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1987과 '서민 코스프레'

산업부 ㅣ 전병역 입력 2018. 1. 1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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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영화 <1987>을 관람한 후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영화 속 대사는 정곡을 찔렀다.

1990년대 초 대학을 다닌 세대는 ‘운동권’ 끝자락에서도 살짝 지난 세대였지만 이런 말은 우리 때도 종종 들었다.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갔다가 ‘박통 시절 보릿고개’ 얘기를 꺼낸 아버지에게 대들었다가 갈등을 빚는 풍경은 집집마다 흔했다. “철모르는 애들이 선배들에게 꼬드김을 당해 돌팔매질한다고 쉽게 바뀌는 세상이 아니다!”는 부모님 말은 세상 풍파를 겪고서 나름대로 터득한 경험칙이었다.

항간에 코스프레란 말이 있다. 코스튬(의상)과 플레이(놀이)의 합성어다. 고관대작이나 정치인들이 시장에 가거나 빈민가를 방문한 경우를 겨냥해 ‘서민 코스프레’라고도 일컫는다. 진정성보다는 시늉에 가깝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크다. 장차관 같은 고위 관료나 국회의원, 도지사·시장·군수들이 진짜 서민일 수는 없다. 지난해 청와대 참모진 재산공개 내역만 봐도 그렇다. 장하성 정책실장(93억원), 김현철 경제보좌관(54억원), 조국 민정수석(50억원)…. 그런 코스프레라도 하는 걸 탓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오히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진심 어린 태도라면 박수받을 만하다.

최저임금 인상 후속책에도 팔을 걷어붙인 문재인 정부의 ‘친서민 행보’에 가속도가 붙었다. 다만 진정성은 친서민에 있더라도 실제 드러난 양태는 사뭇 달라질 위험을 내포한다. 현실은 그리 호락한 게 아니어서다. 숨죽이는가 싶던 부동산 가격이 다시 꿈틀대는 모양이다. 사실상 전 재산이자 자녀 교육 문제까지 얽히고설켜 한 가정의 온갖 명운이 걸린 게 대한민국의 집이다. 이런 집의 거품을 빼겠다고, 투기를 끝내겠다고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비롯한 집권자들이 호언장담 칼을 빼들었다. 김수현 청와대 수석은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은 실패”라는 자아비판까지 하며 2차 선전포고를 했다. 진정성이 있겠지만 얼마나 10년 전보다 달라졌는지는 아직 평가가 이르다. 시장은 냉랭하다. 초반에 움찔하는가 싶던 집값, 특히 ‘주적’인 강남 아파트값이 다시 치솟고 있다.

어쨌거나 중요 권력기반인 중산층은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다주택자를 잡다보니 ‘똘똘한 한 놈’인 강남 등지 주요 집은 지키고 신도시 등 외곽지역 나머지 집은 처분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에 서민·중산층이 산 집값부터 약세를 보이자 정치적 신념과 경제적 계급 이익 사이에 현실 부조화가 생겼다. 또 강남 쏠림이 심해지다보니 거기 집값은 더 뛸 것이라고 호들갑들도 떤다. 교육 문제도 얽혀 있는데, 특목고·자사고를 손질하면서 일반고 위주로 중심축이 옮겨가는 방향은 바람직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뜻하지 않게 ‘강남 8학군’ 시대의 재림을 초래할 수 있다. 이때는 강남 집값을 더 떠받치게 된다.

이 영화를 본 뒤 “무지했고 비겁했다”고 고백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신년 인터뷰에서 “정부 2년 차에 검증받을 성적표는 결국 경제성적”이라고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적폐청산의 짜릿함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지나보면 “서민 배불리 먹고 걱정 없게 해달라”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지탄받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사실 먹고살기 힘들어서다. 지난 보수 9년 집권기에 강을 파고, 말로 ‘창조경제’라며 ‘뻘짓’만 하느라 허송세월했고 우리 미래는 저당 잡혔다. 그 사이 남들은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같은 4차 산업혁명을 향해 저 멀리 달아나 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는 문재인 시대 화두로 들린다. 부동산, 교육처럼 삶을 짓누르는 곳부터 새로운 세상을 향한 디딤돌이라도 놓길 기대하는 촛불은 아직 저마다 가슴 속에 뜨겁다. 성난 민심의 파도는 어떤 배든지 삼키게 돼 있다. 나중에 가서야 억지로 붙잡는다고 버틸 수 있는 게 아니다.

<산업부 ㅣ 전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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