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21] '신라 건국' 비밀 푼 조양동 유적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18. 1. 10.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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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1월 4일. 국립경주박물관 조사단은 불국사와 지근 거리에 있는 경주 조양동에서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주민 신고로 우연히 알려진 이 유적에 대한 네 번째 발굴이었다. 조사는 '굴귀(掘鬼)'라던 최종규 학예사가 진두지휘하고, 그를 따르던 안재호, 우지남 등 20대 고고학도 10여 명이 보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경(漢鏡), 경주 조양동 38호 묘, 지름 8.0cm, 국립경주박물관.

겨울 보리를 파종한 밭에 구획하고 표토를 제거하자 무덤 여러 기의 흔적이 드러났다. 그 가운데 북서쪽 모퉁이에서 확인된 무덤부터 파기로 했다. 이 무덤이 바로 유명한 '조양동 38호 묘'다. 무덤 규모는 길이 258㎝, 너비 128㎝였다. 최 학예사는 정밀 조사를 통해 무덤 내부에 목관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깊이가 150㎝ 정도였기에 11월 하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무덤 속에서는 청동기, 철기, 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백미는 중국 한나라 청동거울 4점이었다. 최 학예사는 이 거울의 연대를 검토한 다음, 조양동에서 발굴한 무덤과 유물이 미지(未知)의 세계로 남겨져 있던 신라 초기 30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그해 11월 27일 오후.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신라 건국 전후 시기의 유물이며, 설화 시대로 취급됐던 신라 초기의 역사가 사실로 확인되었다"며 조사 성과를 공개했다. 그 내용이 '밭에서 쏟아진 신라 건국 설화' '혁거세 왕 추대 확인할 물증' '신라 역사 수백 년 앞당겨' 등으로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학계와 시민들의 반향은 뜨거웠다.

그 후 같은 시기의 취락, 무덤, 제철 유적 등이 연이어 발굴되면서 신라 초기 역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됐다. 최 학예사는 훗날 "우연한 발견이었다. 단 하루 동안의 이 우연한 발굴물 연구에 나의 청춘이 흘러갔다"고 회고했다. 그 '하루'가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던 신라 건국의 역사를 드러내 밝히는 단초가 되었다. 이 발굴에 참여한 조사원들은 각지로 흩어져 한국 고고학 발굴 기술의 혁신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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