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14)한반도 연안에 불 밝힐 때마다 제국 시대 어둠은 깊어져갔다
[경향신문] ㆍ동방의 불빛, 한국 등대

중·일에 비해 개항 늦었던 조선 식민 침탈 요구로 등대 역사 시작 일본인 이시바시, 한국 연안 측량 77개소의 등대 건설지 선정 한국인이 팔미도 등대 지었지만 이미 제해권은 일본에 장악돼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식민지 조선을 생각하며 ‘동방의 등불’을 지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는 너는 동방의 찬란한 빛이 되리라.” 광복의 등불은 1945년에 왔지만, 바다의 등불은 대한제국이 명멸해가던 마지막 순간에 밝혀졌다. 한국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가 1903년에 점등됐다. 이번에 인천에서 열리는 세계등대총회(IALA)(5월28일~6월2일)의 상징으로 팔미도 등대가 선정된 것은 백년을 뛰어넘어 한반도를 묵묵히 지켜온 등대에 대한 국제사회의 글로벌적 응답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등대 유산은 제국의 시대와 함께 시작되었고 식민의 바다에 밝혀진 불빛이었다.

■ 이시바시 아야히코, 도쿄에서 인천까지
1123년 북송의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갔던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바닷길은 깊은 곳이 아니라 얕은 곳이 무섭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른바 ‘배가 깨지는’ 해난 사고는 대부분 해변과 가까운 바다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을 밝혀 배를 안내하는 고전적 등대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해안의 여러 지명, 예를 들어 불도, 탄도, 연도, 인화도, 화도, 명도 따위는 선박에 신호를 보내던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
제주도에는 도대불이라는 토착 등탑이 속속 들어섰다. 제주는 화산암 암초가 대단히 위험해 뱃길이 위험하다. 산지 등대, 마라도 등대, 우도 등대 등이 일제에 의해 건설됐으나, 이는 전적으로 난바다를 항해하는 배에만 도움이 될 뿐, 작은 포구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밧개(갯벌)에 등대를 설치해야 했으니 그것이 ‘도대’다. 도대불이라고 하는 제주도 토착 등대는 대략 20세기 전반기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등탑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의 본격적인 서구식 근대 등대는 제국주의 침략기에 만들어졌다. 제국의 침략은 언제나 바다로부터 시작됐다. 조선의 등대 사업은 일본의 침략과 맞물렸다. 조선으로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개항 자체가 늦었고, 그 또한 강제적이었기에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조선에서 등대 사업은 1894~1895년 청일전쟁 시기에 함선 통항의 필요성 때문에 시작됐다. 오로지 제국의 욕구와 필요에 의해 촉발됐다는 불행한 역사의 출발을 뜻한다.
일본은 등대의 위치와 설비, 등대의 종류에 관한 측량과 설계 조사를 행했으며, 공학박사 이시바시 아야히코(石橋絢彦)를 한국에 보냈다. 그는 1895년 6월부터 4개월간 증기선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다니며 한국의 연안을 측량하고 등대 건설 위치 등을 조사했다. 1870년대 영국인에게서 등대 경영 기술을 습득한 일본은 불과 25년 만에 한국의 항로 표지 근대화를 지도하는 입장이 됐다.
이시바시는 한국 등대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가장 주요한 인물이다. 에도 출신으로 영국에서 유학해 등대 공사와 여타 해상 공사를 연구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공부성 추천으로 등대국에서 근무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대본영의 위촉으로 쓰시마섬, 고도(五島)섬의 5개소에 등대를 건설했으며, 1904년 러일전쟁 때는 한국으로 들어와 부표를 설치했다. 요코스카(橫浜)의 다리를 개수하면서 일본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 다리를 완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공학자이자 제국주의 전선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국권 피탈 뒤엔 ‘등대의 시대’ 오로지 최대의 수탈에만 급급해 기념비적 유산은 거의 못 남겨 인천서 28일부터 세계등대총회 팔미도 등대, 행사 ‘상징’으로

■ ‘제국의 시대’이자 ‘등대의 시대’
1901년 5월 한일무역규칙이 정해지고 해관 세목 등에 관한 한·일 양국 간 체결이 있었다. 조약 31항에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통상 항구의 수리와 등대를 건설해야 한다는 취지가 들어 있었다. 침략을 위한 방식이건, 일반 무역을 위한 목적이건 등대 없이는 안전 항해를 보장할 수 없고 선박의 난파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일본에서 등대 건축 기사를 파견해 한국 연안의 등대 건설을 관장하게 된다.
1901년 11월 이시바시는 총세무사와 협의해 한국 연안 77개소의 등대 건설지를 선정했다. 1902년 3월에는 해관등대국을 인천 중국인촌에 설치했다. 인천항로의 등대 건설에 착수해 소월미도, 팔미도, 북장자사 및 백암 등대는 1903년 6월에, 부도는 1904년 4월에 점등했다. 한국 등대의 효시다. 서울과 인천으로 진입하는 경기만에 집중적으로 등대를 세운 것이다.
1903년의 팔미도 등대는 대한제국기에 한국인의 힘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통감부가 1906년 들어섰다 손치더라도 이미 제해권은 일본의 손에 장악된 상황이었다.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입장도 있으나, 항만·해운·물류·수산 등 한반도 해역이 일본의 손으로 이미 넘어간 상태에서 등대가 건설되었음을 주목한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둔 1905년 이후, 즉 1906년부터 한국에 등대가 다시 본격적으로 건설된다. 외교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일제는 한반도 연안에 중요한 등대를 하나 둘 완공해 1910년 국권피탈 시기 즈음에는 이미 많은 등대가 가동되고 있었다.
1906년 신설된 관세공사부 소속의 등대국은 치밀하게 조직됐다. 1907년 직원 37명 중 과반수인 20명이 1910년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그대로 계승됐는데, 다수가 일본인이다. 이는 등대국의 기본 성격이 일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반증한다.
등대가 집중적으로 들어선 20세기 초반은 ‘제국의 시대’이자 ‘등대의 시대’였다. 팔미도 등대(1903)를 시작으로 부도(1904), 거문도(1905), 우도(1906), 울기(1906), 죽도(1907), 시하도(1907), 호미곶(1908), 당사도(1909), 목덕도(1909), 하조도(1909), 격렬비도(1909), 가덕도(1909), 죽변(1910), 소리도(1910), 방화도(1911), 어청도(1912), 산지(1916), 주문진(1918), 홍도(1931), 미조항(1939), 서이말(1944) 등대 등은 대한제국기와 일제 침략으로 요동치는 한반도의 현장을 지켜본 근대 등대의 총아다.

대한제국 말기에 인천 팔미도, 부도 등지에 등대가 들어선 것은 인천을 통한 한양 진입이라는 절대적 항로의 보호, 한·일 간의 물동량 급증과 군사적 항로의 증대,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 거류민단의 대외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면도 있었다. 한반도를 실질적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통감부, 총독부 초기의 등대는 일본 고베항 등으로부터 중국 다롄으로 가는 원해 항로의 길목에 건설됐다. 동쪽으로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북조선으로 가는 길목에 등대가 들어섰다. 어선을 보호하는 자그마한 항구의 방파제에 등대가 들어선 것은 후대의 일이며, 그것도 제한적이다. 따라서 20세기 전반기의 한국 등대에 ‘제국의 등대’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적당하다 하겠다.
일본이 세운 등대는 영국 등 해양력을 갖춘 유럽 국가에 비해 대체로 소박하고 어찌 보면 초라하기까지 하다. 후발 자본주의 제국인 일본의 역량 한계를 보여준다. 동시에 식민지 건설과 확장이라는 발전론적 팽창에만 몰두할 뿐, 기념비적 유산을 세울 의사도 태도도 없던 수탈 국가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바다를 통한 최대의 수탈, 빼앗은 물품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데만 급급했을 뿐 식민지에 기념비적 등대를 세운다거나 하는 일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한국 등대의 양식은 일본의 프리즘을 통해 굴절, 반영된 영국식 근대 등대의 형식과 논리를 따르고 있다.
등대는 등탑 외에도 등대지기 숙소, 창고 등의 연관 시설이 중요하다. 등탑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일본식 목조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 이어지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호미곶 등대처럼 건축학적, 미학적 완성도가 돋보이는 몇 개의 등대 유산이 남아 있을 뿐이다.
■ 등대 100주년을 넘기며
일제가 남긴 등대는 고스란히 유산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에는 독도(1954), 송대말(1955), 속초(1957), 울릉도(1958), 후포(1968), 대진(1973), 도동(1979) 등대가, 심지어 21세기에는 영덕 창포말 등대, 통영 문학기념 등대, 해운대 APEC 기념 등대 같은 조형 등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발자취가 만들어졌다. 난바다로 나아가는 등대가 이미 20세기 초반에 마련된 이상, 더 이상 원해 등대를 세울 이유는 없다.
북한에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만들어진 다수의 등대가 남아 있다. 한국전쟁과 이어진 남북분단 속에 북한의 등대는 현재로서는 ‘잊힌 등대’가 됐다. 북한의 등대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은 등대가 여전히 전략적 해양기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등대는 전략적으로 중요할뿐더러 경관이 뛰어난 공간에 위치해 그 보존 가치가 상당히 높다. 불필요한 개발을 하지 않았기에 100여년 전 등대의 원형과 경관 배경을 잘 간직하고 있다. 다음은 북한의 현존 등대다.
동해안: 오갈산·난도·곽단·나진항·대초도·소초도·괘암도·송도·청진·어량단·경성만·성단·쾌단·운만대·무수단·성진·용대갑·단천항·천초도·죽도·신창항·동호동·송도갑·송령만·마양도·안성갑·서호진·광성곳치·용진·장적도·원산동·원산서·신도·압룡단·여도·고저항·총석단·사월각·장아대단·장천·수원단 등대 등.
서해안: 방도·초도·몽금포·서도·자매도·흑암·찬도·지리도·피도·오리포·마치지·비발도·덕도·함성열도·납도·만낭기·수문도·운도·다사도항·마안도·문박 등대 등.
한국의 등대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반도국가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잘 반영한다. 서해안 등대는 중국, 남해안과 동해안 등대는 일본과 관련이 높다. 특히 동해안 등대는 러시아-시베리아 북방으로 가는 환동해문명권에 놓여 있기도 하다. 환동해의 외연이 확장될수록 동해안 등대의 문명사적 역할도 변화해갈 것이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등대는 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진입하는 길목에 놓여 있다. 유럽에서 이른바 ‘극동’이라 칭하던 동아시아가 글로벌 세계 체제의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그 중심에 한반도의 등대가 포진한 것이다. 남북한의 통일 역량과 평화 체제 구축에 따라서 앞으로 남북한의 등대 역시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되고 의미망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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