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민간건물보다 높게 지으려던..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亞최고층'
■ 안창모의 도시 건축으로 보는 서울 - 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1966년 준공된 舊조흥銀 본점
18층 66.7m로 서울 최고층
정부, 설계공모로 3점 선정 뒤
나상진과 청사설계 계약했지만
뚜렷한 이유없이 美회사로 변경
건축계 반발 속 1970년에 완공
경복궁과 불과 70m거리에 건축
삶 담아내는 지속가능성 무시한
시대의 산물이자 역사의 목격자
높이 짓는 것이 최고·최선의 가치였던 시절이 있었다. 높은 건물이 많아질수록 나라는 발전하고 잘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건물은 국민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고 믿었고, 높은 건물을 통해 국민은 자부심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높은 건물이 역사도시 서울을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때는 몰랐다. 고층건물로 인해 겪게 될 서울의 고통을…. 그래서 서울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지도자가 됐다. 고층건물에 대한 욕망은 도시의 경계와 나라의 경계를 넘어섰고, 그 결과는 아시아 최고·세계 최고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비록 세계 최고에 도전하기엔 역부족이지만 아시아 최고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싹트던 시절이었다.
벌써 반세기 전의 이야기가 됐지만,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의욕적으로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을 추진하던 시점에 서울에는 승강기를 이용하는 고층건물이 빠르게 증가했다. 그리고 고층건물이 지어질 때마다 머지않아 서울이 초고층건물로 가득 찬 맨해튼이 될 것 같은 기사가 신문의 지면을 메우곤 했다.
1966년에 준공된 조흥은행 본점(현 신한은행 광교대기업금융센터)이 좋은 예다. 1966년 12월 복개된 청계천과 남대문로가 만나는 모퉁이에 18층 높이의 ‘구조흥은행 본점’이 세워졌다. 이 건물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기자는 ‘건물 높이만도 66.7m’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도심에서 20m가 채 안 되는 5층 정도의 건물이 고층건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는데, 느닷없이 18층 높이의 건물이 지어졌으니 가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당시 한 경제신문은 ‘구조흥은행 본점’이 우리나라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빌딩으로 등극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 건물과 미국·캐나다·일본·독일·영국·이탈리아·스웨덴 등 8개국의 고층건물 높이를 비교하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 고층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이는 기업체의 욕심이나 일반인의 시선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정부도 경쟁 대열에 나섰기 때문이다. 정부종합청사를 통해서…. 그런데 정부의 욕심이 과했던 탓일까? 정부종합청사(현 정부서울청사)는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건축계에 시대적 화두를 제공했다.
1966년 12월 23일에 실시된 정부종합청사 설계공모는 2차례에 걸친 심사를 통해 1967년 3월 17일에 당선안 없이 3점의 가작이 선정됐다. 총무처는 응모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여기까지는 매우 모범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계약이었다. 가작 1위는 종합건축이었지만, 정부는 가작 3위였던 나상진과 설계계약을 맺었다. 나상진의 설계안은 1967년 7월 확정됐다. 확정된 정부종합청사는 16층에 최고높이 70m였다. 당선안은 14층이었지만 발주처의 요구에 의해 16층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최종 설계안이 발표된 지 오래지 않아 정부는 미군 용역 경험이 많았던 미국 회사 PA&E에 수의계약으로 설계를 발주했다. 나상진의 안은 기초공법이 불안하고 실내에 기둥이 있으며, 쌍복도 평면이 혼잡하고 공법을 바꾸면 공기 단축과 공사비 절감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부에서 나상진 설계안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정부가 내세운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곧바로 건축가와 건축계는 반박했다. 그러나 정부는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나상진과 계약했던 1600만 원의 7배 많은 1억600여만 원으로 미국 회사에 수의계약으로 다시 설계를 맡겼다. 반대 성명과 공청회 성토 등 거센 반발이 한창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PA&E의 설계 변경에 따라 일방적으로 공사를 강행했다.
사건의 파장은 컸다. 대한건축사협회의 정부종합청사건립대책위원회에서는 외국사와의 수의계약 문제를 지적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어서 총무처의 고문 중 무임소장관이었던 김윤기, 구조전문가 최종완, 홍익대 교수 정인국을 제외한 서울공대 교수 김희춘, 한양공대 교수 홍붕의, 연세대 교수 김정수, 서울공대 교수 윤장섭, 대한건축사협회회장 김재철, 설계자 나상진이 1968년 2월 20일 고문직을 사퇴하면서 문제가 일파만파로 커졌다.
당시 6명의 건축가는 “정부종합청사가 유사 이래 초유의 대건물로 후세에 남길 우리 건축문화의 결정체가 될 것이라는 인식하에 ‘자문 도중에 야기된 제반 사항에 비춰 발주처가 의도하는 건물의 평면, 입면 및 구조계획 등이 불합리함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 ‘현행법을 무시하는 외국사에 대한 설계용역을 중단하고 국내 건축가에게 재설계를 맡기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점’을 들어 고문직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총무처가 외국 용역회사의 제의에 따라 원설계를 임의로 변조 시공한 점이 건축계는 물론 문화예술 전반에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부는 외국사에 재설계를 의뢰했고, 지금의 정부종합청사가 지어졌다. 결과적으로 정부종합청사는 PA&E의 설계로 지상 19층 최고높이 82.8m로 지어졌다.
이로써 정부종합청사는 당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구조흥은행 본점을 능가했으며, 당시 일본에서 가장 높았던 요코하마(橫濱)의 호텔엠파이어(77.7m)보다 5m 이상 높았다. 이로써 잠시나마 정부종합청사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 최고 높이의 건물로 자리매김했다. 잠시 동안 1위였던 것은 정부종합청사가 완성된 직후인 1971년에 31층 110m 높이의 3·1빌딩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건물은 정부의 의지대로 지어졌지만, 정부가 건축가와 다투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건축계의 정부에 대한 반발과 불신 그리고 정부의 국내 건축계에 대한 불신이 구조화되는 시작점이 됐다. 당시 정부는 나상진과 설계계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와 비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국내 회사 설계비의 7배 이상 비싼 거액으로 미국 설계사무소와 설계계약을 다시 체결함으로써 저작권을 침해했을 뿐 아니라, 외화를 낭비하고 국내 건축사 면허가 없는 미국 회사에 설계를 맡김으로써 건축사법을 위반했다.
정부가 지적한 나상진 안의 3가지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미국 회사로 설계자를 바꾸기 위한 핑계 만들기에 가까웠다. 당시 국내 건설회사는 20층 안팎의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다. 17층 높이의 자유센터(1964)와 18층 높이의 구조흥은행 본점이 국내 기술진에 의해 설계·시공됐고, 또 다른 18층 건물인 MBC TV방송국(현 경향신문사)이 1969년에 완공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은 정부가 왜 무리해서 미국 회사에 설계를 맡겼을까 하는 점이다.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첫째는 이전까지 가장 높은 건물이 18층이었다는 점에서 민간 건물보다 높게 지어야 한다는 부담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에 매진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의욕적으로 건설하는 정부청사가 민간 건물보다 규모와 높이 그리고 설비 면에서 뛰어나야 한다는 정부의 부담이 미국 회사에 의한 설계 변경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최고 건물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국내 건축계와 사회적 파장에도 불구하고 외국사에 재설계를 의뢰한 주된 이유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시 국내 건축계가 18층 높이의 건물을 설계·시공한 경험이 있어 19층 높이의 건물을 설계·시공할 능력은 충분히 입증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이와 설비가 중요했다면 정부가 건축가에게 추가로 설계변경을 요구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따라서 건축 외적으로 미국 회사에 용역을 맡겨야 하는 또 다른 상황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쉽게 밝혀질 수 없는 정부종합청사의 건설과정이지만, 고도 성장을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도시 경관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세워진 당대 최고·최대 규모였던 정부종합청사는 오늘날 새로운 문제에 당면해 있다. 이 건물이 경복궁 앞에 존재해서 야기된 문제다. 경복궁은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역사도시 서울의 상징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국가사적 117호로 지정된 경복궁이 불과 70m도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80m를 넘는 건물이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발전’이 ‘역사’보다 우위에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발전’보다는 ‘지속 가능한 사회’ ‘지속 가능한 도시’가 최고의 가치가 됐고, 그 중심에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촛불시위를 바탕으로 출범한 현 정부는 청와대를 시민에게 돌려주고, 광화문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겠다고 약속해 이를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한두 명의 빼어난 지도자가 전체를 이끌어 가기보다 집단적 지성에 의한 합의 도출을 시도할 경우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곳이 광화문 앞, 세종대로다.
조선의 중심이자 상징이었던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4·19혁명과 6월 항쟁 그리고 촛불시위를 거치며 근현대사의 새로운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광화문과 육조거리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작업은 과거로의 회귀나 옛 건물의 물리적 복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담아내고, 우리의 삶이 진정성 있게 이웃 그리고 후속 세대에 공유될 수 있는 도시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종합청사는 시대의 산물이자 목격자로서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높이는 너무 높다. (문화일보 2018년 1월 24일자 28면 12 회 참조)
안창모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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