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게도 현실적인 장수왕 두번째 외교안보 위기 넘다

임기환 입력 2018. 1. 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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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36] 전 회에서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 능력을 보여주는 첫 사례로서 436년 화룡성 출병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화룡성 출병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회에서는 그 뒷이야기로서 장수왕의 외교 능력을 시험하는 두 번째 사례를 살펴보자.

장수왕은 436년 북위의 공격으로부터 화룡성에서 구출해온 풍홍을 요동에 머무르게 하고 "龍城王 馮郡(용성왕 풍군)"으로 부르면서 일종의 신하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풍홍은 얼마 전까지도 북연의 황제로 지낸 위세를 잊지 못하고 반발하였다. 풍홍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 것은 단지 몸을 의탁하고자 한 것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원 아래 북연을 복국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화룡성 주민들을 이끌고 망명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입장에서는 풍홍이나 북연 망명 세력을 북위를 견제하는 데 이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러기에 풍홍을 보내라는 북위의 요구도 단호하게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풍홍이 복국하려는 시도를 허용할 수도 없었다. 풍홍의 복국 움직임이 의당 북위를 크게 자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장수왕으로서는 풍홍이 요동에 머무르면서 북연 주민들과 함께 북위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수왕의 의도와 처우에 풍홍이 반발하자 그를 북연 망명 집단과 격리시켜 438년 3월 평곽(平郭)에서 북풍으로 옮겼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삼았다. 평곽은 지금의 요동반도 개현 일대로서 양평과 더불어 요동반도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요하와 가까운 이곳에서 풍홍이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곤란하기 때문에 아마도 내륙 깊숙한 지역인 북풍으로 옮긴 것이다.

고구려의 낭랑산성 (중국 요령성 수암현) : 필자는 북풍을 수암 일대로 추정한다. 낭랑산성은 수암 일대의 중심 요충성이다.

그러자 풍홍은 분개하여 비밀리에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송은 풍홍을 받아들이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왕백구(王白駒) 등을 사신으로 군사 7000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보내 풍홍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장수왕은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명객인 풍홍의 이런 독자적인 움직임은 고구려의 외교전략의 운영에 큰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북위의 풍홍 송환 요구도 거절한 판에 풍홍을 송으로 보낼 수는 더욱 없었다. 북위를 크게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풍홍이 송나라와 독자적으로 교섭을 시도한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외교적 가치를 높이려는 행위였지만 오히려 고구려 입장에서 볼 때에는 풍홍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장수왕은 송의 태도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풍홍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보호 아래 있는 일개 망명객임에도 불구하고 송나라는 장수왕의 뜻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풍홍을 영입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더욱 7000명의 군대를 고구려 영토 내로 보낸 것은 외교적 무례함을 넘어서는 행위였다. 아니 어쩌면 송이 7000명이라는 적지 않은 군대를 요동지역에 출병시킨 것은 외교적 무례라기보다 전략적 의도를 갖는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송은 북위와 대결하는 상황에서 북위 배후의 고구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송의 편에 기울어질 이유가 없었다. 사실 송의 입장에서도 이미 나라를 잃은 일개 망명객인 풍홍이 그리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풍홍의 망명 수용을 계기로 고구려를 끌어들일 기회로 삼고 싶어했을 것이다. 특히 해로로 7000명에 이르는 군대를 요동에 출병시킨 것은 마치 송과 고구려가 이미 연결된 것처럼 북위의 의심과 오해를 일으켜 고구려로 하여금 송으로 기울게 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송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긴장관계를 조성하려는 전력적 의도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장수왕으로서는 매우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에도 장수왕은 과감하게 결단하였다. 장수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풍홍과 그의 가족을 살해하며 송의 의도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러자 송의 왕백구 등이 고구려군을 공격해 손수를 사로잡고 고구를 살해하였다. 고구려군은 즉시 반격하여 송군을 격파하고 왕백구 등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장수왕은 사신 왕백구 등을 고구려에서 처벌하지 않고 송으로 돌려보내면서 송에 처벌을 요구하였다.

장수왕은 사태 수습의 책임을 오히려 송에 넘겨버린 것이다. 이때 왕백구 등을 처형했다면 송과 심각한 분쟁을 겪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아직 북위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송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그냥 넘어가면 고구려의 위신도 문제려니와 북위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장수왕은 송과의 관계를 위해 사신을 압송하되 대신 송의 조정에 책임을 지는 처벌을 요구했던 것이다. 송도 북위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고구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송의 황제는 장수왕의 뜻을 거슬리고 싶지 않아서 일단 왕백구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풀어주는 외교적 제스처를 취했다.

이후 고구려는 한동안 송과의 외교에 치중하였으며 20여 년 동안 북위와는 전혀 사신의 왕래가 없었다. 즉 전략적으로 친송 외교를 전개한 것이다. 439년에는 북벌을 준비 중인 송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마(戰馬) 800필을 송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고구려의 외교는 북위와 대치 중인 송나라에 고구려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북위에 대해서도 고구려가 갖는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이렇게 장수왕은 두 번째 시험 무대를 성공적으로 통과하면서 이른바 장수왕식 외교전략의 틀을 갖추었다. 436년 화룡성 출병 작전에서 북위와 대치한 것이나 438년 풍홍의 망명사건을 계기로 송과 군사적으로 충돌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양 강대국을 고구려가 상대하는 사건이었다. 이 두 번의 국제적 사건을 통해 장수왕은 전쟁과 외교, 강경과 온건이라는 양면책을 적절하게 구사함으로써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고구려의 위상과 가치를 크게 높였다. 어느 시대든지 외교란 국제 무대에서 자국의 가치를 최대화하는 전략이 목표여야 하며, 동시에 국가의 자존과 품격을 잃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장수왕의 외교전략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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