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 - [명사]역량이나 능력을 모아서 다시 일어섬.
'재기'의 사전적 의미이다.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재기에 도전하고 또다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다. 재기라는 단어는 참 드라마틱하다. 잘 달리다가 주춤하게 된 사람 중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주춤했던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결과이기에 재기라는 단어는 늘 특별하게 다가온다.
나는 축구 해설이 본업이지만 동시에 독립구단 TNT FC의 단장도 맡고 있다. 이 팀은 프로에서 방출되거나 프로 진출에 실패한 선수들이 재도전 할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제공한다. 지난 2015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로 인해 지금까지 모두 30 여명의 선수들이 국내외 프로 무대로 재기했다. 그러다보니 국내 축구계도 TNT FC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알게되었다. 프로축구연맹은 지난 12월 실무회의에서 TNT FC의 R리그 참가에 대해 논의했고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은 이미 지난 봄 TNT FC와 협약을 맺어 다양한 지원을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축구 산업과 관련된 각종 업체의 다양한 지원을 통해 팀 환경은 해마다 나아지고 있다. 환경이 나아질수록 당연히 팀 또한 발전해야 한다. 먼저 주어진 환경에서 만들수 있는 최선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선수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그것이 스텝이 해야 할 일이다.


#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책의 변화는 현장에 혼란을 준다
팀 특성상 연말이되면 선수단이 대폭 물갈이 된다. 해마다 여름(7월)과 겨울(12~2월), 두 번의 이적기간이 있는데 주로 즉시 전력감의 선수가 오가는 여름보다는 프로팀 스쿼드 변화의 폭이 큰 겨울에 선수들은 더 많은 기회를 제공 받는다. TNT FC는 프로와 비슷한 30~40명 규모로 운영되는데 현재 2018년 선수단 구성이 90% 완료된 시점에서 작년부터 활동한 선수의 비율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80%는 어떻게 된 것일까? 지난 2년의 기록을 보면 해마다 평균 10명의 선수가 프로팀 재기에 성공하고, 10명~15명은 군 복무 문제 및 생계 문제로 K3리그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축구를 그만두거나 현역으로 군에 입대한다. 재기를 위해 모인 선수들이지만 이곳에서도 당연히 경쟁은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올해 TNT FC에 입단한 30여 명의 선수 중 70%가 23살 이하의 비교적 어린 선수라는 점이다. 재기 목적의 독립구단으로 팀을 꾸린 지난 4년 중 이번 시즌 선수단의 평균 연령이 가장 낮은데 그 원인은 바로 한국 축구 시스템에 있었다.
대학축구 U리그는 지난해 'C제로룰'로 행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C제로룰'은 대학 운동부 학생이 직전 두 학기 평균 학점을 C(2.0)이상 취득해야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규정으로 2015년 한국 대학스포츠 총장협의회에서 신설하여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적용했다.
'공부하는 운동 선수'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이상적이다. 하지만 현장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구체적인 대안마저 부족한 상황에서 실행한다면 많은 혼란을 감수해야 한다. 많은 대학팀들이 훈련 시간과 장소 문제를 겪고 있고 중도 포기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는 대학 축구의 경기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프로축구 K리그의 22세 이하 선수 의무 출전 조항(2019시즌부터 1,2부 모두 엔트리 등록 2명 / 선발출전 1명)으로 대학 축구계는 더욱 다급해진 상황이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정책,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나쁜 정책이 될 수 있다. 모든 정책의 결과는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건, 정책이 바뀌는 시기에 그 테두리 안에 있는 당사자들은 늘 혼란을 겪는다.
그동안 한국 축구에서 대학 카테고리는 프로의 직전 단계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든 그 역할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변화에 따른 체감은 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빠르게 느낀다. 다양한 이유로 대학 무대에서 기회를 잡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수들, 대학 등록금에 대한 부담이 있는 선수들, 22세 이하 규정 때문에 프로에 일찍 입문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방출된 선수들이 이번 시즌 TNT FC에 입단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절박한 선택을 했다. TNT FC는 독립구단이기에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팀이 아니다. 즉 TNT FC 선수들은 현재 규정상 무소속 선수인 것이다. 행정적으로 소속이 없다는 것은 리스크를 동반한다. 그럼에도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 하부리그, 순환구조, 동남아 시장
현재 한국에는 K리그, 내셔널리그, K3리그, U리그까지 4개의 성인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지난 2008년 출범한 K3리그가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 23개팀으로 자체 디비전을 진행하고, 올해부터 부분적인 연봉제를 도입하지만 아직까지는 세미 프로의 성격이 짙다. 뿐만 아니라 상하위팀 사이의 경기력과 구단 행정력 역시 차이가 매우 큰 것도 문제다. 상위권 팀의 환경은 비교적 괜찮은 편이다. 훈련비 명목으로 평균 월 50만원이 지급되고 30만~60만원의 경기 수당을 추가로 받는다. 상위권팀 선수들의 경우 평균 월 150만~200만원의 급여를 지급 받을수 있다. K3리그 챔피언 포천시민구단이 해마다 FA컵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박정수 같은 주축 선수들이 프로 무대(강원FC)로 진출하는 것처럼 K3리그 상위권팀은 이미 경쟁력있는 환경과 경기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지 못한 팀에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K3리그 신규 가입팀의 가입 조건을 해마다 향상시키고 있다. 현재는 가입비(5,000만원)의 차이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기준은 이미 K리그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신규 가입을 위한 조건이 강화되어야 팀과 리그가 건강해진다. 팀을 창단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K3리그에서 어려움에 처한 팀들은 대부분 리그 초반인 2000년대 후반에 가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자체의 지원은 없고 자생력 또한 없다. 당연히 운영은 어렵고 팀은 건강하지 않다. 하부리그팀의 역할을 하나가 순환 구조를 만들어서 상위리그에 선수를 진출시키는 것이라면 이런 환경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프로에서 재계약에 실패한 선수들이 우선적으로 눈을 돌리는 곳은 동남아 시장이다. 태국, 말레이시아 등이 대표적이지만 이들 역시 최근 눈높이가 높아지며 선수의 직전 소속팀이 K리그, 심지어 1부리그여야 입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물론 태국 3부리그나 캄보디아 등 보다 눈높이를 낮추면 선택의 폭은 넓어지나 대부분 열악한 환경에서 K3리그 상위 구단보다 적은 금액을 수용해야 한다. 여기에 일부 대리인(에이전트)들은 선수가 동남아 쪽에 정보가 부족한 것을 이용하여 선수에게 과다한 테스트 비용을 청구하거나, 선수 선발 예정이 없는 팀에 선수를 테스트 보내거나, FIFA에서 권장한 3% 의 수수료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선수에게 설명 혹은 협의 없이 챙기는 등 비합리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분 때문에 K리그에서 재계약에 실패한 선수 중 상당수는 국내 하부리그 입단을 우선 순위에 두지 않는다. 자신의 K리그 경력과 몸 상태를 유지한 상태로, 다음 이적 기간을 통해 동남아 리그 진출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 가끔은 이정근 같은 기적이 필요하다
물론 태국이 대표적인 동남아리그 역시 입단이 쉽지 않다. 이용래(치앙라이), 이호(무앙통), 유준수(부리람), 이원재(나콘라차시마), 강수일(랏차부리) 등 K리그에서 꾸준히 활약한 선수들은 K리그 시절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무대를 옮겼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국내 프로경력 없이 곧바로 태국 하부리그에 진출한 권대희(프라추압FC)처럼 현실적인 선택이 빛나는 경우도 있다. 어느덧 태국 리그 5년차에 접어드는 권대희는 지난 시즌 팀의 주축으로 활동했고 소속팀 프라추압FC는 승격을 통해 올해 태국 1부리그에서 활동하게 된다.

서두에 '재기'와 '드라마틱'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는데 여기에 가장 적합한 선수가 있다. 얼마전 한국인 미드필더 이정근이 태국 1부리그 폴리스 테로에 억대연봉을 받고 입단을 확정했다. 축구팬들에게는 생소한 이름, 문경대를 졸업하고 2016년 부산 아이파크에 공개 테스트를 통해 입단하여 13경기에 출전하며 가능성을 보였지만 재계약에 실패했다. 이정근은 2017년 한해동안 TNT FC에서 활동하며 이번 겨울 각종 프로 테스트에 참가했지만 선택을 받지 못했었다.
1년 동안 지켜본 결과, 이 선수는 프로 무대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테스트에서 실패한 경우는 공개 테스트가 갖는 변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국내 프로팀 공개 테스트는 1차 서류, 2차~3차 실기로 이어지고 여기서 선발된 최종 인원 4~5명을 동계 훈련에 포함시켜 마지막으로 관찰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우리 팀 선수 중에는 동계 훈련까지 합류했다가 탈락하는 흔치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2차~3차 사이에 탈락한다. 그런데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합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선수가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공개 테스트는 보통 주어진 시간이 짧고 처음 발을 맞춰보는 선수들끼리 경기를 하기에 팀 플레이를 하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개 테스트 경기에서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선수는 폭발력 있는 윙어나 피지컬이 좋은 공격수, 혹은 제공권이 특출난 센터백이다. 하지만 미드필더 포지션은 정말 잘 관찰해야 '진짜'를 찾을수 있다. 테스트 경기 때 같은 편 센터백이 롱킥을 선호는 스타일이라면, 혹은 같은 편 2선 공격 자원의 볼 키핑 능력이 취약하다면 그 미드필더는 주어진 시간 동안 존재감을 드러내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정근이 바로 그랬다. 부스케츠 같이 공을 잘 만지고 경기에 대한 이해도가 우수한 선수지만 공개 테스트에서는 할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기회는 우연한 곳에서 만들어졌다. TNT FC의 2군 감독인세바스티안 누만 (Sebastien Neumann) 에게 그가 과거 UEFA 지도자 강습회 중 알게된 한 대리인이 공을 잘 다루는 한국인 수비형 미드필더를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다. 누만 감독은 곧바로 이정근의 경기영상과 프로필을 보냈고 폴리스 테로 구단은 이틀만에 계약서와 비행기표를 보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누만 감독의 친구인 그 대리인은 내가 본 어떤 대리인보다 신속하고 깔끔하게 일을 진행했다.
폴리스 테로가 1부리그 팀이기에 계약 조건 역시 괜찮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어 선수 본인도 약간은 어리둥절한 느낌이지만 빠르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동안 공백기를 거친 선수들이 다시 프로 무대로 올라가는 사례를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다. 그런데 재기했다는 기쁨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한 것 같다. 프로에 가는 것 보다 가서 생존하는 것이 더 힘들다. 이정근 같은 선수들은 이제부터 더 난이도 높은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다만, 한 차례 그 경쟁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기에 어렵게 주어진 두번째 기회에 보다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것이다.

독립구단을 운영하는 것, 그리고 그 곳에 속하여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정근 선수 같은 일이 있기에 구성원들은 용기와 배움을 얻으며 축구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는 잉글랜드에도 있다. 하부리그 출신 '신데렐라' 제이미 바디는 3년 전 자신의 이름을 딴 'V9 아카데미'를 열었다. 자신이 뛰었던 아마추어 '논리그(Non league)' 출신의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겠다는 취지다. V9 아카데미를 통해 아마추어 선수들은 바디와 같이 프로 무대에 도전할 기회를 잡는다. 이번 시즌 리그2(4부리그) 스티브니지와 계약한 대니 뉴튼이 V9 아카데미의 첫번째 작품이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 논리그에서 선수의 꿈을 키운 뉴튼은 자신의 프로 첫 시즌에서 현재 9골을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을 기록 중이다.

한국 축구의 시스템은 아직 미완성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고 그 속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것처럼 변화는 현장에서 가장 빠르게 느낀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할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실행하면 아주 가끔 이런 기적도 생기는 것 같다.
벌써 1월도 끝나간다. 이적 시장도 마무리 되어가고 모든 팀들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선수단 구성을 사실상 완료했다. 새로운 소속팀을 찾지 못한 선수들은 다가오는 여름까지 외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은 해체된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를 이끌던 김성근 감독이 했던 말이 있다.
"프로에 가는 꿈을 꿔라. 하지만 여기에 머무르더라도 전력을 다해라. 나중에 인생을 한참 지나고 보면, 절실한 상황에서 전력을 다했을 때가 그리울 것이다. 너희들은 바로 지금 그 순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