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고대 일본 속의 한민족사를 찾아서
[경향신문]
방학이 되면 곧잘 벌어지는 것이 ‘고대 일본 속의 한민족사를 찾아서’ 같은 종류의 답사나 여행들이다. 그것도 우리나라 굴지의 단체가 기획하고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 자체로는 지적으로 흥미로운 기획이다. 그 옛날 반도에 살던 주민들이 무슨 연유로 그 먼 곳까지 갔는지, 그들은 열도의 주민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삶의 터전을 일구어 냈는지, 그들이 지니고 왔을 우수한 문물들은 열도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탐구할 거리가 널려 있다. 그러나 그런 답사들의 목적은 대부분 이런 지적 관심보다는 고대에 ‘한국’이 ‘일본’보다 얼마나 우월했는지, 선진문명을 전해주며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참가한 사람들은 대체로 유적이나 문화재 앞에 서서 “아, 이게 다 ‘한국’이 ‘일본’에 전해준 거구나” 하며 가슴 벅차 하다가 곧바로 “그러니 ‘일본’ 너희들이 아무리 까불어대도 너희들은 다 우리 학생이야, 고얀 것들 선생님 대접을 이렇게 해?” 하며 돌아선다.
중국에서 들어온 고대의 선진문물이 반도를 통해 열도로 들어간 건 맞다. 일본 학계에서도 그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르며 기꺼이 인정한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벼농사와 철기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현해탄을 건너갔다. 이들이 열도에 야요이(彌生)시대를 열었다. 그 후로도 신라가 반도를 통일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넜다. 이 과정에서 불교, 한자, 논어, 건축기술, 직조기술 등 고대국가의 기틀이 되는 문물이 전해졌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백제, 신라, 고려(고구려)라는 말이 붙은 지명, 인명이나 절, 신사 이름, 예술작품명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일본 제일의 조각품이라는 백제관음상, 사이타마현의 유서 깊은 신사인 고려신사(高麗神社)나 신라명신(新羅明神) 등은 모르는 일본인이 드물 정도다. 일본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사쓰마번의 수도 가고시마에는 고려교(高麗橋)가 있다. 메이지유신 삼걸에 들어가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자란 동네다. 일본에서 이런 이름들을 만나면 나도 반갑고 어깨가 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동행한 일본인의 반응을 기대 섞어, 살피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별무반응이다. “아, 이게 옛날에 ‘한국’하고 관련이 있었나 보네요”라고 슬쩍 건드리면 그제서야 “아, 그렇겠네요, 하하” 하고 만다. 김빠진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들은 죄다 길게는 2000년, 짧아도 1300여년 전에 이미 일본에 정착한 것들이다. 그걸 새삼 이건 한국 건데 하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에게 그것들은 그냥 일본 지명이고 일본 문화재일 뿐이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인명이나 지명은 어떤가. 을지문덕, 연개소문, 계백 같은 이상한(?) 이름은 우리 주위에 더 이상 없다. 모두 김춘추, 김유신 같은 스타일의 이름들이다. 어느 시점엔가 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대륙식 성명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게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있다. 요즘 영어 이름이나 상표가 더 멋있어 보이듯이 그때는 대륙식 이름들이 폼나 보였을 거다. 그런데 어느 날 명동을 찾은 중국인이 “한국 사람 이름은 우리랑 같네” 하며 동포(?) 취급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황당할까. ‘이미 1500년 동안 써온 성을 갑자기 중국 거라 하니, 내 참…에이 이 성을 갈 놈들!’ 우동은 이미 한국말이지 일본말이 아니며, 기무치는 일본말이지 더 이상 한국말이 아니다.
고대사는 민족주의라는 특수한 지적 도구나, 민족감정이라는 역사적으로도 특이한 감정으로 대하기에는 지금과 너무나 이질적인 세계다. 거기에 민족주의를 들이대는 순간 고대인들의 생각, 표정, 가치관, 삶 등은 손아귀에서 모래알 빠지듯 사라지고, 현재 우리의 알량한 복사판들만 남는다. 좀 어려운 말로 이걸 ‘고대사의 민족주의적 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사의 실체를 허심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입맛대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그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할 수 있건, 이런 시도는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많은 지적 자산과 지혜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우리가 열도의 반도 관련 유적 앞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민족’이 아니라, 거꾸로 ‘민족’(이것이 근대에 형성된 개념과 용어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이라는 것을 모르고도 교류하고 자부심을 유지하고 억척스레 땅을 갈아 훌륭한 삶을 영위한 사람들이, 또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우리가 영원불변의 가치라고 믿는 ‘민족’이 고대인들의 눈에는, 아마 미래에 살 사람들의 눈에도 특이하게 보일 수 있다는 그 통찰 말이다.
문명 교류는 흐르는 것이다. 거기에는 국경도 민족도 없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이다. 대륙이라는 큰 문명의 샘에서 사방으로 흘러간 것이다. 때마침 반도는 대륙에 가까웠고 열도는 멀었다. 반도는 문명 교류의 강줄기에 기꺼이 길을 내주었다. 그뿐이다. 이런 태도가 더 멋지지 않은가! 그래야 혹시 어느 날 중국인들이 ‘한국 속 중국 문화의 흔적을 찾아서’란 답사여행을 만든다 해도 쿨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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