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의 빼앗긴 권리] 교통약자에 고속버스는 '그림의 떡'.. "봄꽃 구경 꿈도 못 꿔요"

김선영 2018. 4. 15.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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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1만730대 고속·시외버스 중/ 휠체어 리프트 설치 단 한대도 없어/ 지체장애인 지역 간 외출 7.2% 불과/ 장애인용 버스 도입 11년째 말로만/ 국토부 "내년 하반기 시범운행 추진"

“문재인 대통령님, 4월20일 ‘장애인차별 철폐의 날(공식명칭은 장애인의 날)’에 만남을 요청합니다.”

지난 2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박 대표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가 폐지되고 중증장애인들의 노동권과 ‘장애인 이동권’이 온전히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 대통령을 만나 ‘장애인의 완전한 통합과 참여’를 약속받고 싶다며 이같이 청했다.

박 대표는 2001년부터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달라”, “저상버스를 도입해 달라”며 장애인 이동권을 강조했다. 지난 2월에는 “장애인들도 고향 갈 권리를 보장해 달라”며 설 연휴를 앞두고 2박3일간 서울역 노숙 농성을 벌였다. 당시 그와 함께 한 50여명의 장애인은 “2005년 제정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실행되도록 장애인을 위한 버스를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휠체어 사용자 탈 수 있는 고속·시외버스 ‘전무’

지난 2월13일 진해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인들은 진해버스터미널에서 동대구행 시외버스 티켓을 사서 버스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휠체어를 들어 올릴 리프트가 설치되지 않아 탑승이 거부됐다.

15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6년까지 등록된 1만730대의 고속·시외버스 중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이 탈 수 있는 버스는 한 대도 없다. 국토부 관계자는 “2017년 기준 고속·시외버스의 등록 대수는 집계 중이지만 현재까지 휠체어 사용자가 이용할 수 있는 버스는 전무하다”고 말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이 때문에 이동권 확대를 위해 고속·시외버스 등에 휠체어 승강 설비 등 편의시설을 갖춰 이용에 차별이 없도록 해 달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토부가 최근 8대 특별·광역시를 대상으로 실시한 ‘2017년 교통약자 이동 편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속·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없는 휠체어 장애인들이 ‘이동권’에 얼마나 제한을 받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같은 지역(시·도)에서 매일 외출하는 비율은 일반인이 32.5%, 지체 장애인은 22.7%를 보였다. 그러나 시·도 경계를 넘나드는 지역 간 외출 빈도(월평균 1회 이상)는 일반인이 36.0%이지만 지체장애인은 7.2%로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한 장애인 단체 관계자는 “장거리 이동이 쉽지 않은 지체장애인이 지역 간 외출을 꺼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며 “휠체어 장애인들이 고속·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없는 구조적인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휠체어 장애인용 고속·시외버스 도입은 ‘하세월’

정부는 2007년부터 5년 단위로 교통약자 이동 편의 증진계획을 내놓고 있지만 1~2차 계획에서 고속·시외버스 장애인 탑승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2016년 12월 나온 3차 계획(2017~2021년)에서 ‘휠체어 탑승 가능 고속·시외버스 개발’이 추진과제로 제시된 정도다.

지난해 7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휠체어 장애인들의 진정에 따라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시외 이동권 보장을 위해 국토부 장관과 기획재정부 장관, 고속·시외버스 업체 대표에게 휠체어 승강 설비 설치에 필요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인권위의 권고안을 수용한 국토부는 2019년부터 휠체어 사용자가 탈 수 있도록 고속·시외버스 일부 노선에 시범운행을 추진하고 휠체어 사용자 탑승을 위해 고속·시외버스 안전검사기준 개발 완료와 버스 개조, 터미널 시설 개선 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기재부도 내년도 예산편성과정에서 고속버스 이동편의시설 설치비 지원사업에 관해 국토부 등과 협의하기로 했다.

휠체어 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볼멘소리가 나온다. 지체장애인 B(45)씨는 “교통약자 관련법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고, 그동안 줄기찬 요구에도 아직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다. 장애인의 불편만 계속된다”며 “예산만 몇십억원이 드는 연구용역을 1년 넘게 진행하는 정부의 대처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고 지적했다.

◆정부 뒤늦게 대책 내놨지만…‘버스업계’ 설득도 암초

국토부는 지난해 4월 ‘휠체어 사용자가 탑승 가능한 고속·시외버스 개조차량 표준모델과 운영기술 개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교통안전공단과 한국교통연구원 등 10여개 기관이 참여해 내년 9월쯤이나 개발이 완료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국토부 관계자는 “시범사업은 용역 결과가 나오는 내년 하반기부터 실시될 예정”이라며 “예산 등의 문제로 어느 정도 범위까지 사업이 진행될지도 아직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뒤늦게 휠체어 승강 설비를 갖춘 고속·시외버스의 운행을 추진하나 이마저도 녹록하지 않다. 고속·시외버스 업체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친다. 지난 3월 인권위의 권고에 고속·시외버스 업체들은 수용하지 않겠다는 기류가 강하다.

한 고속버스 업체 관계자는 “고속·시외버스 휠체어 승강 설비 설치와 사전예약시스템을 마련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며 “버스터미널 공간 확보뿐 아니라 급정거 등 사고 발생 시 휠체어 사용자의 안전 문제도 따르기 때문에 (권고안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무조건적인 불수용 입장은 아니다”면서도 “정부가 버스업체에 과중한 부담만 지우려 한다면 일이 꼬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버스업체 입장을 수렴하고 다른 교통수단은 어떻게 보조하고 있는지 다각도로 검토 중”이라며 “내년에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면 법령 개정도 추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선영 기자 00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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