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펫 연주가 이주한 인터뷰①]'서른즈음에' 故 김광석과의 인연

이지석 2018. 1. 23.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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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트럼펫 연주가 이주한은 가요계의 ‘황금기’라 불리는 90년대에 약 10년에 걸쳐 최정상급 세션맨으로 활약했다. 색소폰에 이정식이 있었다면 트럼펫엔 그가 있었다. 故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카니발의 ‘거위의 꿈’, 이소라의 ‘난 행복해’ 등 수많은 명곡에서 로맨틱한 연주를 선보였다.

90년대 가요계의 ‘산증인’인 그는 특히 故김광석과는 인척관계이기도 했다. 그는 서른이 되기 한해 전이었던 1994년 故 김광석의 4집 앨범 수록곡 ‘서른 즈음에’에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어떻게 음악을 시작했나.
외교관이었던 아버님을 따라 어릴 때부터 일본, 버마(현 미얀마), 이란, 수리남, 미국 뉴욕과 시애틀에서 살았다. 트럼펫은 12세 때 수리남에서 처음 익혔다. 당시 스무살 형들과 밴드를 결성했었다. 처음엔 디스코, 훵키 등을 연주하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재즈에 빠졌다.

-90년대 가요 주요 앨범의 크레딧에서 ‘트럼펫 이주한’을 찾지 않는게 더 힘들어 보인다.
한 200~300곡 정도에 참가했을까. 사실 400~500곡이 될 수도 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외국에 살다가 92년 군 입대를 위해 한국에 들어와 윤상의 앨범에 참여한 게 시작이었다. 윤상은 워낙 훌륭한 프로듀서인데, 음악에 있어서는 까다롭다. 그가 나를 거의 울게 했다.(웃음)

3시간 반 걸려서 8마디를 녹음했는데 나중에 윤상이 4마디 정도를 편집해서 사용했다. 그때까지 녹음을 해 본 적도, 세션으로 참여해 본적도 없었다. 지금도 내가 트럼펫을 잘 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웃음) 윤상은 훗날 내 앨범에 곡도 주고, 공연이나 음반 등으로 교류했다. 프로 뮤지션으로는 윤상이 나보다 선배인데 내 음악 스타일을 이해해주고 존중해줬다.

-트럼펫 연주가로참여한 노래 중 故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유명하다.
군대 제대후 가장 처음 참여한 작품은 강수지의 앨범에 참여했다. MBC ‘수요예술무대’에 출연하면서 아는 분이 많아졌다. 노영심을 통해 강승원 음악 감독을 알게 됐고, 강 감독이 음악 감독을 맡은 KBS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1994년) 마지막회에 출연했다.

강 감독의 주선으로 ‘작은 음악회’ 출연 한달 후 쯤 故김광석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알고보니 김광석과는 인척관계였다. 혈연 관계는 아니지만 이모부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촌수로 따지면 5~6촌쯤 되더라.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끝까지 반말을 하지 않았다. 내겐 조언을 많이 해줬다. ‘주한 씨가 하는 재즈는 힘든 음악이고, 우리나라에서 받아줄지 모르겠다. 주한 씨를 다른 사람에게 많이 소개해 주고 싶다’고 걱정해주셨다. 자주 보진 않았지만 인간성이 너무 좋은 ‘나이스 가이’였다. 순수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한국말이 굉장히 서툴 때였는데 늘 내 걱정을 해줬다. 돌아가시기 2주전 만나 마지막으로 밥을 먹었다. 마지막 만났을 때도 나를 계속 걱정해줬다.

‘서른즈음에’가 수록된 앨범에는 그 노래 뿐 아니라 서너곡에 참여했다. 그 노래를 만든 강승원 감독이 슬프게 트럼펫을 불어서 감정을 집어넣어달라고 했었다. 내가 그렇게 슬프게 분지 몰랐던 데 나중에 들으니 슬프더라. 김광석이 노래를 부른 스타일도 슬펐다.

-가요계에서 트럼펫 세션으로 참여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한국에 들어온 초기 시절이라 늘 전쟁터 같은 느낌을 받았다. 녹음실에 가면 밖에 프로듀서. 작곡자 등이 앉아서 한국말을 하는데 그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한국말이 신통치 않으니 많이 답답해 했다. 세션하면서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다. 어려운 단어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짜증내는 이도 많았다.(웃음) 돈은 벌어야 하니 거기 있긴 한데 땀은 나고. 그래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그때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겸손하게 말하시지만 가요계 최정상급 세션맨으로 명성을 떨쳤다. 故김광석 외에 어떤 뮤지션들과 교류했다.
故 김광석과 비슷한 스타일의 뮤지션으로는 안치환, 동물원과 작업을 했다. 카니발(김동률, 이적)의 ‘거위의 꿈’에 참여했고, 정재형, 박미경, 조성모, 박정현, 서영은도 기억난다. 흑인 음악쪽으로는 CB매스나 김진표, 아소토 유니온 등과 함께 했다. 이문세, 이승철, 이승환과도 했다.

김현철과 함께 할 때 화려한 브라스 세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김현철이 만든 이소라의 ‘난 행복해’에도 참여했는데, 당시 그 노래는 밖에 나가면 안나오는데가 없어서 기분이 좋았다. 프로듀서 김현철과 작업하는 건 편했다. 까다롭지 않은 스타일이다.

-존경하는 국내 뮤지션은.
65년생 동갑내기 친구인 이승환이다. 얼마전 함께 환갑준비하자고 문자 메시지가 왔더라.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진짜 모든 면에서 프로패셔널하다.

무대에 섰을 때 관객에게 멋진 쇼를 보여주겠다는 마인드가 대단하다. 팬 관리부터 모든 활동이 체계적으로 시스템화 돼 있다. 모든 디테일에 신경 쓰면서도 끊임 없이 발전하는 음악을 보여준다. 요즘 어린 친구들, 시대와 소통하며 호흡하려 한다. 최근 3~4년간 꾸준히 홍대 씬에서도 활동중인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90년대 국내 재즈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93년부터 2001년 정도까진 일주일에 4차례 국내 여러 재즈 클럽에서 공연했다. 이후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 클럽에서 선보일 수 있는 장르와 다소 멀어져 클럽 공연을 하지 않게 됐다.

사실 90년대 우리나라엔 재즈가 없었다. 버클리 음대 등에서 속속 유학을 마친 뮤지션들이 들어왔지만 아직 대학에 실용음악과가 많지 않았고, 재즈를 들을 매체도 별로 없었다. 몇몇 드라마, 케니 지 덕분에 반짝 인기를 끌었고, ‘재즈’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긴 했지만 일반인들에게 와닿는 음악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커피숍에서 재즈가 나오면 사람들이 꺼달라고 했다. 98~99년 후원을 받아 울진 재즈페스티발 운영에 참여했는데 적자가 나기도 했다. 내가 발표한 ‘10+1’ 앨범도 적자가 났다. 영어를 가르쳐 번 1000만원으로 제작했는데 400만원을 잃었다.(웃음)

monami153@sportsseoul.com

사진 | 라우드피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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