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작가주의 만화가 박건웅
[경향신문] “기억하는 것이 곧 살아있는 것이다”
1975년 그해 봄. 정확히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기록하고 있다. 유신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8명을 사형에 처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인혁당 사건을 발표한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장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인혁당 사건은 나중에 재심을 통해 고문에 의한 조작사건임이 밝혀졌고, 국가는 배상까지 했다.
그러나 다시 정권을 잡은 박근혜·김기춘은 정부가 지급한 배상금(일부)을 돌려달라며 유족의 월급과 집을 압류하는 파렴치함을 보였다. 이 압류사건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해 봄’에 일어난 국가 폭력은 유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혁당 사건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다.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사건을 소재로
4월 9일을 맞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그해 봄>(보리출판사)이라는 제목의 장편 만화책이 나왔다. 작가 박건웅(사진)은 장편·역사 만화를 주로 그리는 ‘작가주의’ 만화가이다. 작가주의 만화란 유럽에서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으로, 가볍고 유희적인 만화가 아닌 인문·사회·예술적 성향을 강하게 표현하는 만화를 말한다.
“2012년 대선 전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을 두고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인혁당 사건을 몰랐던 사람들도 이 논란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나 역시 세밀한 이야기를 몰라 자료를 찾아 간단한 웹툰을 그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본격적으로 인혁당 사건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인혁당 사건을 드러난 법적인 이야기 위주가 아닌, 숨겨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보자고 생각했다. 마침 지난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지원사업으로 선정돼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5년 정도 시간이 걸렸다.”
당시 박근혜 후보는 고문과 조작으로 사형을 확정한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로 결정된 것을 두고 “두 개의 다른 대법원 판결이 있다”고 황당한 대답을 해 논란이 됐다. 아마 2016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늦잠 자다’ 뒤늦게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아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왜 찾기 어렵나”라고 황당한 얘기를 했던 바로 그 맥락이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을 다룬 <그해 봄>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꽃>(2004년),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다룬 <노근리 이야기>(2007), 비전향 장기수의 일대기를 그린 <나는 공산주의자다>
(2010),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한 <삽질의 시대>(2012), 김근태 고문치사사건을 그린 만화 <짐승의 시간>(2014), 1950년대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다룬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2015),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양우조·최선화 부부의 육아일기를 그린 <제시 이야기>(2016) 등 현대사와 관련된 사건을 소재로 장편만화를 그렸다.
-근현대사를 소재로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특히 현대사 얘기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찬양하거나, 4·19혁명이나 5·18항쟁은 짧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권력이 현대사의 상당 부분을 왜곡하는 것을 대학에 와서 알게 됐다. 대학 때 틈틈이 현대사 얘길 듣고 민간인 학살 특히 국민보도연맹에 대한 공부를 했다. 이를 전공(홍익대 서양화과)인 미술로 표현해 보자고 했다. 현대사는 스토리텔링, 서사적 구조가 있어 한 장의 회화에 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만화로 하나하나 만들어 보자고 했다.”
-<제시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항일투쟁의 기록이고, <연안송>은 중국공산당 정률성을 그린 작품이다. 독립운동가를 찾는 것에도 관심이 있나.
“독립운동사까지 다루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는데 우연히 상하이 영사관에서 독립운동을 만화로 해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독립기념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영웅담보다 일제에 항거하며 아이를 키우는 육아일기를 소개 받았다. <제시의 이야기>는 일상적인 이야기다. 이 책은 내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이 책은 유럽에서도, 중국어판도 출간할 예정이다.”
-책은 잘 나가나. 이렇게 두꺼운 책을 만들려면 제작비도 많이 들텐데. 출판사는 상업성이 있어야 책을 만들지 않나.
“솔직히 많이 팔리지는 않는다. 수익적 환원구조가 되면 좋겠지만 출판사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책을 내고 있다. 이번에 책을 낸 보리출판사는 평화·통일·인권에 관한 만화책을 꾸준히 낸 출판사다. 언젠가는 좋은 계기가 되어 재조명될 수 있으면 좋겠다.”
-본인도 수익이 나야 생활도 하고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적인 문제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해 만드는 것은 아니다.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다행히 <꽃>이 이탈리아에서, <나는 공산주의자다>는 프랑스에서 출간됐다. 그는 “올해 <세종>과 <제시의 이야기> 등이 해외에서 출간될 예정으로 수익은 해외에서 올린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에서 작가주의적 만화 활동이 매우 활발하고, 여전히 웹툰보다 책의 형태가 일반적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웹툰을 유럽에 가져가 소개하는데, 유럽은 여전히 책으로 정보를 얻는 문화”라면서 “유럽에 맞지 않는 것을 자꾸 가져가 소개하는 것은 ‘문화적 폭력’이다”라고 말했다. 작가주의 만화 해외판으로 내는 것은 문학작품만큼 어렵다. 전문 번역가가 번역하고, 이를 다시 감수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일종의 판화 느낌 주는 강렬한 이미지
사실 종이로 된 신문·잡지보다 포털에서 값싸게 보고, 책은 1년에 8권밖에 안보는 것이 ‘천박한’ 우리의 지성수준이다. 특히 청소년 독서량은 연간 1권밖에 안되는 세계 166위 수준이다.
그는 컴퓨터 작업은 최소한 보정하는 수준에 국한하고 될 수 있으면 원본 수작업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수작업이냐 컴퓨터 작업이냐의 영역이 불분명해졌고, 웹툰이냐 출판만화냐 하는 구분도 불필요하다”면서 “콘텐츠의 질로 접근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도 1컷짜리 시사만평이나 4컷짜리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전공은 장편이다. 1컷 혹은 4컷 만화가 단거리라면, 장편은 일종의 마라톤 경기다. 그는 “이야기를 하는 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같지만 긴 호흡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구조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장편이 어렵다”면서 “핵심을 압축하고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서는 1컷 만화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초창기 컬러로 작품을 그렸지만 최근에는 대부분 흑백으로 그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강렬한 이미지로 일종의 판화 같은 느낌도 준다.
“흑백 이미지는 할수록 매력적이다. 블랙&화이트 작업은 간단해 비용도 절감되지만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 연상을 할 여지를 준다. 만약 빨간색을 쓰면 독자들이 직접 빨간색으로 인지하지만, 흑백에서는 독자들이 다양한 색을 인지하거나 상상할 수 있다. 대신 작품마다 스타일을 좀 바꾸려고 한다. 목판화 식으로 굵게 가거나, 어떤 것은 선 위주의 서정적으로 가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
-1980년대 민중미술의 판화 작품과 비슷한 모티브와 인상을 받는다. 민중미술의 맥을 잇는 건가.
“선배들의 현실 참여·고발에 영향을 받은 점에서 민중미술의 맥을 잇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래픽 노블 개념은 민중미술과 차원이 다르다. 사회적으로 무거운 소재를 작가·예술적 차원의 만화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계보라기보다 만화의 다양성을 확장시켰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작가적 관점에서 만화를 풀어내는 작업을 하는 데 현대사에서 아픈 기억, 특히 국가폭력 희생자에 대한 관점을 주로 얘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즘은 망각의 시대다. 바로 최근에 발생한 사건도 사라져 버린다. 박근혜는 계속 ‘잊으라’고 했다. 나는 기억하는 것이 곧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애니메이션 <코코>(올해 개봉한 미국 리 언크리치 감독의 만화영화)를 보면 ‘죽은 사람들은 산 자들이 기억하는 것에서 살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는 살아있는 사람이 기억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도 꺼져가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나는 그런 설정이 맞다고 본다. 특히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기억하지 않으면 아주 사라지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사건은 다시 발생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무런 교훈을 얻을 수 없다.”
박건웅 작가는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직후 벌어진 강경대군 치사사건(명지대 강경대군이 전경에게 맞아 죽은 사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선배를 따라 강경대와 인사하고 막걸리를 같이 마신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나중에 유인물에서 전경에게 맞아죽은 대학생 사진을 보니 바로 그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 ‘죽음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올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학생회 활동을 통해 그림으로 정권에 저항했다. 미대 학생회장을 하면서 집시법으로 여러 번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을 5년이나 다녔다.
2004년 <꽃>이라는 작품집을 처음 출간했다. 우리 현대사를 연작시 형태로 푼 만화로 모두 4권짜리다. 그는 “만화판
<태백산맥>이라고 할까, 세 남녀의 좌우 이념대립 얘기를 그렸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대사 없이 추상성이 강하게 만화를 그렸지만 사실성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해 2권부터 대사를 넣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출간됐다. 이후 <노근리 이야기>는 이탈리아에서 출간됐고, 올해는 세종대왕을 그린 <세종>도 외국어판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전경에게 두들겨 맞아 치료비를 놓고 민변 변호사의 도움으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경향신문> 블로그 ‘칸과 칸 사이’에
<삽질의 시대>를 연재해 인기를 끌었다. 그는 “요즘에는 블로그 시사만화를 잘 안하고 내 주업은 장편만화”라고 말했다. 그는 2003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신인상, 2010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박근혜 정권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는 “문재인·박원순 지지선언을 한 문화예술계 그룹 명단을 그대로 복사해 리스트를 만들었다”면서 “같이 일하기로 했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취소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블랙리스트 때문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같이 만화를 하는 아내와 결혼해 두 아이를 둔 그는 요즘 중국 <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한 음악가 정률성의 <연안송> 마무리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2017년 작업하다 중단한 것으로 올 8월 15일에 맞춰 발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글 원희복 기자 · 사진 우철훈 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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