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2018. 5. 30. 09:4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ㆍ‘보이지 않는 손’이 탐욕 자본주의 근원일까?

국가간 폭력과 사회 내의 증폭되는 갈등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그 내면세계의 가치를 확보하려 했던 스미스로서도 오늘날 탐욕적 자본주의의 이론적 근원이 ‘보이지 않는 손’임을 안다면 그 개념을 폐기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주택이란 ‘동일한 지붕 밑에 있는 모든’ 곳이었다.

김수행 역 애덤 스미스 <국부론>
런던 상인들은 장사를 하려고 점포라도 구하려면 건물 전체를 임대해야 했다. 점포는 1층에 있고 가족은 맨 위층에 산다. 2층이나 3층은 하숙을 칠 수밖에 없다. 이 하숙비로 건물 임대료의 일부를 충당한다. 하숙비로 건물 전체 임대료나 생활비를 다 충당할 수는 없어서 이 상인은 자기 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반면 프랑스의 파리나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사람은 건물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층만 임대하게 되는데, 1층에 점포를 따로 마련하지 않기 때문에 하숙을 쳐서 얻는 수입으로 생활한다. 하숙비로 해당 층의 임대료뿐만 아니라 가족 생활비로 다 쓰게 된다. 이렇게 집에 대한 서로 다른 관념 때문에 생활비에 대한 부담이 다르고, 그에 따라 생활경제 전체가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에 읽은 책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오는 얘기다. 1776년에 발표한 인류사의 대작이다. 읽다 보면, 유럽 지성사의 대가에게는 죄송하게도, 그의 경제학 이론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도 그 무렵 유럽이 어떤 지식과 정보와 사상을 축적하였으며 또한 스미스가 그것을 얼마나 능란하게 다루는지를 알게 된다. 생각해보라. 구글도 없고 유튜브도 없던 시절인데 말이다. 가령 스미스는 이런 식으로 문장을 시작해서 자기 주장을 펼친다.

“가장 존경할 만하고 견문이 넓은 저자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페루에서 어떤 사람이 새로운 광산 운영에 착수할 때, 그는 파산 또는 몰락의 운명에 처해진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고 피한다.”

또 이렇게도 시작한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랭커셔의 어떤 지방에서는 귀리로 만든 빵이 밀로 만든 빵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영양가 있는 식량이라고 하며, 또한 스코틀랜드에서도 똑같은 주장이 나온 것으로 듣고 있다.”

그러니까 스미스는 책 전체는 아니라 해도, 그 일부에서 자기 주장을 펼칠 때 조금은 막연하게도 ‘견문이 넓은 저자’를 인용하거나 ‘들은 바에 의하면’이라고 시작한다. 이것이 그의 논거를 부실하게 하거나 주장의 핵심을 해치지는 않는다. 오늘날 구글이나 유튜브를 활용하는 우리가 때로는 ‘어디서 들은 얘기’를 논거로도 삼는 스미스의 통찰력을 과연 넘어설 수 있을지 전혀 자신이 없다.

스미스는 방금 인용한 ‘귀리로 만든 빵이 노동자들에게 더 영양가 있다’는 전해들은 얘기에 대해 곧장 ‘그것의 진실성을 의심한다’고 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귀리로 만든 빵을 먹지만 결코 영양가가 높지는 않다는 것을 스코틀랜드의 두 도시, 즉 글래스고와 에딘버러에서 거의 전 생애를 보낸 스미스 자신이 누구보다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빵과 그 원재료가 각각의 지역경제와 생활관습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물론 그렇게 분석으로 넘어가면 나의 독서 속도는 한없이 느려지고 곧 중단된다.

읽어도 좀처럼 알 수 없는 이 책을 서가에서 꺼내 며칠째 짚이는 대로 뒤적거린 까닭은 지난 5월 5일이 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1818년 5월 5일에 태어난 이후로 그 자신이 그 이후에 태어난 그 누구보다 가장 뜨거운 불멸성을 획득한 마르크스는 그러나 현재 고향 트리어에서도 제대로 대접을 못받는다는 소식이 있었다.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중국이 높이 5.5m 무게 2.3톤에 달하는 마르크스 동상을 제작하여 기증하였으나 정작 그의 고향 트리어에서는 이 동상 제막에 반대하는 시민 행동도 거셌던 모양이다.

성공회대 도서관 내 김수행 문고.

하기야 다름 아닌 마르크스 아닌가. 누구나 존경하는 위인이란 훈장은 마르크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불이 여전히 뜨거워서 그의 고향에서조차 동상 제막에 논란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김수행 교수의 역자 서문 핵심 요지

하아, 과연 그럴 법하군, 이런 생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 지면에 쓸까 하였는데, 무슨 까닭인지, 내 서가에 이론과실천사의 〈자본〉이나 강신준 교수가 번역한 길출판사의 〈자본〉은 한눈에 보이는데 김수행 교수의 비봉출판사 판 〈자본론〉 전 4권 중 그 1권이 없어서, 학교 도서관 지하 서고로 가야 했다. 그곳에 서울대에서 정년을 마치고 성공회대에서 석좌교수로 재직하다가 2015년 7월 31일,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한 김수행 교수의 유산, 즉 그가 꼼꼼히 읽고 번역하고 공부한 책들이 ‘김수행 문고’로 정리되어 있다. 그가 번역한 〈자본론〉 전권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저서와 영어판, 독어판, 일어판 등의 경제학 서적들 말이다.

모처럼 내려온 김에 ‘김수행 문고’를 둘러보다가 몇 권을 꺼내서 펼쳐보았는데,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 여백에 자필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렇지 않은 책들도 물론 있지만 그 수는 적었고 또 그런 부분을 일부러 찾아내려는 것도 약졸의 고약한 행동임에 틀림없어 그만두고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스미스의 〈국부론〉을 따로 꺼내 살펴보았다. 이것이 〈자본론〉의 서문을 쓰려다가 스미스의 〈서문〉으로 바뀐 연유다.

경제학자 케인즈에 관한 저서에 남아있는 김수행 교수의 흔적.

우리 학계 일부와 언론에서는 두 학자를 기계적으로 대비하고, 마르크스에 대한 터무니 없는 거부를 위해 스미스의 사상이나 〈국부론〉을 마치 이 탐욕스런 자본주의의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두 사상가와 그 책들의 심원한 번역가이고 해석자인 김수행 교수가 보기에 이토록 처참한 지적 빈곤과 사상적 편견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스미스의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은 김수행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 월가나 한국의 독점 재벌체제가 슬로건으로 삼을 정도로 졸렬한 개념이 아니다. 김수행은 이 책의 ‘역자 서문’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나 ‘자연적 자유’라는 스미스의 은유와 사상은 “사회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한도 안에서 개인에게 사적 이익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사회철학이다.

〈국부론〉을 발표하기 17년 전에 〈도덕감정론〉을 출간하여 국가 간 폭력과 사회 내의 증폭되는 갈등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그 내면세계의 가치를 확보하려 했던 스미스로서도 오늘날 탐욕적 자본주의의 이론적 근원이 ‘보이지 않는 손’임을 안다면 그 개념을 폐기할지도 모르겠다. 한 번 더 김수행의 서문, 그러니까 다음 주로 미뤄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아니라, 스미스의 〈국부론〉 앞에 적은 ‘역자 서문’을, 그 핵심 요지를 간추려 읽어 보자.

“〈자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책이 바로 〈국부론〉이다. 마르크스는 〈국부론〉을 연구하면서 자기의 경제학체계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스미스가 창조한 경제학의 용어와 개념을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하고 수정하면서 자기의 ‘혁명적인 체계’를 완성한 것이다(중략). 현재의 부르주아 경제학은 독점자본이나 다국적자본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엄청나게 훼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스미스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