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한강 땅에 대한 집념의 상징, 온달은 실존 인물인가?

임기환 입력 2018. 6. 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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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46] '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인들의 이야기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온달전이다. 주인공들의 캐릭터도 개성이 넘칠 뿐만 아니라 풍부한 내용과 극적인 반전 등이 어우러져 있어 당당히 우리 옛 서사문학의 첫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그래서 한말의 문장가 김택영이 온달전을 조선 오천 년 이래 최고 명문장의 하나로 꼽았다.

온달전의 내용은 독자들께서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평강왕(평원왕)의 공주 '울보'와 저잣거리의 가난한 소년 '바보' 온달이 결혼하게 된 이야기. 부인의 도움으로 무예를 닦은 후 수렵대회에서 평원왕으로부터 사위로 인정받은 이야기, 그 뒤 영양왕 때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정하였다가 아단성에서 비운의 죽음을 당한 이야기 등등. 이렇게 온달전은 매우 흥미로운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역시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 이야기일 것이다.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주제이지만,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흥미롭다. 사실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이나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식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들어진다. 대표적으로 신데렐라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러한 욕망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도 한다. 그러면 온달도 공주와의 결혼을 통해 출세한 인물일까?

온달은 바보라고 불릴 정도로 가난하고 미천한 출신인데, 그와 평강공주의 결혼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라면 아마도 이는 고구려 역사 최대의 스캔들이라고 할 만하다.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은 오늘날에도 이런 식의 사회적 차이가 현격한 혼인은 커다란 뉴스거리가 될 만하다. 하물며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이런 혼인을 상상하는 것조차 가당치도 않을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지식으로는 당시 그런 혼인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 이야기만 본다면 이는 실재했던 어떤 사건이라고 볼 수 없겠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 온달이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단지 설화의 주인공에 불과한 것인지 당연히 의문을 갖게 마련이다. 어쩌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하나의 이야기로 꾸며졌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온달의 이야기가 생명력을 지니고 전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온달 이야기를 단지 꾸며진 허구의 이야기로만 간주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찾아내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온달 이야기 중에서 충분히 실재했음 직한 이야기부터 찾아보자.

먼저 신라와의 전투에서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한 '온달'과 같은 행적을 보인 어떤 인물이 역사상 실존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또 온달은 북주(北周)의 침입때 큰 공을 세워 마침내 대형(大兄)이란 벼슬과 함께 정식으로 부마로 인정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온달의 행적은 당시 고구려가 처하였던 국제정세를 보면 충분히 있음직하다.

6세기 중반 이후 북제·북주·수 등의 북중국 세력이 고구려를 위협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 대외 정책은 요동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온달 설화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행적을 갖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인물의 이름도 전하는 바와 같이 '온달'이었을 것이다.

진파리4호분 연못그림 모사선화

진파리 4호분의 무덤 안길 양벽에 가득 그려진 산수화이다. 나무가 우거지고 바위로 둘러싸여 있는 연못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연꽃이 만발해 있는 모습이다. 북한 학계에서는 이 고분에 그려진 신선들 모습이 모두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이고, 또 연못 그림처럼 여성적 이미지가 고분에 가득하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을 여자로 추정한다. 그래서 평강공주와 온달의 무덤이라고 재미있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고구려 평원왕과 영양왕 때에 무훈을 떨친 온달이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온달전에 전하는 온달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면 여전히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역시 설화상의 신분 그대로의 온달은 실재하기 어렵다. 그럼 실재하였을 온달의 신분은 어떠하였을까? 평민이 아니었다면 왜 온달전과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졌을까?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온달이 실존하였던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평원왕의 부마라는 사실도 허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의 신분제에 비추어 볼 때, 공주와 결혼한 온달을 설화처럼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온달을 명문 귀족 출신으로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이 설화의 핵심은 온달과 평강공주와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결혼에 있는데, 온달이 명문 출신이라면 이런 식의 설화가 만들어질 리 만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달이 평민 출신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평원왕의 부마가 되는 것이 당시로서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큼 그의 출신이 낮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왕실과의 통혼권에서 벗어나 있던 하급 귀족 출신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이 점은 그가 북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정식으로 부마로 인정받은 뒤에야 겨우 7위에 해당하는 대형(大兄) 벼슬에 오른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좀 뒷시기이기는 하지만 명문 귀족 출신인 연개소문이나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직책을 계승하여 어린 나이에 최고위 관직에 오른 사실과 비교하면 확실히 그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좀 더 추측을 해 보자면, 온달의 가문은 온달 당대에는 하급 귀족에 속하는 가문이었지만, 그의 몇 대 선조는 여기에도 속하지 못한 더 낮은 출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설화에서 온달을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그의 가문의 내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온달이 하급 귀족 출신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온달이 평강공주와 파격적인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때에도 자유 연애는 있었을 터이니, 두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져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상상도 해봄 직하다. 하지만 온달과 평강공주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당시의 신분제가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는 않다.

그러면 온달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설화에는 온달이 공주와 결혼한 후 무훈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온달의 뛰어난 무예와 북주와의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군공이 계기가 되어 공주와의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봄 직하다.

아마도 당시 고위 귀족들도 시비를 걸 수 없는 뛰어난 무공을 세움으로써 평원왕으로부터 파격적인 결혼을 약속받았을 것이다. 물론 하급 귀족 출신인 온달로서는 왕실과의 결혼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을 게다. 예컨대 설화에 평원왕이 공주를 시집보내려는 상부(上部) 고씨(高氏) 같은 최고위 귀족이 유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온달은 평원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고, 이 결혼을 시기한 귀족들이 이 결혼을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빈정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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