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 낳은 '이산 문화재'..간절해지는 남북한 문화재 교류
[경향신문]
도재기의 천년 향기
2-분단의 상처, 남북 ‘이산 문화재’
“언제쯤이나 제대로 볼 수있으려나…. 유물이든 유적이든 사진 좀 많이 찍어와요, 발굴조사하는 현장도 좋고….”
1998년 10월, 북한 방문을 앞둔 필자에게 문화유산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사진을 강조했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고고학자·미술사가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그들에게 확인하고픈 수십건의 질문지를 주기도 했다. 북한에 있는 문화재 관련 자료가 그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당시 필자는 경향신문의 남북 문화재 교류추진을 위한 조사차 방북, 평양 지역 등의 유적들을 답사하고 사회과학원 등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거, 백제 무령왕릉은 어때요? 경주쪽 무덤떼 발굴은 계속되나 모르겠네….”
북한의 연구자들도 ‘남조선의 민족유산’을 많이 궁금해했다. 남한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미술사적으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있는 지를 알고 싶어 했다. 연구자들의 학문적 열의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똑같았다. 전문가로서 새로운 연구에 대한 열망은 정치체제를 뛰어넘어 뜨거웠다.
벌써 20년이 됐다. 하지만 남북한 연구자들에게 변한 것은 없다. 민족 동질성의 뿌리인 문화유산 교류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는다. 반만년의 역사와 문화라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증언하는 문화재는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분단 전까지 함께 한 이 땅의 그 많은 문화유산을 남쪽 아니면 북쪽, 그 절반 밖에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남북 분단은 ‘이산가족’과 더불어 ‘이산 문화재’도 낳았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지금 내가 안다고 떠드는, 연구한다고 하는 문화유산이 그저 반쪽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60년의 분단, 5000년의 망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06년 열린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전시회는 남북 문화재 교류사에 기록되는 특별전이다.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선사~조선시대의 명품 문화재 90점이 남한을 찾았다. 소문으로 듣던, 사진으로도 볼까말까하던 북한 내 국보급 문화재들이 대거 휴전선을 넘은 것이다.
당시 특별전을 공동주최한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의 강만길 위원장은 “분단은 불과 60년이고, 우리 민족은 5000년 역사를 함께 해왔음을 재확인하는 자리”라고 감격해했다. 이건무 중앙박물관장은 “거울같은 전시회”라고 평했다. 남북 동질성을 확인하고 통일의 당위성을 되새기게 한다는 의미다.
한편에서는 ‘이산 문화재’의 ‘상봉’이 관심을 끌었다. 남한에 있는 고구려 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118호·리움 소장)은 함께 있어야 할 광배가 없다. 반면 특별전에 전시될 북한의 고구려시대 ‘금동 영강7년명 광배’(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는 붙어 있었던 불상이 없다.
짝을 잃은 남쪽의 불상과 북쪽의 광배. 평양 평천리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반가사유상과 북한의 광배가 한 쌍이라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된 상황이었다. 전시회에서 마침내 그 둘이 한 쌍인 지를 확인해보자는 관심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그 둘은 한 쌍이 아니었다. 고구려 불상과 광배의 ‘상봉’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었다. 남북으로 헤어진 이산문화재들의 안타까움을 드러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분단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아프게 문화유산 전반에 남아 있다. 남한 사람은 북한의 고구려 유적·유물을 볼 수 없다. 북한 사람은 남한의 신라와 백제·가야의 문화유산을 접하지 못한다. 선사시대는 물론 고려·조선 시대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검은모루 유적’은 늘 역사교과서의 맨 앞을 장식한다. 하지만 수십년 째 우리는 희미한 사진으로만 접한다. 한반도에 구석기문화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시킨 ‘서포항 유적’, 일제의 이른바 ‘금석병용기설’을 무력화시킨 ‘금탄 유적’ 등은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을 뒤엎은 유적들이지만 역시 답사조차 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기원전 2000년)인 ‘뼈피리’도, 고려시대 석탑의 백미라는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 평양의 ‘보통문’과 ‘대동문’ ‘을밀대’, 개성의 ‘선죽교’, 사리원의 ‘성불사’, 단원 김홍도의 ‘선녀도’나 혜원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소나무와 매)도 우리는 만날 수 없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그 사이사이 녹아든 문화의 짙은 향기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중국 내 고구려 유적은 언제든지 답사할 수 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는 북한의 ‘안악3호분’같은 고구려시대 벽화고분은 그저 ‘그림의 떡’이다. 러시아의 발해 유적은 우리 손으로 발굴까지 하지만 북한 내 발해 유적은 실태조차 모른다.
이젠 한민족 생활문화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아리랑, 김치마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남북으로 쪼개져 등재됐다. 아리랑은 ‘한국 서정민요, 아리랑’(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요, 아리랑’(북한)이란 이름으로, 김치는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남한)와 ‘김치 만들기 전통’(북한)이란 이름으로다. 남북한은 유네스코에 공동 등재를 추진했지만 결국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유적과 유물, 문헌기록을 제대로 접할 수 없는 역사·문화의 연구나 복원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 연구에는 아예 치명적이다. 삼국시대 연구와 복원도 삼국의 문화유산 자료를 비교·검토할 때 더 온전하지 않겠는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안타깝지만 분단은 이를 막고 있다. 그러다보니 100년 전 일제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사진들이 아직도 주요 자료로 활용된다.
남북의 문화재 교류가 막히고, 북한의 관련 자료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으면서 분단 60년이 5000년 역사와 문화를 망각시키고 있다.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 문화재들은 한반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 연구를 절반에 그치게 한다.
■북한의 국보와 보물, 문화재 관리는?
한반도 문화유산의 절반이 존재하는 북한도 주요 유적, 유물을 특별히 보존·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북한에는 남한의 ‘문화재보호법’에 해당하는 ‘민족유산보호법’이 있다. 민족유산보호법에 따라 ‘민족유산’(남한의 ‘문화재’ 개념)을 물질유산(유형문화재 등), 비물질유산(무형문화재), 자연유산(천연기념물 등)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국보’ ‘보물’ ‘사적’ ‘국가중요무형문화재’처럼 특정 문화유산을 국가가 지정하는 제도도 운영 중이다. 남한의 ‘국보’는 ‘국보유물(유적)’, ‘보물’은 ‘준국보유물(유적)’에 해당한다. 이외 ‘일반유물’도 있다. 비물질유산은 ‘국가비물질유산’ ‘지방비물질유산’으로, 자연유산은 ‘명승지’‘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물론 가치 평가나 지정 기준에는 차이가 있다. 유물·유적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나 조형예술적 가치를 따지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북한에는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또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여기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명명한 대상물도 지정(일명 ‘교시 유산’)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지정문화재는 국보유물(유적) 190여건 등 모두 4800여건으로 알려져 있다(2008년 현재). 평양을 수도로 삼은 고구려,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시대의 유물·유적이 많다. 남한에 신라와 백제·가야시대 유물·유적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고구려 고분 63기로 구성된 ‘고구려 고분군’과 개성 일대의 ‘개성역사유적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는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옮기면서 쌓은 평양 시내의 ‘평양성’이다. 2호는 고구려 왕궁터인 ‘안학궁성터’, 3호와 4호는 평양성 성문으로 처음 세워진 ‘보통문’과 ‘대동문’이다. 보통문은 고려시대에는 서경의 서문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성종 때인 1473년에 새로 지어졌지만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다. 대동문은 평양성의 6개 성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조선 중기에 재건됐다.
역시 국보유물인 고구려의 대표적 금속공예품 ‘금동맞뚫음장식(해뚫음무늬금동장식)’은 고구려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소장품인 이 금동장식 중앙에는 그 유명한 삼족오(세발이 있는 까마귀로 태양을 상징)가 있다. 중앙의 삼족오를 중심으로 봉황, 용을 맞뚫음(투조)기법으로 조각해 조형미가 매우 돋보인다.
‘삼국시대의 타임캡슐’로 불리는 고구려 벽화고분인 안악 1~3호분, 약수리·수산리·덕화리 고분 등과 ‘을밀대’, 평양성을 쌓을 때의 사람 이름 등 명문이 있는 ‘평양성 명문석’도 국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고구려 나무다리 유적’,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이야기로 유명한 ‘온달장군과 평원왕 공주의 묘’도 국보유적이다.
신라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 대에 세워진 비석은 남북한에서 모두 5기가 국보다. 남한에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 등 3기가, 북한에는 황초령·마운령 진흥왕 순수비가 각각 국보유물 110호, 111호다.
개성 일대에 있는 고려시대 문화재의 상당수도 국보, 준국보로 관리된다. 고려 왕궁터인 만월대와 왕건릉은 물론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으로 유명한 공민왕릉, 첨성대, 성균관, 정몽주가 희생된 선죽교 등이 대표적이다. 왕건의 청동 좌상인 ‘고려 태조상’과 ‘청자국화무늬병’ 등 많은 명품 청자들도 국보 반열에 올라 있다.
조선시대의 건축, 회화, 공예 등의 문화유산도 물론 국보가 많다. 특히 회화에서는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조선 초기 안견의 ‘운룡도’,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개척하고 정립한 겸재 정선의 ‘옹천파도도’, 조선 후기 대표적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선녀도’와 혜원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송응도)가 국보다. 하나같이 역사와 문화 복원·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료들이자 민족의 보물들이다.
■문화재 교류, 시너지 효과를 낳는다
분단 60여년 동안 남북한 문화재 교류는 극히 드물었다. 정치 부문을 넘어서 동질성 회복차원에서라도 문화재 교류를 하자는 여론은 높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반면 남북이 함께 손을 잡았을 때 그 성과는 매우 컸다.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은 남북한이 한 뿌리임을, 문화유산 공유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후 정기 교류전이 정착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남북 전문가들은 개성 만월대 유적을 공동 발굴조사하기도 했다. 2007년 처음 시작한 공동 발굴은 냉온탕을 오가는 남북관계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송악산을 배경으로 1000여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고려 궁성의 초석, 유물들을 드러내 보였다. 2015년에는 고려 금속활자 1점을 발굴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단 1점씩만 전해지던 상황에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만든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3점을 확보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궁예도성’(강원도 철원)의 남북 공동발굴조사를 시도할 만하다. 후고구려(태봉국)를 세운 궁예가 1100년 전 왕건과 함께 수도를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기면서 세운 궁예도성은 현재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다. 남북 군사분계선이 가로지르는 궁예도성에는 분단 이후 지금까지 늘 긴장감만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다.
이 궁예도성을 남북한이 공동 조사할 경우 ‘금단의 땅’이 ‘화해의 땅’, 교류·협력의 상징적 공간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십수년전 부터 궁예도성의 남북 공동 발굴조사를 외치고 있다.
남북한은 일본에서 문화재를 환수, 제자리에 세우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가 2005년 시민들의 노력으로 유출 10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무찌른 기록을 새긴 전승기념비인 북관대첩비는 조선 숙종 때인 1707년 함경북도 길주군(현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워졌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자존심이 상한 일본군이 북관대첩비를 뽑아 일본으로 무단반출했다. 환수된 북관대첩비는 남북 협의에 따라 원래 자리의 받침돌 위에 다시 세워졌고, 현재 북한의 국보유물이다.
북관대첩비 환수와 제자리 찾기는 불법 유출된 해외 문화재 환수의 좋은 선례다. 남한의 시민단체와 북한 조선불교도련맹은 일본 오쿠라문화재단이 소유한 고려시대의 ‘평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 반환을 위해 공동노력을 해오고 있기도 하다. 남북이 힘을 합하면 불법유출 문화재의 파악, 환수에 큰 힘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고고학적으로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때는 70만년 전쯤으로 본다. 기록이 남아 있는 남북 역사시대만 하더라도 5000여년에 이른다.
최근 평창 동계올림픽을 매개로 남북관계에 모처럼 훈풍이 이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새삼 분단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교류와 협력의 절실함이 더 간절하다. 볼 수 없는 반쪽의 문화유산이 그립고, ‘이산 문화재’의 상처가 더 아리다. 사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경향신문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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