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핵무덤

조호연 논설위원 입력 2018. 5. 1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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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인구 2만9000명의 소도시 미 테네시주 오크리지는 ‘원폭의 고향’이다. 미국 정부가 1942년 비밀 핵개발 프로젝트였던 ‘맨해튼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와 함께 인공적으로 급조한 도시다.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꼬맹이)를 이곳에서 만들었다. 리틀보이는 맨해튼계획을 승인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별명이다. 이때부터 오크리지는 ‘비밀의 도시’ ‘원자력 도시’로 불렸다.

이곳에는 지금도 원자력 공장과 원자에너지 박물관 등 미국의 국립과학시설이 있다. 워낙 한적한 곳이라서 평소 찾는 이가 드물지만 일본인 관광객이라면 질색할 만한 장소다. 이 도시 주민들도 맨해튼계획으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미 정부에 따르면 5만2000여명이 암 발병 등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보상을 받았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인 매년 8월6일 이 도시 주변에서 반핵집회가 열린다. 핵 없는 세상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해야 할 상징적 장소다.

냉전 종식 이후 오크리지는 핵물질과 관련 장비의 저장고 역할을 해왔다. 1994년 빌 클린턴 미 정부가 구소련 붕괴 후 핵물질 관리가 잘되지 않자 카자흐스탄에 있던 핵무기 원료 고농축우라늄(HEU) 600㎏을 이곳으로 옮겨온 게 효시다. 이어 2003~2005년 25t에 달하는 리비아의 핵개발 장비와 문서들이 옮겨졌고, 2010년부터는 칠레의 HEU도 이곳에서 보관되고 있다. 냉전 시 ‘원폭의 요람’이던 곳이 ‘핵 종말처리장’ 혹은 ‘핵무덤’으로 바뀌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핵은 인류를 단번에 무덤으로 보낼 수 있는 역사상 가장 흉측한 무기다. 그런 점에서 핵무덤은 많을수록 좋다. 아니 종국적으로는 핵무덤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노력이 요구된다.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3일(현지시간) 북한의 핵물질을 반출해 보관할 장소로 오크리지를 지목했다. 그는 비핵화가 “모든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 핵무기를 폐기해 오크리지로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핵물질 보관 및 폐기 기술력과 경험으로 보면 일견 합리적인 제안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남는 의문이 하나 있다. 북핵은 반드시 미국으로 옮겨야만 하는가?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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