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를 찾아서] 염경엽 단장, 바닥에서 깨친 자기성찰

배우근 2018. 5.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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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의 천재가 신세계를 연다. 0.9%의 비범한 사람이 통찰력을 가지고 그 길을 쫓아간다. 나머지 99%는 평범한 우리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W’라고 칭한다]

염경엽 단장이 메모로 가득한 수첩을 보며 미소짓고 있다.
[스포츠서울 배우근기자] 염경엽 단장을 만나러 가는 길. 그는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팀 SK 와이번스의 단장(General Manager)이다. SK 와이번스의 구단 사무실은 문학야구장이 아닌 문학종합경기장 내에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넓은 창 너머 비에 젖은 트랙과 잔디가 한 눈에 시원스레 들어온다.

단장실도 투명한 창으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수평적 소통을 의미하는듯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웃으며 기자를 반기는 염경엽 단장.

개인적으론 그가 감독에서 단장으로 취임한 이후 첫 만남이다. 오랜만의 조우. 인터뷰 계획은 없었다.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염 단장은 그동안 구단 운영에만 집중하느라 인터뷰를 자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선수 수급과 육성에만 집중했다.

SK 힐만 감독이 두산과의 경기 후 선수들과 주먹을 부딪히고 있다. 2017. 9. 14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단장과 감독의 역할 분담’

단장은 구단운영의 큰 그림을 그리는 전략적 부분을 맡는다. 감독은 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술을 구사한다. 이는 메이저리그식.

염 단장은 취임일성으로 그림자 역할을 자처하며 SK 와이번스의 비상을 도왔다. 단, 힐만 감독이 도움을 구할 때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감독의 몫.

그런데 염 단장과 야구가 아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순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무엇이 계기였을까. 단장실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보드. 그곳에 적혀있는 문구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

◇‘☆미쳐야 성공할 수 있다!’

눈에 띄는 핑크색. 글머리에 별표까지 그려져 있다.

밑줄 친 ‘☆변화 ☆선택 ☆결정’이라는 글도 눈에 띈다.

“선수들이나 직원들에게 하는 말인가?”

염 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저 글은, 내가 보고 느끼라고 써 놓은거다”

여러 문구로 가득한 단장실 벽면의 보드
야구 감독은 외롭다. 주변에 코치가 포진하고 있지만, 그라운드에서의 결정은 온전히 감독의 몫이다. 단장도 마찬가지. 아마 대부분의 조직이 그럴 것이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립된다. 그리고 결정에 따른 책임이 늘어난다.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고언을 하는 이는 생각보다 적다.

그래서 염 단장은 “나와의 싸움”이라며 문구를 적어놓은 이유를 설명했다.

염경엽 단장의 태평양 시절(왼쪽 첫번째) 스포츠서울 DB
◇순탄한 삶, 그러나 …

염 단장은 야구계에서 보기 드문 존재다. 희소성에 따른 매력적 가치를 가진다. 프로 선수출신으로 프런트, 스카우트, 코치, 감독을 모두 경험한 특별한 케이스다.

야구인생의 시작은 순탄했다.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하며 야구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프로에서도 금세 주전을 꿰차며 별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았다. 90년대 야구 인기는 뜨거웠다. 선수 염경엽은 마치 연예인이 된 듯 구름 위를 걸어다녔다. 그러나 후배가 치고 올라오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수비와 주루센스가 뛰어나 대주자, 대수비로 버텼다. 그렇게 현역 10년간 성공과 실패의 시간을 거쳤고, 본인 말대로 야구에 대해 깨달을 만 하니까 은퇴할 때가 되어 유니폼을 벗었다.

“2차 1번으로 프로선수를 시작했다. 신인 때부터 주전을 했다. 그 당시 야구 인기는 지금 만큼 좋았는데, IMF한파가 오기 전까지 그랬다. 야구가 끝나며 버스 앞에 팬들이 백여명씩 몰렸다. 사는 집으로는 중고등학생들이 수십명씩 찾아와 아파트 주민들이 항의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걸 얻은 것처럼 느꼈다. 정말 톱클래스 연예인이 된 기분이랄까. 내가 그동안 누리지 못한 인기를 프로에 와서 누렸다.”

◇매너리즘은 날개를 꺾는다

“인기가 생기면 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가장 쉬운 선택을 했다. 노력을 안했다. 주전까지 가는데도 잠깐의 노력으로 올라갔다. 운도 따랐다. 그러나 박진만(현 삼성코치)이 후배로 들어오며 2루수 경쟁을 하게 되었고 인대부상으로 아예 밀려났다. 수술 뒤에 급한 재활을 거치고 1군에 올라왔는데, 그때부터 백업생활이 시작됐다. 이듬해 개막전을 하는데 (박)진만이가 내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저 자리에 못 서는구나’ 순간적으로 좌절감이 확 밀려왔다”

◇ 30대 초반의 염경엽, 다시 또 쉬운 길을 선택하다

“지금 생각하면 마냥 어렸다. 주전에서 밀려나자 그냥 때려치고 싶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을 했다. ‘그만두자!’ 아내에게 이민을 가자고 말했다. 야구는 안하고 틈날 때마다 이민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그때는 IMF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외국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나 같은 경우, 캐나다에 야구 교육자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서 이주공사의 서류실수로 제동이 걸렸다. 내 나이 32살.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사업을 하려고 야구장 밖으로 눈을 돌려봤지만, 나를 등칠 사람만 가득한 거 같았다. 다시 글러브와 방망이를 잡았다. ”

1998년 한국시리즈우승 현대유니콘스 축승회 | 송도비치호텔. 1998.10.30 스포츠서울 DB
◇그냥하는 노력과 절실한 노력은 차이가 있다

“항상 중심에 서 있었다. 내가 나의 인생을 결정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98년 우승 피로연이 갈팡질팡하던 나의 정신을 망치로 때린 듯 번쩍 차리게 했다. 가족과 함께 피로연 장소에 갔는데, 저~ 구석진 테이블이었다. 내가 백업이라 우승에 큰 기여는 못했다고 해도, 진짜 자존심이 상했다. 맨 구석이라니… 팀의 중심 선수들과 가족은 가운데 앉아있었다.”

“가족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로 인해 아내와 아이까지 이런 대우를 받게 되어, 가장으로 창피했다. 그날 밤, 아내와 아이가 잠든 모습을 보며 고민했다. ‘진짜 그만둬야 하나’ 그러나 ‘죽기 살기로 해보자’고 결심했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너는 다른 선수들처럼 절실하게 노력 안해봤잖아. 그래 해보자!’라고.”

◇노력, 그러나 때로는 노동이 된다

“그때부터 새벽 3시까지 방망이를 잡고 손바닥이 까져라 스윙했다. 그런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한 번 빼앗긴 자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년 정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생각없는 노력은 노동이라는 것을. 여러 조언을 받으며 타격 폼을 계속 수정했는데, 결국 나쁜 폼만 몸에 잔뜩 배었다. 이 말 저 말에 따르다 보니 내 것이 없어져 버린거다.”

“무조건적인 노력이 아닌 정확한 방향을 잡고 노력해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코치들은 도와준다고 했지만, 선수에게 맞는 게 아닌 본인들이 해 왔거나 좋다고 생각한 방식을 고수했다. 선수로서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

◇새로운 도전과 성찰

선수 염경엽은 프로의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절실하게 노력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포지션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2001년 은퇴 선언. 대신 지도자로 성공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가슴에 새겼다. 당시만 해도 스타플레이어가 아니면 감독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 그래서 염경엽은 ‘코치로 1등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구단에서는 은퇴한 그에게 프런트로 일할 것을 먼저 제안했다. 운영팀장 대행. 코치는 아니지만, 구단 업무를 전반적으로 배울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컴퓨터 작업을 독학으로 습득하며 새로운 일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인간 염경엽에게 ‘성찰’의 시간을 선물했다.

각종 서류와 책으로 가득한 원탁 테이블에서 염 단장이 책을 읽고 있다.

“마지막 선수시절, 한 눈 팔지 않기 위해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왜? 밑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바닥을 찍으니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게 달라지더라. 거기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 세계는 성공을 해야 그래야 주변에 사람이 생기는구나. 그리고 나를 대우해 주는구나.’ 선수시절 그렇게 친하던 김재박 감독 원망도 많이 했다. 왜 나를 기용하지 않는지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전부 내 탓이었다. 내가 잘 했다면 왜 기용하지 않았겠나. 돌이켜보면 전부 내 잘못이었다. 그때부터 나를 바라보게 됐다. 프런트 일을 하면서도 잘 풀리지 않으면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부터 확인했다. 남이 아닌 나를 보았다. 그러면 핑계를 댈 수가 없다.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전에는 남 탓을 했다. 그건 결국 핑계였다. 나를 보게 되었다는 것. 가장 큰 성찰이었다.”


프런트로 변신한 염경엽을 버티게 한 또다른 버팀목은 자존심이었다. 수모를 겪은 적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공부라고 생각했다. 만약 생계를 위해 프런트 일을 했다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다. 자존심 때문에 진즉에 뛰쳐나갔을 거다.

프런트의 수장이 된 염 단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자존심이 상했지만 공부라고 생각하고 참았다. 이 시간이 훗날 내가 좋은 코치가 될 자양분이 될 거라 믿었다. 상처는 내게 아픈 자국을 냈다. 그 자국이 아물고 또 아물었다. 내게 상처준 사람이 정말 밉고 싫었다. 그러나 그 상처들이 나를 성숙하게 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잘해주었다”라고 회상했다.

‘보빙’(Bobbing)‘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권투용어로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상대의 펀치를 피하는 수비 방법이다. 수영에서 보빙은 물속에서 물밖으로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수영 미숙자가 수심 2미터 정도의 깊이에서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생존법이다. 물속에서 숨을 뱉으면 발이 바닥에 닿는다. 이때 그 바닥을 힘껏 차고 올라와 숨을 쉬는 걸 계속한다.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느꼈던 염경엽은 보빙의 자세로 단단한 지지대를 만들었고 끝내 물밖으로 살아나왔다.


6년간의 운영팀 업무를 경험한 염경엽은 2006년 현대 유니콘스 수비코치로 보직을 옮긴다. 꾸준히 상대팀 전력을 분석하고 승부처에서 각팀 감독의 작전을 파악한 그는 이미 준비된 코치였다. ‘쿠세(투수의 습관)읽기’ 하면 염경엽이라는 인정도 받았다.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된 2008년부터는 LG 트윈스로 옮겨 코치 뿐 아니라 스카우트와 운영팀장을 맡으며 전반적인 야구단 운영 방식을 몸에 익혔다.

그리고 2012년 넥센 히어로즈 작전코치를 거쳐 사령탑에 오르게 된다. 1등 코치가 되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이 그에게 감독 지휘봉을 안겨준 것. ‘감독 염경엽’ 그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내리 4년간 약체로 분류된 넥센 히어로즈를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염갈량’이라는 명예로운 닉네임이 생겼다. 그는 천운이 따라야 가능하다는 프로야구 감독이 된 것에 대해 스스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장석대표(왼쪽)가 신임 염경엽 감독에게 유니폼을 입혀 주고 있다. 2012.10.18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슈퍼스타나 천재로 불린 선수와 그렇지 못한 선수는 지도자로서의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선수 때 이름을 날렸다고 해서 코치로서도 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선수출신이 한 발짝 앞설 수 밖에 없다.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운영팀장을 할 때, 감독 후보군을 올리면 지도자로서 능력이 출중해도 선수시절 야구를 못한 이는 탈락했다. 한국에선 야구 잘하는 사람이 늘 우선이었다.”

“나는 그런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내가 감독을 하며 바뀌었다. 노력하고 준비하면 평범한 선수출신도 감독이 될 수 있다는 사례가 됐다. 그래서 코치들에게 늘 말했다. ‘나도 감독을 했다!’라고. 후배들이 그 의미를 잘 알거라 생각한다”

염경엽 단장이 이승엽의 마지막 문학 SK전을 앞두고 기념 액자를 전달하고 있다. 2017.09.01.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지도자 염경엽, 그는 성공적인 감독 생활을 마치고 2017년 SK 와이번스의 단장에 취임했다. 현장 감독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게 됐다. ‘승승장구’. 젊은 시절 바닥을 찍었다는 경험 때문일까. 그는 베푸는 삶을 강조했다. 사회적 지위 상승과 비례해 성장한 마음의 크기.

그에게 ‘베풀수록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라고 우문을 던졌더니 현답이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을 때 마다 배웠다. 나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권력과 힘을 가질수록 베풀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베푸는 만큼 보답이 올거라고 생각하냐고? 전혀 아니다. 그런 걸 바라면 내가 또 상처받는다. 내가 좋아해서 해주면 그 걸로 끝이다. 내가 잘해주고 기대했을 때 그만큼의 보답이 없다면 상대를 괘씸하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넥센에서 나온 뒤, 그동안 잘해줬다고 생각한 몇몇 사람들이 나에 관한 뒷담화를 했다. 처음엔 많이 밉고 서운했다. 그러나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그건 그쪽의 입장이 있다고 이해했고 생각의 차이라고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직내에서 인간관계로 힘들어 한다. 성공의 사다리는 상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경쟁에 있다는 것. 그러나 크게 보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함께 하는 공동체 운명이다. 가장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프로의 세계. 그곳에서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는 염 단장은 자신의 마지막 W를 공개했다. ‘평생 가지고 가는 인생철학과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라는 질문이 그 대답을 불러왔다. 염 단장은 크게 보면 우리는 모두 성공과 실패를 함께하는 ‘공동체 운명’이라는 내용으로 설명했다.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철칙으로 삼은 게 두 가지 있다. 우선 ‘늘 처음처럼’이 가훈이다. 나도 피곤하고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나 자신과 싸운다. 이젠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면 불안하다. 17년째 그렇게 살았고 성공체험을 했다. 노력하지 않으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거다.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 그리고 도움이 안된 사람으로 기억된다. 나는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이로 기억되고 싶다. 그게 내 소신이다. 세상은 혼자 살지 못한다. 혼자 잘 나가는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같이 성공하고 발전해야 진정한 성공이다. 나는 여러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있다. 나도 그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우스의 아들인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이다. 그의 형상은 다음과 같다. 앞머리는 무성한데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어깨와 발뒤꿈치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양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다.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 있는 카이로스의 조각상에 그 이유가 적혀 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카이로스는 로마신화로 넘어가면서 기회의 여신 오카시오로 바뀐다. 생김새는 카이로스와 마찬가지로 앞머리가 길고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오카시오는 기회를 뜻하는 ‘Occasion’의 어원이다. 카이로스와 오카시오의 생김새는 알려준다. 기회는 기다리면 찾아오는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지나고 나면 생각나는 것이라고, 일깨워준다.


◇염경엽 단장의 ‘W’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아무나 잡을 수 없는 기회. 그걸 놓치지 않은 건, 꾸준한 노력과 준비의 결과다. 주전에서 물러난 뒤, 그리고 프런트로 일하며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되레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다. 십 수년만에 남들이 성공했다고 인정하는 자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더 큰 성공이 아닌 초심으로. 그리고 깨달았다. 성공은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것이라고. 인간 염경엽의 ‘W’가 이 속에 있다.

◇PS 스무살 초반 딸을 두고 있는 염경엽 단장이 청춘에게 건네는 조언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이 이긴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즐기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그건 피나는 노력을 즐기라는 뜻이다. 젊은 친구들에게 ‘막연히 살지 마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거 할까, 저거 할까?’가 아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찾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래도 찾아야 한다. 좋아하는 걸 찾으면 저절로 노력하게 된다. 야구를 좋아하면 5시간을 해도 힘이 안든다. 그 노력이 즐거운 거다. 여자 친구를 7시간 만나도 힘들지 않다. 시간이 번개처럼 간다. 그런 일을 찾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성공하고 싶은 열정이 있어야 한다. 나도 젊은 시절 막연히 살았다. 꿈은 있었다. 아니 누구나 꿈은 있다. 그러나 성공하려면 계획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꿈은 노력하지 않는다. 열정이 있어야 노력을 한다. 열정은 몸을 마구 움직이게 하는 들끓음이다. 넥센 감독시절 선수들에게 ‘야구장에 즐겁게 나오라’고 했다.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야구 그 자체를 사랑하라’고 했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대상은 노력할수록 즐거워진다.”

“청춘은 인생의 봄날입니다. 여러분 모두 힘내세요. 화이팅입니다!”

kenn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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