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보드게임 '부루마불' 만든 이상배 씨앗사 대표

이영욱 2017. 12. 2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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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문화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왔다.

국민 보드게임 부루마불의 아버지인 이상배 대표를 만나 부루마불 탄생에 얽힌 뒷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에게 개발 중인 부루마불 게임을 주고 가지고 놀게 했다.

―컴퓨터게임 등 부루마불의 경쟁자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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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 반품 참패..그때 포기했다면 국민게임도 없었죠
스타크래프트 빠진 애들도 부루마불은 안버려..35년 롱런
이상배 씨앗사 대표는 부루마불이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이라고 말한다. 어릴 적 부루마불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이 부모가 돼서 다시 그들의 자녀들과 부루마불을 즐길 수 있다. 부루마불이 국민 보드게임으로 35년간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이충우 기자]
놀이 문화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왔다. 선사시대의 토우, 조개가면부터 전통 인형극 등 다양한 놀이문화가 인기를 끌었다. 옛 문헌에 따르면 삼국시대에는 윷놀이, 바둑, 장기, 씨름, 석전, 주사위, 투호 등이 있었고, 그 이후 고려 조선을 거치며 더 많은 놀이들이 유행했다.

산업화 도시화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연날리기, 윷놀이, 굴렁쇠, 제기차기, 고무줄 놀이 등을 하면서 놀았다. 특히 전자오락의 등장 이후 이런 전통놀이들은 스타크래프트를 거쳐 지금은 오버워치나 '플레이어언노운스 배틀그라운드(배그)' 등에 자리를 내주고 명절 때만 반짝 주목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 무렵 유일하게 대중을 휘어잡은 순수 국산 놀이가 있었다. 바로 부루마블 게임이다. 한때 스타크래프트나, 배그에 맞먹는 인기를 자랑하며 '국민 게임'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게임이다. 부루마불은 35년 전 산업 디자이너를 꿈꿨던 30대 청년 이상배 씨앗사 대표(66)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국민 보드게임 부루마불의 아버지인 이상배 대표를 만나 부루마불 탄생에 얽힌 뒷이야기들을 들어봤다.

―부루마불을 만든 계기는.

▷부루마불이 탄생하던 1982년 무렵 우리나라 아이들의 놀이는 별 게 없었다. 놀이터에 나와서 뛰어노는 것이 전부였고 장난감이라곤 딱지, 플라스틱으로 만든 단순한 자동차, 플라스틱 모형 칼, 물총 이런 게 전부였다. 전자오락기는 극소수 부잣집 아이들만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런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놀이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수만큼 자신의 말을 움직여 여러 나라의 도시 카드(증서)를 구입하고 여기에 건물을 지어 숙박비(통행료)를 받으며 세계일주를 하는 보드게임인 부루마불을 만들게 됐다.

―'부루마불' 이름이 독특하다.

▷유명한 모노폴리 보드게임의 경우 대공황을 배경으로 만든 보드게임으로 배경이 미국 뉴욕이다. 따라서 지명도 버몬트 애비뉴, 보드워크 등 미국식 지명들이다. 부루마불을 구상할 때 지역을 미국으로 한정하기보단 전 세계로 해보고 싶었다. 지구촌이 무대인 것이다. 이름을 '지구촌 게임'으로 하려고 했더니 너무 촌스러웠다. 그때 미국 달탐사 우주선 아폴로 17호에 탑승한 우주인들이 지구를 내려다보며 마치 '푸른 구슬(Blue Marble)' 같다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났다. 미국 NBC에서 하던 국제뉴스 코너 이름이 블루마블 뉴스이기도 했다. 순간 무릎을 탁 쳤다. 어린이들이 발음하기에 블루마블은 좀 어려웠기에 발음이 쉽도록 부루마불로 최종 결정했다. 표기법엔 맞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부루마불 개발의 숨은 공신들이 있다던데.

▷씨앗사의 상징인 천사 디자인은 내가 직접 했고 부루마불 로고는 시각디자인 분야의 대가인 호서대학교 미대 학장 출신 나성남 교수에게 부탁했다. 부루마불의 게임 룰은 나 교수의 지인이었던 명지대 경제학과의 A교수가 만들어줬다. 모노폴리는 게임에서 활용하는 지폐가 500달러, 100달러, 50달러, 20달러, 10달러, 1달러로 구성된다. 이걸 우리나라 실정에 맞춰 달러를 그냥 원으로 표기하자니 500원, 100원, 50원 등이라 금액이 너무 작은 게 문제였다. 그래서 A교수에게 '아이들이 숫자 개념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려면 지폐를 어떻게 만들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액수를 크게 키워보면 어떻겠냐는 답변이 왔다. 액수를 키우는 김에 지폐 종류도 다양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50만원, 10만원, 5만원, 2만원, 1만원, 5000원, 1000원 등 총 7가지 지폐가 만들어졌다. 돈을 거슬러 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암산을 하며 수학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액수가 큰데 사행성 지적은 없었나.

▷부루마불은 어른들끼리 개발한 게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보드게임인 만큼 당연히 아이들의 의견도 물었다. 부루마불 보드판 중 서울에 걸리면 걸린 사람이 서울 증서 소유자에게 통행료 200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당시 아이들에게 "200만원 주면 뭐 할래?"라고 물어보면 "아이스크림 실컷 사먹을래요"라고 답했다. 200만원이면 당시 아이들이 만져볼 수 없는 액수의 큰돈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큰 금액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돈이 아닌 수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아이들을 고려한 내용이 많이 담겼다고 들었다.

▷부루마불은 5~10분 만에 한 판이 끝나지 않는다. 기본이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다. 오랜 시간 보드판을 들여다봐야 하니 눈에 덜 피곤한 녹색으로 밑판을 정했다. 보드판도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코팅처리했다. 코팅을 안할 경우 몇 번 가지고 놀면 금방 망가지고 만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놀면 좋겠다고 생각해 코팅을 했다. 보드판의 구성에도 신경을 썼다. 출발부터 시계 방향으로 세계 각국 도시들의 순서는 각 나라의 국민총생산(GNP) 규모를 따랐다. 추가로 부루마불 게임 속 황금열쇠 카드엔 간단한 영어 단어를 집어넣었고 세계 주요 도시를 소개하는 도시 증서에는 도시의 풍물 등을 상세히 적어 학습 효과를 더했다. 가령 황금열쇠에 '정기종합소득세: 종합소득세를 각 건물별로 아래와 같이 지불하시오'라고 써 있다면 그 지시사항 밑에 빨간색 글씨로 '영어배우기: 세금→TAX(택스)' 이렇게 표기돼 있었다. 아이들이 일본은 도쿄, 프랑스는 파리 등 각국의 수도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부루마불 덕분이다.

아이들을 위한 보드게임인 만큼 아이들의 의견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에게 개발 중인 부루마불 게임을 주고 가지고 놀게 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혹시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무엇이 재미있는지 등을 물어보고 이를 반영해 개선했다.

―게임 룰을 만화로 소개한 것도 아이들을 고려한 것인가.

▷아이들은 글보다 만화로 볼 때 더 빨리 이해한다. 내가 아는 선배 중에 '꼭지'의 이향원 화백(1944~2011)과 친한 분이 있었다. 그래서 부루마불을 들고 이 화백을 찾아갔다. 이분을 직접 뵙고 보드게임을 한 세트 드린 뒤 게임 설명서와 부루마불의 지면 광고를 만화로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수락하시더니 일주일 뒤에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다. 약속된 날짜에 찾아가보니 긴 글로 된 부루마불 게임 룰을 한 컷의 만화에 그리셨더라.

―부루마불 하면 씨앗사란 상호가 유명하다.

▷씨앗사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종묘회사로 알더라. 우리는 원예·화훼와는 관련 없는 회사다(웃음). 씨앗사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건 단순하다. 내가 1981년 3월 충무로 극동빌딩 인근에 문을 연 씨앗사는 원래 디자인 회사였다. 창의적인 일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크리에이티브 아트 컴퍼니(Creative Art Co.)' 이렇게 회사명을 지었다. 당시 국회에선 각종 인쇄물, 홍보포스터를 디자인 회사에 의뢰했고 나도 그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생각만큼 잘 안됐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때 불현듯 1978년 호텔 실내디자인 업무차 출장을 갔던 아랍에미리트에서 묵었던 호텔 로비에서 종종 했던 보드게임 '모노폴리(Monopoly)'가 떠올랐다. 이걸 모티브로 새로운 보드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때부터 크리에이티브 아트 컴퍼니는 아이들을 위한 완구 회사인 씨앗사가 됐다. 크리에이티브 아트는 아이들이 발음하기 어렵지 않나? 그래서 크리에이티브에서 C를 따오고 여기에 아트를 붙여 'C―Art', 즉 씨앗사가 된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나는 새싹들이고 씨앗에서 새싹이 나오는 거니까. 그런 의미도 담았다.

―부루마불도 처음엔 쓰라린 실패를 겪었다던데.

▷1982년 5월 5일 첫 번째 부루마불을 시장에 선보였다. 아이들을 위한 보드게임인 만큼 론칭일을 어린이날로 잡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보드게임이란 장난감이 없었기에 부루마불이 1호 보드게임이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첫 론칭은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당시 부루마불 가격은 8300원이었다. 압구정 165㎡ 아파트가 3800만원, 라면 하나가 20원이었으니 매우 '비싼' 보드게임이었던 셈이다. 서울 창신동·영등포·청량리 등 주요 도매상에 5000세트를 보냈는데 세 달 만인 8월 전체 물량의 99.5%가 반품됐다. 사실상 도매상에 보낸 수량 그대로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어찌 보면 예견된 실패였다. 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사업 수완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당시엔 막연히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으면 알아서 팔릴 거라고 생각했다. 제품 가격이 적당한지는 당연히 생각도 못했다. 1985년 무렵 기존 부루마불 가격(8300원)을 대폭 낮춘 1000원짜리 부루마불 제품도 출시했다. 높은 가격이 아이들에겐 부담이 됐을 것이라는 점을 깨우친 것이다.

할아버지 이상배 대표(66)가 손자 이현재 군(4)과 함께 부루마불을 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아이들에게 어떻게 광고를 했나.

▷이 화백에게 받은 광고를 어린이 신문에 게재했다. 본격적인 마케팅이었다. 4절지에 포스터를 만들어서 초등학교 앞에 붙이기도 했다. 물론 몰래 붙인 거라 경비 아저씨가 전단지를 발견하는 족족 떼어 버렸다. 그러면 또 가서 몰래 붙이고(웃음). 이걸 반복했다. 아이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 아파트 놀이터였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를 돌면서 16절지에 만화 광고를 인쇄해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광고지를 받은 아이들이 호기심을 느끼면 부모님에게 사달라고 할 테니까. 이런 마케팅 활동은 여의도, 이촌동, 압구정동, 대형 쇼핑센터 위주로 진행했다. 특히 어린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유통 전략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앞서 서울 소재 큰 도매상들에 물건을 공급했다면 이제는 소매상(완구점)을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바뀐 전략이 통했나.

▷새로운 전략이 먹혀들었다. 부루마불 광고를 접한 어린이들이 7~8월 학교 방학을 맞아 부루마불을 사러 완구점에 들렀지만 물건이 없다는 이야기만 들어야 했다. 우리가 일부 완구 소매점을 통해서만 물건을 소량 유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와 부모들의 아우성에 소매상은 도매상에 연락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부루마불을 찾는데 혹시 재고가 있느냐는 문의였다. 도매상에는 소매상의 전화가 빗발쳤지만 이들은 할 말이 없었다. 처음 우리가 공급했던 부루마불 5000세트를 모두 반품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도매상에도 공급하지 않았나.

▷도매상에 부루마불을 다시 공급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창신동에 가장 큰 완구 도매상인 백도정 서울종합완구 회장이 사무실로 나를 직접 찾아왔다. 큰 완구 도매상 회장이 직접 찾아왔다기에 처음엔 많이 놀랐다. 백 회장이 날 보더니 "젊은 사람이 사업한다고 하는데 내가 힘(도움)을 주진 못할 망정 제품을 반품시키고 무시해서 정말 미안하다. 내가 몰라봤다. 그러니 우선 부루마불 200세트만 보내줄 수 없겠나"라고 간곡히 청해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3000만원짜리 당좌수표를 써줬다. 당시 3000만원이면 아파트 한 채 금액이다. 지금 돈으로 한 10억원도 더 될 것이다. 백 회장이 정해진 기한 없이 은행에 바로 맡기면 결제될 거라고 했다. 수표를 보니 솔직히 덜덜 떨리더라. 당시 씨앗사는 소매상 4곳에 10세트들이 한 박스씩을 배달할 때였다. 워낙 소규모로 장사할 때라 3000만원이란 큰돈은 만져볼 수도 없었고 만져본 적도 없었다. 백 회장이 우리 회사에 들렀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도매상 회장님들도 부루마불을 납품받겠다고 줄줄이 나를 만나러 왔다. 그러면서 도매상에도 본격적으로 씨앗사의 부루마불이 깔리기 시작했다. 1982년 12월 출시 7개월 만에 부루마불 TV 광고가 처음 전파를 탔다. 당시 우리 공장은 하루 풀가동하면 부루마불 3000세트를 만들 수 있었다. 밤낮없이 공장을 가동해서 부루마불을 만들었는데 제품을 내놓기 무섭게 팔려 나갔다.

부루마불이 인기를 얻자 한국소비자원에서도 왔었다. 일각에서 "씨앗사가 돈을 주고 도시와 건물을 사고파는 보드게임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사행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부루마불에 사용한 고액권 지폐가 논란의 대상이 됐다. 결국 아이들의 수학 능력 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리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문제 제기는 쑥 들어갔다.

―한국은행보다 부자라는 루머(?)가 있다는데.

▷부루마불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다. 부루마불 게임에 사용되는 '게임용 지폐'는 씨앗은행에서 발권한다. 우리가 쓰는 지폐를 보면 한국은행이라고 표기돼 있지 않나? 부루마불 지폐를 보면 씨앗은행이라는 로고가 박혀 있다. 부루마불 1세트에는 50만원권 20매, 10만원권 50매, 5만·2만·1만·5000·1000원권 각각 30매가 들어간다. 다 더하면 1758만원이다. 1982년 출시 후 2017년까지 35년간 팔린 부루마불이 약 2300만세트이니 금액으로 치면 404조원 정도를 발권한 셈이다. 물론 한국은행보다 부자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제법 큰돈 아닌가(웃음). 지금도 매년 부루마불 약 20만세트가 판매된다.

이상배 씨앗사 대표가 이향원 화백이 그려준 부루마불 광고를 들어 보이고 있다.
―부루마불도 조금씩 바뀌어 왔다던데.

▷1982년 처음 만든 부루마불이 1.0 버전이라면 가장 최근에 나온 부루마불은 5.0 버전이다. 네다섯 번 정도 업데이트를 거쳤다. 부루마불은 '출발'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국민총생산(GNP) 크기에 따라 도시를 배열한다. 첫 번째 도시는 자유중국의 수도인 타이페이였고 가장 마지막 도시는 서울이었다. 첫 버전엔 홍콩도 들어가 있었는데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2016년판에서 홍콩이 빠지고 베이징이 추가됐다. 스위스 취리히는 베른으로 캐나다 몬트리올은 오타와로 변경됐다. 이런 식으로 국가와 지명, 해당되는 설명은 시대에 맞게 일부 변경했지만 큰 틀은 그대로 뒀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부루마불을 하는 사람들의 추억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 부루마불이 첫선을 보인 이후 35년이 흐르면서 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다. 1982년 서울을 구매하려면 100만원을 내야 했다. 요즘 애들한테 물어보라. 100만원 있으면 뭐할 거냐고. 아마 "에이~" 이러고 말 거다. 1980년대 아이들이 상상하는 100만원과 2017년 아이들이 상상하는 100만원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컴퓨터게임 등 부루마불의 경쟁자가 너무 많다.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부루마불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도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하진 않는다. 부루마불은 4명까지 보드게임판에 둘러앉아 같이할 수 있다. 친구들끼리 같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게임이다. 물론 변신도 할 것이다. 요즘 모바일 세대에 맞춰 새로운 형태의 부루마불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나. 부루마불은 사라져서는 안되는 좋은 문화다. 강소기업이 많은 독일엔 라벤스브루거라는 130여 년 전통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드게임 회사가 있다. 그만큼 세대를 아우르는 게임이란 의미다. 1982년 부루마불을 처음 선보였으니 현재 40대인 분들이 부루마불 1세대다. 이분들이 부모님과 함께 부루마불을 가지고 놀았던 것처럼 이젠 자신들의 추억을 되살려 자녀들과 함께 부루마불을 즐길 수 있다.

―씨앗사가 작은 벤처기업에 부루마불의 모바일 게임 판권을 판매한 것이 화제가 됐다.

▷2002년 벤처기업의 젊은 대표들이 나를 찾아왔다. 부루마불의 판권을 사서 모바일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도 어려울 때 도매상 회장의 도움을 받아 성공할 수 있었기에 당신들이 의욕적으로 해보겠다면 내가 판권을 주겠다고 계약을 했다. 패기 있는 젊은 친구들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님의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부루마불을 처음 선보이고 세 달 만에 모두 반품됐을 땐 지금 같은 성공은 예상도 못했다. 씨앗사를 설립하고 손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부루마불을 만들었고 이걸 국민 보드게임 자리에 올려 놓았으니 내 할 일은 다한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좋아하는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제주도에 내려가 산다. 씨앗사의 서울 본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올라오고 있고. 향후 씨앗사와 관련된 모든 일은 큰아들인 이영석 씨앗사 실장이 담당할 것이다. 나는 옛날 사람인지라 앞으로의 변화 이런 거에 빨리 대처하기가 어렵다. 소위 아날로그 세대니까. 그래도 내 아들은 디지털 세대 아닌가(웃음). 어떻게 하면 씨앗사와 부루마불이 디지털 세대의 흐름에 동승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부루마불 개발자로서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전통 놀이'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상배 대표는

1951년 전북 정읍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69년 홍익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전 목칠공예)을 전공하며 미적 감각을 쌓았다. 이후 아랍에미리트(UAE)로 건너가 아부다비 호텔 실내 디자인을 직접 담당했다. 1979년 한국으로 돌아와 충무로에 S디자인을 설립했지만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1982년 5월 5일 국민 보드게임인 '부루마불'을 개발했다. 현재는 큰아들인 이영석 실장에게 업무 대부분을 맡기고 가족과 제주에서 살고 있다.

[이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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