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뉴스]"나는 5·18 가해자입니다" 그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곽희양 기자 2018. 5. 1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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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폭행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한승원의 소설 <어둠꽃>에는 공수부대원 출신 남자가 나옵니다. 그는 제대 후 광주의 경험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밟혀 죽을 것 같단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속으로만 말합니다. ‘죽어도 내가 이 도회를 얼룩무늬 옷 입고 들어온 일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아야만 한다. 내가 왜 발설을 해? 나 죽으려고 발설을 해?’

이순원의 소설 <얼굴>에 나오는 공수부대원 출신 은행원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오빠가 1980년 광주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광주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38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학살을 지시하고, 학살을 집행한 이가 누군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발포 명령’ ‘헬기 사격’ ‘암매장지와 행방불명자’ 문제는 미궁 속에 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유죄 선고와 사면을 받았습니다만, 이들의 윤리적인 문제까지 해결되진 않았습니다.

학살을 가했던 이들에 대한 책임 구분도 모호합니다. 이들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직업 군인과 의무 복무한 병사에게 동일한 책임을 물을 것인지, 적극적으로 학살에 나선 자와 소극적으로 나선 이들을 분리할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등의 문제도 있습니다. 5·18 가해자 문제, 어떻게 봐야 할까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 부대원들이 1980년 5월18일 금남로에서 대검을 착검한 채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고 신복진 사진가 가족 제공

■“나는 그런 적 없다”…무반성, 왜?

전남도청 앞에 집결된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의 관과 시체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활동했던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살인·고문·사체유기·성폭행을 했던 3·7·11 공수부대원을 면담조사 했습니다. 성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사과정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답변을 강제할 권한은 위원회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시위를 진압할 때 왜 대검을 총에 꽂았느냐’ ‘누구의 명령이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착검을 한 총을 들고 시민을 폭행하는 당시 사진을 보여주면, 사진 속 인물이 과거 자신의 동료임을 인정하면서도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런 일이 있더라도 나는 관련되지 않았다”거나 “나도 피해자”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학살 가해자들이 발뺌하는 모습에 대해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이렇게 진단합니다. “‘민주화’와 과거청산이 어느 정도는 수행된 대한민국에서 이제 가해자는 뻔뻔하게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거나 ‘애국’으로 치장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가해+무반성의 네트워크와 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진심으로 반성하지는 않는(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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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서 “군사반란과 내란행위는 처벌 대상”으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모습.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학살 가해자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이유는 5·18 진상규명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88년 10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고소가 진행됩니다. 검찰은 피고소인을 조사도 하지 않고 ‘혐의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합니다.

문민정부도 소극적으로 행동합니다.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은 광주 수습책을 담은 특별담화에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발표합니다. ‘역사에 맡기자’라는 애매한 태도는 1990년 3당 합당을 했던 김영삼 정부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5·18 가해자 세력이 여권의 다수를 점한 상황에서, 정치적 계산을 했던 것이죠.

그럼에도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커져갑니다. 1994년부터 이듬해까지 가해자에 대한 총 70건의 고소·고발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는 1995년 7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립니다. 소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이 때 나옵니다. 1979년 12·12사건부터 이듬해 5·18까지 신군부의 공권력 사용을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너진 구헌정 질서에 근거해 새로운 정권과 헌법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행위들에 법적 효력을 다투거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따라서 사법 심사가 불가능하다.’

1995년 7월 19일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가족과 대학생들이 5·18 주범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검찰의 이 같은 결정에 5·18 특별법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대학생·교수·교사·변호사·종교·언론계가 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다가 19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원 비자금 은닉’ 사실을 폭로합니다. 이로써 특별법 제정이 탄력을 받습니다. 시민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이어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가 발족합니다. 특별수사본부 설치 3일 만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구속돼죠.

1996년 8월 구속 수감중 재판을 받기 위해 서울지법으로 힘없이 걷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곧 사면됩니다. 대법원의 판결이 있기 전부터 일부에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이 있었고요. 1998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두 전직 대통령은 사면을 받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끝내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는 2017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사태(5·18 광주민주화운동)와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객관적 근거와 동떨어진 주장이었습니다. 법원은 해당 회고록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판결합니다. 전문가들은 전 전 대통령의 ‘결백’ 주장에 대해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의 방어기제”라고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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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학살 집행자의 사고를 마비시켜, ‘구조적 폭력’도 봐야

출처, 정호기(2015년 12월)‘5월 문제’의 해결과 가해자의 사법적 처리

가해자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는 한, 가해자 논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만, 집단학살에 대한 기존 연구를 지렛대 삼아 가해자 문제를 우회해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연구했던 한나 아렌트는 ‘학살이 정신질환자들에 의해 저질러졌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행위가 정상이었다고 믿는 일상적인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봅니다. 유태인을 학살했던 나치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을 두고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던 그의 이론은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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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0시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를 선포하며 “북한공산집단의 대남 적화책동이 날로 격증되고, 사회 교란을 목적으로 한 무장간첩의 계속적인 침투가 예상되고 있다”고 밝힙니다. 신군부는 ‘혼란’ ‘사회불안’을 반복적으로 외치며 ‘국민경제 파탄’ ‘북괴’에 대한 위기의식을 강조합니다. 사회의 안정·안보·발전을 저해하는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잠재워지지 않는 지역이 광주였습니다. 따라서 광주 시민들은 ‘불순분자’와 ‘폭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당시 언론도 5·18을 ‘국가전복을 노린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정으로 발생한 내란’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의 학살 행위는 이런 배경과 관련 있습니다. 그들은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폭도들을 소탕하자’며 경쟁하듯 나섰습니다. 빨갱이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식이죠. 5·18 진압 작전명이 ‘화려한 휴가’였다는 점은 나치가 유태인 학살을 ‘최종해결책’으로 부른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직접적인 폭력’보다 ‘구조적 폭력’에 주목하라고 당부합니다. 구조적 폭력이 직접적 폭력의 원인임에도, 우리는 구조적 폭력의 결과에 대해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논의에서 당시 시대 상황 역시 고려돼야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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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이 담겨 있는 관. 경향신문 자료사진

5·18 피해자들의 치유는 가해자들의 진심어린 사죄에서 시작합니다. 가해자들의 용기있는 태도와 우리 사회의 반성적 사고를 통해 화해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봅니다.

**참고문헌 ·노영기(2017년), 10년 전 기억, 새로움을 위한 제언. 역사비평.

·정호기(2015년),‘5월 문제’의 해결과 가해자의 사법적 처리. 민주주의와 인권

·이영재(2015년),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5·18 특별법’. 민주주의와 인권

·최치원(2009년), 5·18민주화 운동과 가해자들. 5·18 기념재단

·곽송연(2013년), 정치적 학살 이론의 관점에서 본 가해자의 학살동기 분석, 민주주의와 인권

·노영기(2017년), 10년 전 기억, 새로움을 위한 제언. 역사비평.

<곽희양 기자 huiy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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