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에 가서 만난 운명 피치 파스타의 쫄깃한 맛

정영선 2017. 12. 1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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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푸드트래블-5] 피렌체에 가지 않았다면 시에나에 가는 일은 없었으리라. 내가 피렌체 여행을 계획할 즈음엔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의 소설이자 동명 영화로 유명한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열풍이 식지 않았을 때다. 난 피렌체에 대한 사람들의 호들갑에 약간의 반감마저 있던 터라 오히려 이 도시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피렌체에 도착한 뒤 우아하면서도 섬세한 도시 분위기에 내 마음은 사르르 녹기 시작했고 해질녘 베키오 다리를 건넌 순간 이 사랑스러운 도시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에나 대성당
피렌체에 대한 애정이 샘솟자 근처에 있는 토스카나 주의 작은 도시들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얘기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더니 서울에 있는 지인은 내게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그 중 눈에 들어온 것은 조개 모양의 광장이 담긴 사진이었다. 광장은 고풍스러우면서 힘이 느껴졌는데 그 광장이 있는 도시의 이름은 시에나였다. 찾아보니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터라 난 하루 일정을 시에나에서 보내기로 했다.

시에나는 한때 피렌체에 버금갈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1300년대 페스트가 대유행하면서 인구의 절반을 잃게 된다. 이후 1559년 토스카나 대공국에 흡수된 뒤 피렌체와의 경쟁에도 밀려 쇠락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들에게 잊힌 덕분에 현재까지도 중세의 모습이 잘 보존되고 있다. 시간은 오래 흘렀지만 여전히 전성기 때의 건축물과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재가 남아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나는 '시타(Sita)' 버스를 타고 1시간30분을 달려서 시에나에 도착했다.

시에나의 버스 정류장
버스에서 내리니 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의 버스 정류장에 내린 기분이다(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그런 장소는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일단 관광객 무리를 따라가본다. 조금 걷다 보니 나의 레이더망이 가동되기 시작한다. 여기 어디 식재료 숍이 있을 분위기인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 규모 식재료 숍이 나타났다. 안에는 다양한 올리브와 소시지, 살라미, 선 드라이드 토마토와 트러플 잼까지 한국에서 쉽게 접하지 못한 식재료가 가득하다.
다양한 파스타
파스타의 한 종류 PICI
한참 눈을 반짝이고 있을 무렵 나의 눈에 들어온 파스타 면이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은 '피치(Pici).' 이탈리아에 와서 수많은 파스타를 섭렵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뭘까? 그 자리에 서서 구글링해봤다.

피치(Pici)는 손으로 말아서 만드는 굵은 파스타의 일종으로 토스카나 주의 시에나에서 유래했다. 반죽은 보통 밀가루와 물을 기본으로 하고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달걀을 넣어 만들기도 한다. 굵기는 가락국수면보다 조금 가는 편인데 이 파스타는 크기가 정해진 게 없어서 만드는 사람에 따라 길이나 굵기도 달라진다고 한다.

이탈리아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파스타가 있다. 파스타(Pasta)는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통칭하는 이탈리아 말인데, 우리나라에선 한때 '스파게티'가 '파스타'를 대신하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이젠 흔한 상식이 됐지만 스파게티는 파스타의 한 종류다. 파스타는 길이에 따라 롱 파스타와 쇼트 파스타로 나눌 수 있다. 롱 파스타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스파게티를 비롯해 탈리아텔레, 링귀니, 페투치니 등이 있고, 숏 파스타에는 펜네, 푸실리, 마카로니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속을 채워 만드는 (우리나라의 만두와 유사한) 라비올리와 수프에 넣어 먹는 작은 파스타인 스텔리네 등 그 숫자만 해도 350여 가지에 이른다.

파스타는 반죽 상태에 따라 '생 파스타(fresh pasta)'와 '건 파스타(dry pasta)'로 나뉜다. '생 파스타'는 일반 밀가루에 달걀과 물, 올리브오일을 넣어 반죽한 부드러운 면이라 짧은 시간 내에 섭취해야 한다. '건 파스타'는 세몰리나 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한 뒤 말린 면이라 장기 보관이 가능하다. 건 파스타는 시칠리아에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듀럼 밀이 잘 자라고 물 맛이 좋고 햇볕과 바람이 잘 통해 파스타를 만들기에 딱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반면 토양이 비옥하고 달걀이 풍부한 북부에선 생 파스타가 발달했다. 어느 면이 더 좋다기보다는 어디에 쓰이느냐에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건 파스타'를 이용한 요리들이 선보였는데, 최근에는 '생 파스타'를 쓰는 레스토랑도 늘고 있다.

오징어 먹물 파스타
파스타에서 면만큼이나 중요한 건 소스다. 내가 베니스에 갔을 때의 일인데 한 트라토리아에서 오징어 먹물 파스타를 주문했다. 스파게티 면에 오징어 먹물 소스가 버무려진 파스타였는데 모양이 꼭 짜장면 같았다. 옆 테이블에는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모녀가 있었는데, 소녀는 엄마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뭘 먹는 거야?" 아마 소녀의 눈에 새까만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기괴한 음식으로 보였나 보다. 우리에겐 짜장면 때문에 익숙한 그 새까만 형태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겐 무척 낯선 것일 테니 말이다.

파스타에서 면이 50%를 맡는다면 나머지 절반은 소스의 몫이다. 면에 어울리는 소스를 선택하는 일은 중요하다. 거친 느낌의 '건 파스타'에는 올리브오일 베이스의 토마토소스나 해산물 소스가 어울리고, 소스를 잘 흡수하는 부드러운 '생 파스타'에는 크림 베이스의 소스가 더 어울린다. 가늘고 긴 파스타에는 가벼운 소스, 두껍고 넓적한 파스타에는 무거운 소스, 모양이 복잡하거나 가운데 구멍이 있는 파스타에는 소스가 잘 배어 있을 수 있도록 걸쭉한 소스가 어울린다. 예를 들어 넓적한 칼국수 모양의 탈리아텔레에는 어떤 소스가 어울릴까? 라구 소스(토마토 미트 소스)라면 '굿 초이스'가 될 것이다.

시에나의 캄포광장
시에나는 축제중
시에나는 예상대로 고풍스러웠지만 힘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사진에서 봤던 조개껍데기 모양의 캄포 광장은 중세 시대로 시간 이동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축제를 준비하는 것인지 거리에는 다양한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리코타 치즈 토마토 소스의 라비올리
송로버섯과 호두 소스의 피치
도시를 걷다 보니 슬슬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두오모 근처를 걷다가 들어간 식당에도 '피치(Pici)'가 있었다. 다른 지역에선 맛보기 어려운 이 파스타를 이젠 시식해 볼 차례다. 메뉴판을 보고 리코타 치즈와 시금치가 들어간 토마토 소스의 라비올리와 송로버섯과 호두 소스의 피치를 주문했다. 피치가 접시에 담겨 나온 모양이 꼭 가락국수면 같다. 한 입 '호로록~' 입에 넣었다고 표현하고 싶지만 '후루룩~'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게 힘차게 들어간다. 입안 가득 씹는 맛이 쫄깃하면서 부드럽게 느껴진다. 호두 소스와의 조화도 아주 좋다. 내겐 새로운 파스타 피치(Pici)를 만난 것만으로도 시에나에 온 게 아깝지 않은 순간이다. 역시 토스카나의 소도시들은 사랑스럽다.

[정영선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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