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⑨줄어든 미군정의 선택지
[경향신문] ㆍ‘유일한 대안’ 장덕수 암살되자 기댈 곳은 ‘껄끄러운’ 이승만만 남아

미군정, 이승만·김구 잇단 대립 속 보수세력 중 ‘장덕수’ 합리적 판단 장, 현역 경찰 가담 암살자에 희생 배후엔 이승만·김구 연루 지목 진상조사 중 미군정 지시로 중단
1947년 12월2일 미군정을 당혹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였던 장덕수가 암살당한 것이다.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가 더 이상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직후였다. 미군정이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유엔 결의에 따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감시하에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를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분단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고, 소련군과의 협조가 폐기된 상황에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7년 내내 미군정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에는 보수세력 중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핵심 브레인이던 장덕수가 현역 경찰이 포함된 2인의 암살범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장덕수가 암살된 후 열흘이 지나 버치는 하지 사령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1947년 12월12일 ‘장덕수의 암살’, 버치문서 박스 1).
이제 의문의 열쇠 하나가 풀린다. 1948년 5월10일 총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정당으로 유일하게 참가했다. 이승만은 자신을 ‘국부’라고 하면서 일개 정당의 대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정당에도 발을 담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상황에서 국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민주당을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은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 되었다. 김도연 재무부 장관을 제외하고 한국민주당 소속의 어느 누구도 이승만 정부에 입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민주당은 1949년 과거 김구와 같이 일했던 신익희와 손을 잡고, 정당명도 민주국민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승만이 왜 한국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았는가는 하나의 의문이다. 그런데 위의 문서는 그 의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이승만은 1947년 말의 시점에서 자신을 지지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한국민주당과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1948년 3월17일자 문서(‘UN Report’ 버치문서 박스 5)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선거 이후에 이승만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버치는 장덕수가 암살되기 직전 그와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될 경우 미군정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이 주도권을 갖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여운형의 암살 때와 마찬가지로 장덕수 암살 이전에 이미 암살에 대한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다. 단지 그 대상이 장덕수가 아니라 김성수라고 오해를 했을 뿐이었다. 아래에서 ‘장덕수의 암살’ 문서가 계속된다.

장덕수 암살 사건이 준 가장 큰 충격은 현직 경찰이 직접 암살에 가담했다는 것과 함께 이들의 암살 수법이 매우 대담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장덕수의 부인은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범죄 사건과 달리 암살범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본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얼굴이 알려져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일까?
다른 암살 사건과 공통점도 있다.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은 송진우와 여운형, 그리고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이에 대한 직접적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랬다. 장택상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장택상의 아버지는 임시정부에 대한 정치자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에게 피살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장택상의 집안 내력이 그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버치는 여러 곳에서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중 하나는 이전의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 이승만과 김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의 제일 앞에서 이승만과 한민당의 불편한 관계를 얘기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김구와 관련된 사람이 암살을 지시했지만, 이는 김구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알아서 긴다’고 했던가? 보스를 기쁘게 하기 위해 시키지도 않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요즘도 정치인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주장이 나는 몰랐고, 비서들이 알아서 하다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정보도 믿을 수 없었다. 모두 소문일 수도 있었다.
정말 사령관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2005년 겨울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잘츠부르그의 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전 주한 미국대사(1993~1997)였던 제임스 레이니 전 에모리대학 총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1947년 미군정의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 부임한 직후 그가 맡았던 사건이 여운형과 장덕수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가 조사를 하면서 배후를 캐고 또 캐서 그 정점으로 올라가고 있던 도중 미군정의 고위층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수사를 그만두라는 명령이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여운형과 장덕수 둘 중 한 사람의 암살 사건이었다고 한다.
장택상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하며,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지 사령관밖에 없다고 말했건만, 레이니 전 대사의 증언에 기초하면 실제로는 미군정 측에서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레이니 대사는 자신의 한국 부임 직후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들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다가갔던 사람은 이승만이었다고 말했다.
의문은 또 남는다.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더 이상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를 덮어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레이니 대사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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