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50>이두식 '축제']강렬한 오방색의 변주..화폭위 신명나는 춤판
청적황백흑 다섯가지 원색
색조·필치서 기운·흥 일렁여
설계도 없이 직관 따라 작업
로마 지하철역 벽화 그리기도

여기 이 그림, 이두식(1947~2013)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이 꼭 왁자지껄한 풍물패와 카니발 행진에 휩쓸린 듯했다. 강렬한 색채 때문일까, 그린 건지 뿌린 건지 휘젓고 찍은 것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그 형태 때문일까. 그림 앞에서 화들짝 놀랐던가 어안이 벙벙했던가 아무튼 그런 충격을 경험했다. ‘축제’이라는 제목을 보고는 또 한번 놀랐다. 우리네 농악놀이도, 서양의 카니발도 모두가 들썩이는 잔치이며 축제 아닌가. 작가 이두식은 그림 아래쪽에 영문으로 서명하고 작품명은 ‘Festival’이라 적었다. 우리말 제목으로는 ‘축제’ 외에도 ‘잔칫날’ 또는 ‘혼례’ 등으로 불렸다.


타고난 손재주가 워낙 좋았으니 그림 공부를 따로 한 적 없음에도 당시 최고였던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그때 처음 만난 첫사랑 소녀 손혜경(1947~2002)과 결혼까지 했으니 행복한 사내였다. 스물여섯에 결혼해 가난한 신혼을 보낸 일화는 꽤 유명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달아 여의던 그 해 돌도 안된 큰아들 하린이 급성 폐렴에 걸렸다.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했던 그가 수출용 상업그림을 그려달라는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화가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이발소 그림’을 그린 것이다. 꼬박 5년을 매일 출근해 온종일 그림만 그려 나중에 난시가 됐지만 그 덕에 아들 둘을 키워냈다. 이두식은 부끄러울 수 있는 ‘이발소 화가’ 시절을 얘기하면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화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서 빛을 발한다. 그림은 공상 과학이 아니다”면서 툭툭 털곤 했다.
이두식은 대학 졸업 무렵인 1968년에 신상회전(新象會展)의 최고상 수상으로 본격 화단에 데뷔했다. 신상회는 당시 재야작가 중심의 단체로서 나름 참신한 신인 발굴에 주력하고 있었다. 전후 세대의 비극적 분위기 와중에 이두식은 칙칙하고 무겁지도 우울하거나 괴롭지도 않았다. 그가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할 수만은 없으나 결코 뒤지지는 않았으며 의식적으로 자신의 속도를 조절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70년대는 개념미술이 대두했던 때이며 ‘단색화’ 등으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즘적인 추상미술이 거셌다. 유행이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두식은 동참하지 않았다. ‘생의 기원(起原)’을 주제로 그는 연필드로잉과 수채화를 주로 그렸다.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 세포인 듯한 형상에서부터 과감한 생략을 넘나들며 여성의 인체와 식물 형태를 포착해 보여준 작품들이다. 개념미술의 급부상으로 ‘그리지 않는 시대’가 열린 그때 이두식은 오히려 손의 힘에 집중했다. 그는 약속 시간을 기다리며 휴지에 볼펜으로 그린 초상화 한 장으로 탄성을 자아내는 묘사력의 대가였다. 피카소가 잘했다는 선 몇개로 대상의 특질을 기막히게 포착해 내는 힘을, 이두식 또한 갖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분석적인 태도와 감성적인 태도. 분석적인 태도는 반드시 에스키스를 한다.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보통 미리 설계도를 그려보고 옮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린다. 직관에 따라 즉시 감정을 표현해낸다.”
이두식은 스스로도 자신의 작업방식이 즉흥적이라고 했다. 분위기를 잡은 후 극치의 순간을 향해 치닫는 성행위에 비유하기도 했다. 작가가 직설적이면 감상자 또한 분석하고 따질 필요없이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판이 벌어지는 셈이다. 이두식의 그림은 꿈틀대는 생명체 같다. 꼭 형태 때문은 아니다. 색조와 필치에서 기운과 흥이 일렁인다. 강렬한 색채는 눈을 자극하고 그 에너지가 감성을 일깨운다. 뭘 어떻게 그렸느냐가 아니라 그저 시각적인 체험으로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직관과 감성의 표현이 누구나 딱 보고 확 느끼는 그림을 만들었다. 쉽지 않은 추상미술임에도 그의 작품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스스로 “고릴라 닮았다”며 못생겼다고 자평하는 그의 주변에 친구가 끊이지 않듯 말이다.
이두식의 그림은 로마 지하철역에서 벽화로도 만날 수 있다. 1996년 로마시는 우중충한 지하철 역내 분위기를 벽화로 바꾸고자 했다. 로마시내 11개 지하철역의 벽화제작을 위해 세계 9개국에서 27명의 작가를 선정하는 프로젝트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두식이 선정됐다. 하루 평균 10만 명의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로마 도심 포플로 광장 부근의 ‘플라미니오역’을 그가 맡았다. 가로 14m, 세로 2m의 대형 모자이크 벽화는 지금도 ‘안녕’하다.
이두식은 1984년부터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학장까지 지냈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예술가이면서 미술행정에도 밝았다. 다재다능한 멋쟁이였다. 그럼에도 매일 새벽 그림 그리는 일을 거른 적은 없었다. 1만점을 목표로 다작(多作)했다. 2013년 홍익대 현대미술관(HOMA)에서 열린 정년퇴임 기념전에 혼신의 힘을 쏟으며 “이것만 끝내놓고 좀 쉴거야”하던 그가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개막식 후 밤늦게 돌아온 새벽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지난 22일에 5주기 추모미사가 열렸다. 화가는 가고 없어도 그가 기운 불어넣은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 그림은 여전히 힘이 넘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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