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일본사 감상법 ②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2018. 5. 9.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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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전회에 이어 일본사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흔히 일본 혹은 일본인이 작다, 자잘하다고 생각한다. 왜인(倭人), 왜국(倭國)의식이다. 전근대 일본인이 키가 작았던 것은 사실이나 역사의 스케일이 작지는 않았다. 선사시대인 죠몽 시대의 거대한 유적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일본 관광길에 흔히 접하는 나라의 도다이사(東大寺)나 이 절의 대불, 또는 오사카성처럼 지금도 각지에 남아 있는 성들의 크기를 떠올려보라. 일본을 드나들던 조선통신사들도 건축물과 시가지의 크기에 탄성을 질렀다.

무엇보다 일본열도는 한반도보다 훨씬 넓다. 홋카이도를 빼도 한반도의 1배 반이며, 이를 넣으면 2배 가까이 된다. 남한과의 차이는 당연히 훨씬 크다. 일본여행을 하다 보면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데 뭐 이리 오래 걸리나 싶다. 도쿄에서 교토까지는 일본 전체에서 보면 간토(關東)와 간사이(關西) 간 이동에 불과하지만 그 거리는 서울~부산과 비슷하다. 전회에서 말한 대로 인구 또한 많아 18세기에는 조선 인구의 두 배가 넘는다. 지금도 일본 인구 1억3000만명은 유럽에 갖다 놓으면 러시아와 함께 톱이고 면적도 ‘빅5’에는 너끈히 들 거다(통일한국도 유럽에 가면 큰 나라다). 왜인으로 불렸지만 일본인의 역사무대는 결코 왜소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일본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중 하나는 일본이 해양세력이라는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대륙 중국과 해양 일본이 한반도를 놓고 각축을 벌였다는 역사상이 만들어졌다. 특히나 일본인이 이런 역사상을 좋아했고, 서양인들도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19세기 말 청일전쟁 이후라면 몰라도 긴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명청교체(1644년)에서 청일전쟁(1894년)에 이르는 무려 250년간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 즉 청나라 일극지배체제였다. 일본은 양강 세력이긴커녕 주요 변수도 되질 못했다.

해양세력이 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해군력이 강해서 제해권을 장악하거나, 적어도 바다 건너 대규모 육군을 지속적으로 파견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이 있어야 하며, 또 하나는 국부가 해상무역에 크게 의존해야 한다. 일본이 이를 충족시키는 해양국가가 된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다. 전근대, 특히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둘 다 아니었다. 일본은 철저히 육군의 나라다. 배 타고 바다에서 싸우는 것은 사무라이의 이상이 아니었다. 전근대 일본이 중앙정부 차원에서 해외원정을 감행한 것은 7세기 백제구원 명목으로 백강 앞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운 것과 임진왜란이 전부이다. 2000년간 두 번! 그 두 번마저 해전에서는 맥을 못 췄다. 도쿠가와 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막부든 번(藩·봉건국가)이든 해군이 없었다.

해상무역은 어떠한가. 일본은, 특히 도쿠가와 일본은 전형적인 농업국가다. 생산은 대부분 논과 밭에서 이뤄졌고, 그 부에 기초해서 국내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해외무역 비중은 물론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작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도쿠가와 막부는 쌀 500석 이상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선박을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각지의 다이묘(大名·봉건영주)가 이를 이용해 반란이나 해외무역을 꾀하는 걸 막은 것이다. 작은 배로는 먼바다에 나갈 수 없다. 이 금령이 해제된 것은 페리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뒤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인들은 표류민을 제외하고는 외국 땅을 밟지 못했다. 설령 밀항 등으로 해외에 나갔다면 돌아올 수 없었다. 처형당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가 부산 왜관에 주재하던 쓰시마인들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들은 왜관이라는 공간 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조선인들과 격리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중국에 단 한 번도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고, 일본 무역선이 동중국해를 건넌 적도 없다. 물론 군사위협을 가한 일도 없다.

이랬기 때문에 1850년대 에도만에 나타난 미국 페리 제독의 증기선을 보고 일본인들은 경악했던 것이다. 집채만 한 크기, 거기에 실려 있는 수많은 군인과 무기들, 험한 바다를 자유자재로 ‘화살과 같이 빨리’(당시 표현) 질주하는 함선… 일본인들은 진짜 해양세력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 충격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미치광이처럼 바다에 뛰어들어 페리에게 자기를 해외로 데려가 달라고 호소했고, 가쓰 가이슈(勝海舟)와 그 제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해군 창설과 해외무역 개시, 즉 해양국가가 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부르짖었다. 해양국가 일본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그 후 한반도는 비로소 대륙과 해양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도 해양세력이 되었다. 휴전선은 양 세력의 경계선이다. 오랫동안 한반도를 괴롭혀왔던 유목세력과 중국세력의 갈등은 사라지고(본 칼럼 ‘지정학적 지옥 한국, 지질학적 지옥 일본’ 참조), 19세기 말 이래 새로운 갈등구도가 생긴 것이다. 얼마 전 따뜻한 봄날에 펼쳐진 ‘도보다리 회담’은 이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도전’이다.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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