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⑨줄어든 미군정의 선택지

2018. 5. 2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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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유일한 대안’ 장덕수 암살되자 기댈 곳은 ‘껄끄러운’ 이승만만 남아

한국에서 태어난 버치의 아들 영아 세례 직후 열린 파티에서 한국민주당 사람들과 칵테일을 즐기고 있는 버치. 왼쪽부터 원세훈, 김성수, 버치, 그리고 한 사람 건너 윤치영.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사진 설명에는 김성수가 김규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 한참 지난 뒤 사진 설명을 쓴 것인지, 아니면 그가 아니라 그의 가족이 사진 설명을 쓴 것이라서 그런지 분명치 않다.

미군정, 이승만·김구 잇단 대립 속 보수세력 중 ‘장덕수’ 합리적 판단 장, 현역 경찰 가담 암살자에 희생 배후엔 이승만·김구 연루 지목 진상조사 중 미군정 지시로 중단

1947년 12월2일 미군정을 당혹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였던 장덕수가 암살당한 것이다.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가 더 이상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직후였다. 미군정이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유엔 결의에 따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감시하에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를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분단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고, 소련군과의 협조가 폐기된 상황에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7년 내내 미군정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에는 보수세력 중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핵심 브레인이던 장덕수가 현역 경찰이 포함된 2인의 암살범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장덕수가 암살된 후 열흘이 지나 버치는 하지 사령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1947년 12월12일 ‘장덕수의 암살’, 버치문서 박스 1).

‘12월2일 나는 김성수, 백남훈과 함께 장덕수와 긴 회합을 가졌다. 하지 장군을 비난하는 이승만의 캠페인과, 총선과 관련된 이승만의 주장에 대한 한민당의 태도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나는 남상훈을 통해서 11월29일 저녁에 이들이 이승만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한민당의 수뇌부는 이승만에게 그를 지원할 수 없다고 알렸고, 이승만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노여워했다고 한다. 그는 문을 잠그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을 그와 국가의 반역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모임에 대해서 장덕수는 이승만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말을 하지에게도 했기 때문에 버치가 이 내용을 하지에게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제 의문의 열쇠 하나가 풀린다. 1948년 5월10일 총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정당으로 유일하게 참가했다. 이승만은 자신을 ‘국부’라고 하면서 일개 정당의 대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정당에도 발을 담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상황에서 국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민주당을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은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 되었다. 김도연 재무부 장관을 제외하고 한국민주당 소속의 어느 누구도 이승만 정부에 입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민주당은 1949년 과거 김구와 같이 일했던 신익희와 손을 잡고, 정당명도 민주국민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승만이 왜 한국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았는가는 하나의 의문이다. 그런데 위의 문서는 그 의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이승만은 1947년 말의 시점에서 자신을 지지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한국민주당과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1948년 3월17일자 문서(‘UN Report’ 버치문서 박스 5)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선거 이후에 이승만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12월2일 월요일 김성수, 장덕수, 그리고 4명의 다른 한민당 대표들이 나와 점심을 가졌다. 농지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월2일 저녁, 내가 떠날 때 장덕수는 따로 나에게 와서 김성수가 그 자신에 대한 암살 계획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알렸다. 김성수는 그러한 계획에 대해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필자주: 버치가 한국민주당 관계자들을 만난 날이 장덕수가 암살된 날과 동일한 날로 되어 있다. 이 문서의 날짜는 미국 본토의 시간에 맞춘 것이다. 암살 사건이 저녁 6시15분에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버치와 만난 직후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버치 컬렉션의 다른 문서에도 미국의 시간에 맞추어 보고한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이 문서에 의하면 버치는 장덕수가 암살되기 직전 그와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될 경우 미군정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이 주도권을 갖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여운형의 암살 때와 마찬가지로 장덕수 암살 이전에 이미 암살에 대한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다. 단지 그 대상이 장덕수가 아니라 김성수라고 오해를 했을 뿐이었다. 아래에서 ‘장덕수의 암살’ 문서가 계속된다.

‘12월5일 저녁 나는 장택상에게 그의 친구인 장덕수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전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박광옥과 배희범이 실질적인 범인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의 조사에서 그들의 암살 의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장택상은 그들의 동기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극우들이다. 그들은 고위층 사람들에 의해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너는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이다. 이번에는 그 범죄자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암살자들은 지시에 의해 행동했고, 진보와 지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김구의 식솔들로부터 들어온 믿을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김구와 이승만은 11월30일 회합을 가졌다. 김구의 집에서 회합이 열렸다. 엄항섭도 참석했으며, 나의 정보원에 의하면 알려지지 않은 몇몇 사람들도 참여하였다.’
장덕수 암살 사건을 다룬 1947년 12월4일자 경향신문.

장덕수 암살 사건이 준 가장 큰 충격은 현직 경찰이 직접 암살에 가담했다는 것과 함께 이들의 암살 수법이 매우 대담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장덕수의 부인은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범죄 사건과 달리 암살범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본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얼굴이 알려져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일까?

다른 암살 사건과 공통점도 있다.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은 송진우와 여운형, 그리고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이에 대한 직접적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랬다. 장택상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장택상의 아버지는 임시정부에 대한 정치자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에게 피살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장택상의 집안 내력이 그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조준호는 서울 지역을 잘 알고 있고 많은 접촉이 있는 비정치적인 인물이다. 나는 다른 버전의 정보를 그로부터 받았다. 그가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김구의 친구들은 김구가 장덕수의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나는 김구의 친구 관계에 대해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정당들은 서로를 헐뜯고 김구는 장덕수에게 일본의 주구라고 말했고 장덕수는 김구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너무나 바보같다고 말했다). 김구의 친구들이 김석황을 암살의 범인으로 비난했다고 조준호가 말했다. 김석황은 김구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암살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엄항섭에게 김구가 장덕수와 김성수의 죽음을 승인했다고 말을 잘못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택상은 재판에서도 정의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운형 암살 사건에 개입된 것으로 알려진 신동운을 CIC가 조사해야 한다는 내용의 메모.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윤치영의 이름도 보인다.

버치는 여러 곳에서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중 하나는 이전의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 이승만과 김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의 제일 앞에서 이승만과 한민당의 불편한 관계를 얘기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김구와 관련된 사람이 암살을 지시했지만, 이는 김구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알아서 긴다’고 했던가? 보스를 기쁘게 하기 위해 시키지도 않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요즘도 정치인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주장이 나는 몰랐고, 비서들이 알아서 하다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정보도 믿을 수 없었다. 모두 소문일 수도 있었다.

‘장택상은 이 사건의 해결이 그의 부서의 권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 문제는 오직 사령관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한국의 범죄사를 보면 한국인들은 작은 보상을 통해서 금욕적 침묵을 지키는 것 같지 않다. 미국의 제도로서는 강압적으로 수사할 수는 없다. 사령관만이 할 수 있다. 자백을 할 경우 감형을 해 주는 것이다.’

정말 사령관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2005년 겨울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잘츠부르그의 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전 주한 미국대사(1993~1997)였던 제임스 레이니 전 에모리대학 총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1947년 미군정의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 부임한 직후 그가 맡았던 사건이 여운형과 장덕수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가 조사를 하면서 배후를 캐고 또 캐서 그 정점으로 올라가고 있던 도중 미군정의 고위층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수사를 그만두라는 명령이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여운형과 장덕수 둘 중 한 사람의 암살 사건이었다고 한다.

장택상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하며,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지 사령관밖에 없다고 말했건만, 레이니 전 대사의 증언에 기초하면 실제로는 미군정 측에서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레이니 대사는 자신의 한국 부임 직후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들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다가갔던 사람은 이승만이었다고 말했다.

의문은 또 남는다.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더 이상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를 덮어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레이니 대사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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