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언어정담] 말없는 존재들의 속삭임을 듣다
장미의 아름다움 새삼 깨닫게 돼
여유 갖고 일상의 틈새 지켜보면
안보였던 '소중한 존재'들이 손짓
[서울경제] 작가

그렇게 조금씩 삶의 여유를 찾는 요즘, 내게 말을 걸어오는 꽃이 있다. 내가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정에 핀 붉은 장미는 강렬한 마젠타 핑크빛과 선홍색이 합쳐진 선명한 빛깔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일산EBS에서 라디오 방송 녹음을 마치고 주엽역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나의 작업실로 가는 길가에도, 어김없이 그렇게 눈이 시리도록 새빨간 장미가 피어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지 않았더라면, 그저 재빨리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장미의 속삭임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는 장미가 워낙 흔한 꽃이라 예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가끔씩 미세먼지가 걷히고 새파란 하늘이 드러나면, 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앞다투어 피어나는 장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올해 처음 알았다. 2018년 초여름은 길가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계절로 기억하고 싶다. 장미들은 마치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당신들의 세계로, 나를 들여보내줘요. 나도 당신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장미들은 마치 “제발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세요.(Let me in)”라고 외치며 불멸의 연인 히스클리프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폭풍의 언덕’ 속 캐서린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속삭이는 듯하다. 나를 알아봐달라고. 나를 모른 채 하지 말아달라고.

벚꽃 필 때 잠시 마음이 두근대다가 다른 꽃들이 필 때는 일에 쫓겨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지 못하곤 했다. 이제는 다채로운 꽃들이 아주 미세한 며칠 차이를 두고 앞다투어, 그러나 분명히 순서를 지켜가며 피어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꽃다발로 만들어진 장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깊고 풍부한 아름다움을, 나는 길가에 피어난 장미들을 통해 느낀다. 장미들은 하나같이 정원 안쪽, 학교 담장 안쪽, 건물 담장 안쪽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꽃봉오리, 그 정신의 진수만은 기어코 철조망 밖으로 하늘 높은 곳을 향하여 뻗어가 있다. 햇빛을 단지 더 많이 받기 위해서 가지를 마구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경배하듯이, 생의 눈부심을 찬미하듯이, 하늘 높이 가지를 팔처럼 뻗어올려 기도하는 듯 춤추는 듯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장미의 미소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상하다, 올해는 자꾸 길가의 붉은 장미가 내게 말을 거네. 제발 좀 나를 봐달라고. 세상 속으로 들여보내달라고. 당신들의 시야 속으로 당신들의 프레임 속으로 나를 다정하게 끌어안아달라고. 가시 돋힌 장미를 가만히 안아주고 싶었다. 설령 내 살갗이 가시에 좀 찔리더라도. 일상의 작은 틈새를 관찰하는 시간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눈 밖에 난 존재들은 한없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당신들의 세계 속으로 나를 들여보내달라고. 렛미인, 렛미인. 그렇게 언젠가 우리가 함께 할 그 날을 꿈꾸며 우리를 향해 말없이 손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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