. 지난달 경기 이천경찰서는 한 시립 어린이집 원장과 보육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 밥을 먹지 않는 어린이의 코를 막고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장면이 어린이집 CCTV에 찍혔다. 지난 4월에는 광주 쌍촌동에 있는 한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 2명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가거나 바닥에 내팽개치는 모습이 어린이집 CCTV에 잡혔다. 광주 서부경찰서는 해당 어린이집 2개월치 CCTV를 분석해 이 교사가 2~3일에 한 번꼴로 아이 2명을 학대한 정황을 확인했다. 다른 아이들도 학대했는지 등 추가 혐의를 수사 중이다.

하지만 CCTV를 확인하는 과정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게 부모들의 의견이다. 네 살 딸이 있는 이모씨는 “어린이집 CCTV를 부모가 확인하려면 원장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절차가 까다롭다”며 “CCTV 열람권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택에 설치된 CCTV는 거주자인 부모가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다. 그러나 CCTV로 촬영하기 전에 아이돌보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한다. 개인정보보호법 15조에 의하면 사적인 영역이라 할지라도 미리 촬영 대상자에게 촬영 목적과 항목, 보유기간 및 이용기간, 촬영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아이돌보미가 거부한다면 CCTV로 촬영할 수 없다는 얘기다.

미국선 자택 내 녹취·녹화는 합법

미국 사례를 들어 가정에서만큼은 CCTV를 자유롭게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모든 주에서는 아이돌보미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아도 집주인이 아이돌보미 감시 카메라인 ‘내니캠’을 설치할 수 있다. 초소형 카메라를 물건 안에 숨겨 설치해도 되고 곰인형 등 다른 사물처럼 보이도록 제작된 내니캠도 허용된다. 사유지인 주택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은 집주인의 권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이 타인에게 촬영당하지 않을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지만 타인의 집에서는 이런 권리가 제한된다. 감시카메라에 아이돌보미가 아이를 학대하는 장면이 찍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된 사례도 많다. 이달 초 미네소타에서는 한 아이돌보미가 아이의 다리를 손으로 비틀어 부러트리는 장면이 내니캠에 녹화돼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됐다.

다만 이런 감시카메라로는 집 내부만 촬영해야 한다. 길거리 등 집이 아닌 곳이 촬영되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집 내부만 촬영했더라도 타인을 관음하기 위한 의도나 상업적 의도로 녹화된 촬영물은 불법이다.

음성녹음은 미국에서도 의견이 나뉜다.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하와이, 메릴랜드 등 13개 주에서는 제3자가 타인의 대화를 녹음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다. 이에 따라 부모가 아이와 아이돌보미 간 대화를 몰래 녹음해선 안 된다. 녹음파일에 학대 정황이 담겼을지라도 증거로 채택되기 어렵다. 감시카메라에도 목소리가 녹음돼 있다면 불법이다. 나머지 주에서는 제3자 녹음에 대한 별다른 규정이 없어 아이돌보미의 폭행·폭언을 부모가 몰래 녹음했을 때 법정에서 다툼의 여지가 있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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