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등대로 본 해양문명사](4)수백년 간 해양무역 중심지로 군림한 '제노바'..지금은 '위용'만 간직

2018. 3. 16. 19:4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중세의 빛, 지중해의 길

한국인이 많이 찾는 이탈리아의 관광지는 역시 로마와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등이다. 또 이탈리아 북서쪽의 피사는 ‘피사의 사탑’ 덕분에 많은 이들이 찾는다. 그러나 강력한 해양도시였던 제노바에는 관심이 거의 없거나 덜하다.

■900여년을 버텨온 제노바의 랜드마크

이탈리아 제노바에 자리한 란테르나 등대는 900여년의 역사와 함께 중세 지중해의 위용을 상징한다.

역사적으로야 로마가 가장 중요하지만, 중세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의 베네치아와 북서쪽의 제노바는 용호상박의 기세로 해양 패권을 장악해왔다. 그러니 이들 도시에 오랜 등대가 없을 수 없다. 특히 제노바의 란테르나 등대(Faro di Genova, Lanterna di Genova)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주목받는다. 제노바 등대라고도 한다. 중세를 대표하는 등대로서 지금까지 작동하는 등대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지만, 900여년 세월이 흘렀어도 란테르나 등대는 제노바의 현역 랜드마크다.

란테르나 등대는 아쿠아리움과 해양박물관, 요트장 등이 모여 있는 제노바 항구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 국제 페리장이 있는 쪽에 위치한다. 한참을 걸어가면 등대가 보인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항만과 붙어 있어 주변 환경이 다소 복잡하다. 옛 사진을 보면 현재의 등대로 올라가는 길목이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매립되어 육지부에 등대가 솟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양박물관에 걸린 지도를 비롯해 제노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옛 지도에는 제노바시를 둥글게 둘러싼 만의 돌출된 바위산에 우뚝 솟은 란테르나 등대가 자주 눈에 띈다. 그렇다면 왜 지중해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 제노바에 가장 이른 시기에 등대가 들어섰을까?

■지중해 패권을 다투던 제노바

제노바 시내 멀리 란테르나 등대가 보인다.

란테르나 등대는 1128년 세워졌고, 1543년 증축됐다. 12세기에 등대가 처음 세워졌을 때 제노바의 모든 배는 등대의 불을 밝히기 위해 세금을 내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등대가 단순히 항로의 안전만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당연하다. 해적이나 외적의 침입을 경고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낮에는 깃발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제노바가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부터. 십자군전쟁이 시작되기 전,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왕조인 파티마 왕조와의 해전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10세기 말에는 북아프리카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튀니지의 술탄을 굴복시켜 지중해의 강자로 세력을 공고히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러한 제노바의 앞길을 가로막는 경쟁자가 있었으니, 바로 베네치아였다.

다행히 제노바에는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십자군전쟁이 시작되자 이미 안정된 무역로를 확보했던 베네치아는 대응에 골몰했지만, 제노바는 발 빠르게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베네치아에 돌아갈 수 있었던 많은 이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동방무역에서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거의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중세의 오랜 어둠과 침묵을 끝내는 움직임은 1100년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는 지중해무역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 같은 맹주 도시가 번창해 멀리 흑해까지 무역로를 넓혀갔다. 도시 간 각축이 심각할 정도로 전개됐으며 전쟁은 필연이었다. 먼 항로의 개발과 항구의 발달에 따라 안전한 항해를 위한 등대와 항해 장비의 도입은 필수였다. 많은 도시가 등대를 경쟁적으로 세웠는데, 이는 무역경쟁력을 통해서만 경제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리구리아 해안에 위치한 제노바는 함대를 구축해 지중해 서쪽에서 중요한 입지를 마련했다. 정복을 통해 비잔틴과 이슬람 땅에도 뿌리내릴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비잔틴 해양 세계에서 활발히 무역활동을 해온 제노바는 1277년부터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스칸디나비아 해안과의 무역 중심지인 잉글랜드와 플랑드르로 선박을 보내기 시작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시기를 ‘그린란드에서 베이징까지’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란테르나 등대는 이러한 배경에서 필연적으로 탄생했다.

지중해 경제가 절정에 이른 14세기에 최초의 자본가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초의 자본가는 상인이자 은행가인 이탈리아인이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광범위한 식민지와 교역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동방에서 향신료, 의약품, 염료, 비단을 비롯한 진귀한 상품을 수입했다. 이후 오스만제국의 부상으로 이탈리아 도시의 동방교역로가 차단되자, 제노바는 서지중해와 대서양을 통해 모직물, 설탕, 명반, 곡물, 염료, 향신료 등을 수입했다.

■콜럼버스의 삼촌이 지켰던 등대

15세기에 그려진 그림으로 등대와 함께 선박, 당시의 건축물 모습이 담겨 있다.

1992년은 제노바시에 의미 있는 해였다. 이곳에서 출생해 에스파냐로 건너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제노바 세계박람회 1992’는 ‘콜럼버스, 배와 바다’라는 주제로 제노바의 선원이었던 콜럼버스를 기념하는 비공식 박람회였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해에 ‘세비야 엑스포 1992’가 열렸다는 사실이다. 주제는 ‘발견의 시대’였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당도 500주년을 기념했다.

콜럼버스의 출신지인 제노바와 그의 무덤이 있는 세비야에서 같은 해에 세계박람회가 열렸다는 사실은 흥미 그 이상이다. 두 도시가 대항해와 관련해서 전략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449년 등대 보관 책임자 중 한 명이 콜럼버스의 삼촌인 안토니오 콜롬보였다는 사실도 흥미를 끈다. 그가 란테르나 등대의 등대지기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집안 전체가 바다 일에 깊게 관련돼 있었음을 알려준다. 제노바의 기운과 집안의 풍토 속에서 콜럼버스가 탐험가의 길로 나아갈 토양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구도심의 14세기 성벽에서 20여m 떨어진 언덕배기에 콜럼버스의 집이 세워져 있다. 콜럼버스는 이 집에서 1455년부터 1470년까지 살았다고 하며, 이후 포르투갈을 거쳐 에스파냐로 건너갔다. 작은 박물관으로 활용되는 이 작은 붉은 벽돌 건물은 1684년에 파괴됐던 것을 18세기에 재건축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생가가 남아 있고 제노바 세계박람회를 치른 항구의 아쿠아리움 앞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당시 탔던 산타마리아호를 재현해두었다.

제노바 해양박물관은 콜럼버스와 제노바 그리고 대항해에 관한 전시에 많은 할애를 하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이후 전개된 16세기 대항해시대의 개막에서 제노바는 상당한 역할을 수행한다. 무역이 대서양 세계로 확장되면서 지중해 해양 세계는 쇠퇴, 몰락했을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필리프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에서 여러 가지 구체적 증거들을 들어 반박했다. 16세기 지중해는 서쪽의 대서양에 대해 분명한 특권을 누렸으며, 대서양 무역의 번영은 지중해에도 이득이 됐다는 것이다.

지중해 세계는 대서양 무역에 적극 참여했으며, 제노바는 그 주역 중 하나였다. 콜럼버스가 제노바 항구에서 성장한 것 그리고 이베리아반도로 건너가 대항해의 선봉이 된 것은 결코 한 개인의 우연한 결단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16세기 지중해는 결코 경시된 빈곤한 세계가 아니었고,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로 몰락하지도 않았다. 뉴펀들랜드의 대구, 브라질의 설탕과 염료용 나무,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금과 은, 희망봉을 돌아온 인도양의 후추, 향신료, 진주, 비단 등 모든 외국의 부를 얻기 위한 새로운 무역에 참여했다.

15~16세기 제노바는 본질적으로 지중해 연안에 건설해둔 상인 집단의 식민지로 구성됐다. 제노바인은 비잔틴제국의 가장자리, 심지어 북아프리카 해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민지를 경영했으며, 이들은 해외 상관이었다. 15세기 말 동방에서 제국의 권한을 다수 상실하자, 이를 에스파냐의 세비야, 리스본, 메디나델캄포, 안트베르펜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보상받았다. 서쪽으로 진출한 제노바는 에스파냐가 아메리카로 진출하던 시기에 에스파냐의 재정과 금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노바의 식민지는 사실 ‘은행가의 식민지’였으며, 제노바는 동방에서의 상업적 패배를 서방에서 금융의 승리로 보상받았다.

제노바는 환어음 기술을 통해 당대 에스파냐의 맹주 도시 세비야로부터 대서양을 건너가는 지불망을 조직할 수 있었으며, 이는 실로 거대한 거래였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대항해 배경에 제노바의 상업자본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거대한 등대가 제노바 항구에 세워진 이유는 이처럼 해양문명사적으로 볼 때 충분한 일이었다.

■해양도시의 천년 장기 지속의 증거

19세기의 제노바가 배경인 일본 애니메이션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마르코가 아르헨티나로 돈 벌러 간 엄마를 그리며 앉아 있던 곳, 그곳이 바로 란테르나 등대다.

제노바시는 도심을 전면적으로 손질해 콜럼버스를 기리는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시 재생을 시도했다. 1992년 아쿠아리움이 세워졌고, 고색창연한 항구도시의 카페, 숍 등이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제노바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는 이 고색창연한 항구 도시를 새롭게 개조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도시는 재생됐으며, 등대는 새롭게 부각됐다.

등대박물관과 산책길도 마련됐다. 페리보트 터미널인 트라게티에서 출발하면 란테르나 등대와 박물관에 당도할 수 있다. 부둣가를 바라보면서 산책을 하면 항구와 항구의 흥미로운 모습을 즐길 수 있다. 방문객은 172개의 층계를 올라가 해면으로부터 76m 높이의 테라스에 당도하며, 이곳에서 항구와 옛 도시의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전경을 즐길 수 있다.

제노바 출신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당도한 이듬해인 1493년 독일인이 그린 지도를 보면, 등대 두 개가 좌우로 제노바항을 지키고 있다. 이미 당시에 방파제가 마련되어 접안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14세기의 성채, 성당, 밀집한 고층 건축물도 보인다. 왼쪽의 2단으로 된 란테르나 등대는 지금도 기능하는 현역 등대로 남아 있고, 오른쪽 등대는 사라졌다.

등대 정면에는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 모양의 제노바 상징 문양이 박혀 있다. 1405년 등대를 정비했던 제사장이 물고기와 황금 십자가를 넣어 가톨릭의 상징으로 사용한 데서 유래한다. 제노바가 해상 강국으로서 존엄을 떨칠 때부터 사용해오던 문양이다. 제노바 사람은 그 문양을 천년 세월 등대에 각인하면서 자신들의 지난 영화를 만끽하는 중이다.

▶필자 주강현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생태학, 민속학, 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독도강치 멸종사> <환동해문명사> <적도의 침묵>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