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광대만큼 진보적인 사람도 없어..시대를 직접 얘기하잖아"

입력 2017. 12. 16. 09:46 수정 2017. 12. 1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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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광대 60년, 김덕수

농악 4개 악기로 사물놀이 첫선
"국악계의 지진 같은 사건" 평가
시각적 놀이가 실내음악으로
명맥 잃던 전통 연희에 새 숨결

사물놀이 세계화에 앞장서와
관현악단 협연 등 융합 시도
"우리 리듬 본질적 힘은 신명
시대 맞게 전통 재창조해야"

5살 때 남사당 무동으로 데뷔
7살 때 전국농악대회 우승 차지
6월항쟁 땐 해외공연 중단 귀국
'바람맞이'로 직접 현실 참여

"시대 아픔 함께하는 게 광대
전통시대 때도 힘있는 자 풍자"

[한겨레]

“전통시대에도 광대는 승려나 세도가 등 힘있는 자들을 비꼬고 풍자했다. 우리는 늘 그 시대를 얘기하는 사람들이다.” 김덕수 사단법인 한울림 예술감독은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시대와 호흡하는 광대론을 강조했다. 13일 오전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무용과 학생들에게 장구를 가르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같은 일을 60년 동안 지치지도 않고 해오는 힘은 뭘까. 게다가 은퇴는커녕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 길을 가겠다는 결심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물놀이 창시자인 김덕수 사단법인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감독을 만나기 전에 가진 의문들이다. 그의 답은 “신명” 한마디였다. 혼자만의 신명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슬퍼하고 아파했던 신명이었다. 인터뷰는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지하에 있는 사물놀이 전용 공연장인 인사아트홀 사무실에서 지난 12일 오후 진행됐다.

달리 예인이 아니었다. 우리 가락을 얘기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사뿐사뿐 춤사위를 걸었다. 팔은 손끝에서 어깨까지 공중에서 더덩실 굽이쳤다. 우리 징의 고유한 소리를 설명할 때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 열두번의 소리 고비가 그의 입속에서 살아났다. 김덕수(65) 사단법인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감독(이하 호칭 생략)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약 3시간의 인터뷰 동안에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올해가 광대로 데뷔한 지 60년이다. 주변의 지인들이 60주년 기념공연을 열어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더라.

“젊었을 때는 나도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나이 들고 철이 들어서인지 이제는 그런 것 없다. 60주년이라고 특별할 것 없으니 그냥 하던 대로 하자고 생각했다. 1월2일 인사동에서 길놀이로 올해를 열었다. 이것은 내년, 그러니까 다음달 초에도 한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지난여름에는 유럽 7개국과 러시아를 돌고 왔다. 일본에는 올해 초 ‘하나로 사물놀이단’을 만들고 왔다. 내 나름대로 6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행사였다. 일본의 제자들 가운데 남쪽 국적 두명과 북쪽 국적 두명 등 네명으로 구성했다. 남과 북이 유일하게 동질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게 바로 사물놀이더라. 남북 민족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교를 사물놀이단이 놓았으면 한다.”

밥 빌어먹을 남사당으로 이끈 아버지

김덕수의 광대 인생은 1957년 추석날 시작됐다. 그의 나이 다섯살 때였다. 차례가 끝나자, 아버지 김문학(작고)은 둘째 아들의 손을 잡고 대전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어린 덕수가 대문을 나설 때 가없는 눈물을 흘렸다. 형과 누이들은 전날 밤 그를 꼭 껴안고는 말없이 울었다. “밥을 평생 빌어먹어야 할 텐데 왜 그런 곳에 아들을 데려가느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당시에는 광대는 무시하다 못해 천시당했다. 어머니로서 마음이 아팠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간 곳은 조치원의 축제장이었다. 의용소방대 창설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난장 무대였다. 무대의 주인공은 남사당패였다. 남사당은 조선 후기에 전국을 유랑하면서 풍물과 줄타기, 탈춤, 땅재주 등 각종 기예를 자랑하고 굿판을 벌였던 유랑 예인집단 가운데 하나였다. 남자로만 구성된 남사당은 주로 경기도 일원에서 활동했으며, 1964년 해체될 때까지 가장 오래 존속했다. 김덕수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일본 징용에서 돌아온 뒤 남사당의 일원이 돼, 꽹과리 치는 상쇠와 벅구놀이(소고춤과 상모 돌리기) 등을 도맡았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인 덕수를 어릴 때부터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조치원 난장에서 김덕수는 인간탑 위의 꼭대기에서 춤을 추는 무동, 즉 새미를 맡았다. 새미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새미가 됐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

“자세하게는 그날 상황이 기억 안 난다. 내가 좋아했던 장터의 국밥에서 김이 나던 모습, 사람들이 박수 치면서 환호하는 광경 등을 어른들 어깨 위에서 보는 게 좋았다는 느낌으로 남아 있다. 그게 안 좋았다면 그 길로 안 갔을 것이다. 오히려 집보다 유랑하는 게 대우가 더 좋았다. 최고의 광대집단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남들이 보리밥 먹을 때 우리는 쌀밥에 육회를 먹었다. 솔직히 이래서 어른들이 그 천대에도 버텼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어릴 때부터 광대가 체질이었던 거 같다.

“즐겁지 않으면 못 한다. 나는 일찍부터 우리 신명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 좋았다. 그래서 아마 한평생 한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김덕수는 양도일 등 남사당의 전문 예인들에게 장구와 북, 꽹과리 등 사물뿐 아니라 어름(줄)타기와 땅재주 등 남사당의 여섯가지 기예를 모두 전수받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작은아버지 등으로 이어진 광대 기질을 타고난 그는 특히 장구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장구 신동이란 별명이 붙은 그는 일곱살 때인 1959년 전국 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전국적인 스타였다.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세계 무대로 진출했다. 1965년에 한국민속가무예술단과 리틀엔젤스 단원에 뽑히면서 국위선양 차원의 각종 해외 공연에는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냥 그렇게 장구 치고 상모 돌리면서 국위선양단의 공연 활동에 만족했다면 김덕수는 재주 많은 전통놀이꾼 하나로만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라져가는 민속예술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1960년대 근대화 바람이 불면서 전통예술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갔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는 농촌 마을에서 농악은 낡은 것으로 지목돼 사실상 금지됐으며, 대학가에서는 시위를 북돋는 데 사용된 풍물 도구가 압수되기도 했다.

2018년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인 사물놀이가 탄생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1978년 2월 사물놀이를 세상에 내놓은 김덕수 사단법인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감독은 12일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홀에서 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4차 산업혁명 등 시대의 변화에 맞게 사물놀이도 디지털과의 접목 등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수근·심우성, 사물놀이 탄생의 배후

이러한 전통예술의 급격한 내리막길에 대응해 1978년 김덕수가 내놓은 것이 바로 ‘사물놀이’였다. 꽹과리와 징, 장구, 북 등 네 종류의 타악기로 빚어낸 음악은 익숙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고을마다 전승되어오던 풍물 가락이라는 점에서는 우리 고유의 것이었지만, 마당에서 뛰면서가 아니라 실내의 무대 위에 앉아서 악기 네개로 화음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창조였다. 사물놀이가 우리 국악뿐 아니라 세계 음악계에 던진 파장은 깊고도 넓었다.

―사물놀이 탄생은 건축가 김수근(1986년 작고)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 않나?

“그렇다. 김수근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면 사물놀이는 탄생하지 못했거나 훨씬 늦었을 것이다. 70년대에 들어 나는 뭔가 다른 살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판에 쫓아다니느라 대학(단국대 요업과)도 중퇴했는데 우리 전통음악은 자꾸 밀리는 상황이어서 앞이 막막했다. 그래서 일본의 대학으로 무대 연출을 공부하러 가기로 결심하고는 자문하려고 평소 나를 아껴주던 김수근 선생 등 선배들을 찾아갔다. 말을 꺼내자마자 박살이 났다. ‘야, 이 미친놈아. 무대 연출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연희는 네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느냐’면서 혼을 내더라. 그러면서 ‘공간’ 사옥에서 전통예술의 밤을 한번 운영해보라고 했다. 김 선생이 지은 서울 창덕궁 옆의 ‘공간’ 사옥에서는 시 낭송회와 재즈 연주회, 무용 등 다양한 문화 모임이 한달에 한번씩 열리고 있던 때였다.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어떻게 무대에 올릴까 고민했다. 그때 민속학자인 심우성 선생이 꽹과리와 징, 장구, 북 등 농악의 기본 네 악기를 사용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사물놀이라는 이름도 심 선생이 지었다.”

그해 2월22일 제1회 전통예술의 밤에 사물놀이가 첫선을 보였다. 장구는 김덕수가 잡고, 꽹과리는 당시 최고 고수인 김용배(작고)가 맡았다. 북은 이종대, 징은 최태현이 잡았다. 경기도 용인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던 흥겹고 신명 넘치는 웃다리 풍물가락이 ‘공간’을 꽉 채웠다.

―첫 반응부터 굉장했다던데 사물놀이가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했나?

“그 전에도 이미 수없는 공연을 해봤지만, 사물놀이를 무대에 처음 올렸을 때부터 ‘이것이다’라는 확신이 왔다. 공연이 끝나자 ‘저럴 수도 있나’ ‘와! 좋다’에서부터 ‘미친놈들 아니냐’는 등 어느 쪽이든 놀랍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전통을 기본으로 하되 포맷을 완전히 바꿨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희가 시각적이었다면 사물놀이는 청각적인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시대 상황이 변한 만큼 새로운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무대도 실내, 즉 서양화된 무대로 들어와야 했다.”

김덕수 한울림 예술감독은 다섯살 때인 1957년 남사당패의 새미(무동)로 광대로 데뷔했다. 그는 12일 “나의 본질은 연주”라며 “쓰러지는 순간까지 장구채를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예술감독이 13일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무용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구 수업을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명맥이 끊겨가던 농악은 사물놀이라는 타악4중주로 새로 태어났다. “국악계에서 지진이 날 정도의 강력한 사건”(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에 음악인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대중은 열광했다. “온 국민이 속앓이하던 유신 말기 울분의 시기”에 “무대에서 꽹과리며 북이며 장구며 징을 땀을 뻘뻘 흘리며 두들겨대는 사물놀이는 일시에 시대적 분노를 날려버렸”(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기 때문이다. 사물놀이 공연 때마다 관중들이 넘쳤고, 그의 제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줄을 섰다. 김덕수는 1982년 가을 사물놀이를 들고 세계 무대에 처음 나섰다. 김덕수의 사물놀이패는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 타악인대회’(PASIC 82)를 말 그대로 흔들었다. 신명난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은 10분 이상 기립박수를 쳤다. 뉴욕 필하모닉의 수석 타악기 연주자인 모리스 랭은 당시 <뉴욕 타임스>에 “처음에 무대 위에 겨우 네개의 악기와 깃대 하나만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별다른 기대감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몇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모든 청중이 그들의 소리에 함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썼다.

―‘사물놀이’는 백과사전에 보통명사로 등재돼 있다.

“사물놀이가 탄생한 지가 내년이면 꼭 40년인데 그동안 세계화와 대중화가 이뤄졌다. 1984년 영국 더럼대학 음대에서 사물놀이가 정식과목으로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사물놀이팀이 만들어졌다. 전세계 50여개국에 사물놀이팀이 있고, 미국엔 대학만 해도 200개가 넘는다. 사물놀이를 전공으로 하는 교수가 나왔고, 그 제자들도 배출되고 있다.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의 호흡으로, 우리의 타법으로 그리고 우리의 보법으로 사물놀이를 하고 있다. 타악기 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꽹과리 하나, 장구 하나는 다 갖고 있다. 이들이 우리의 신명을 모티브로 많은 곡을 쓰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신명을 세계인에게 전수시켰다.”

사물놀이의 창시자인 김덕수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감독이 12일 서울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다. 그는 이날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신명은 세계 음악의 새로운 에너지가 되고 있다”며 “케이팝이 진정한 한류가 되려면 우리의 신명이 접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케이팝 성공하려면 우리의 신명 접목해야”

―사물놀이의 어떤 점이 세계 음악인을 사로잡았나?

“신명이다. 신명은 음악적으로 말하면 리듬이다. 쿠바의 살사, 아르헨티나의 탱고, 브라질의 삼바, 그리고 자메이카의 레게도 전부 리듬이다. 각 나라에 고유한 리듬이 먼저 있고, 작곡가나 편곡자가 이를 모티브로 대중들이 즐기는 음악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사물놀이가 구현하는 우리의 리듬은 메트로놈 기반인 서양의 리듬과는 다르다. 그들의 것이 직각 보행이라면 우리의 리듬은 혼합박이다. 그 리듬골이 수백개다. 그러한 새롭고 깊은 우리 가락이 세계 음악의 새로운 에너지로 떠오른 것이다.”

김덕수는 사물놀이를 고유의 어떤 특별한 것으로 가두지 않았다. 서양 고전음악이나 대중음악과의 협연 등 실험적인 공동작업을 끊임없이 해왔다. 1995년 유엔 창립 50주년을 맞아 미국 뉴욕의 유엔 총회장에서 가진 특별무대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날 정명훈이 지휘하는 케이비에스(KBS)관현악단과 함께 ‘사물놀이를 위한 협주곡 <마당>’을 연주했다. 또 김수철이 기타 산조를 만들고, 서태지가 <하여가> 작업을 할 때도 김덕수가 옆에 있었다. 무언극 <난타>도 그가 예술감독으로서 사물놀이 장단을 다듬어 만든 작품이다.

―그동안 다른 음악과의 협주 등을 꾸준히 해왔는데.

“서로 섞이고 교류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물놀이가 우리 것이라고 해서 혼자만 고여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물놀이의 바탕인 농악도 문화사적으로 보면 일찍이 이웃나라와 교류하고, 우리 사회에서도 동네마다 다르게 진화해서 우리 세대로 넘어온 것이다. 시대 변화에 맞게 스스로도 변하고, 다른 음악과도 만나면서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

―일렉트릭 사물놀이는 그런 모색의 결과인가?

“나는 낙랑악극단이라고 혜은이 아버지가 단장을 맡았던 유랑 악극단에서 1960년대 초 활동했다. 윤복희, 혜은이, 하춘화 등 극단 멤버가 화려했다. 거기에 장구 치러 갔다가 드럼도 배웠다. 그때 드럼을 치면서 상모를 돌렸다. 일종의 음악적인 융복합이었다. 내 제자 중에는 버클리 음대를 간 친구도 있고, 지금 미국인 제자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유학 오기도 한다. 그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 드럼 치면서 상모 돌리듯이 동서양 음악을 융합하라고 말이다. 그래야 세계 최고가 된다. 일렉트릭 사물놀이는 3년 전에 상상마당에서 처음으로 연주했다. 지금까지 12곡을 만들었는데 내년에는 음원도 출시할까 한다. 클럽에서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사운드에 꽹과리와 징, 장구, 북소리를 넣었다. 한마디로 전자음을 우리 것화한 것이다.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하다. 청년들이 우리의 신명을 우리 악기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케이팝이 세계적으로 뜨고 있는데 그것도 좋지만 진정한 한류가 탄생하려면 우리의 신명이 접목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의 케이팝은 결국 마이클 잭슨류이고, 서양의 신명이 아니냐. 우리 것이 없으면 남의 나라 흉내내기밖에 안 된다.”

김덕수 예술감독은 1957년 남사당의 새미(무동)로 데뷔한 뒤 민속공연계의 스타가 됐다. 1961년 당시로는 최고 공연단체였던 낙랑악극단에서 활동하던 때의 모습. 김덕수 제공

―우리 것을 바탕으로 한 음악적 융복합이 핵심이라는 뜻인가?

“그렇다. 그건 절대적이다. 주변국가에 가면 사람들이 나한테 엎드려 절한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 신기 같은 것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거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것은 앞으로 인류 미래를 위한 큰 재산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이런 기운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앞으로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 전통의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에 해답이 있다고 본다. 신명이라는 본질은 영원하겠지만, 형태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장구에 전기선을 연결해야 할 수도 있다. 전자 꽹과리도 나올 것이다. 기계음과 합성음이 우리 가락에도 들어올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것도 해야 한다. 시대 흐름을 받아들여야 살아남는다. 물론 근본은 안 변해야 한다.”

―그 근본이 뭔가?

“우리가 갖고 있는 맛과 멋이다. 호흡에 따라 덩실대고, 둥글게 감기는 소리가 그것이다. 전통 무예인 택견의 동작과도 닮았다. 이건 학문적으로 보면 우주의 원리에 뿌리를 둔 동양 문화에 가닿는다. 덩실대고 감아 싸는 장단의 구조가 바로 우리 가락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그게 없으면 아무도 안 듣는다. 이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김덕수 예술감독은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 시절부터 해외 공연을 다녔다. 1965년 한국민속가무예술단의 일본 순회공연 때 찍은 사진. 맨 오른쪽 김 예술감독과 그 옆 이미자씨. 김덕수 제공

미국 대학 대신 한예종을 택한 까닭

영감을 주는 세계적 음악가 김덕수에게 미국 워싱턴주립대학은 종족음악과 교수직을 제안했다. 1997년 무렵이었다. 미국 교수직은 사물놀이를 세계화하려는 그의 바람과도 부합했다. 그는 시애틀에 집까지 구했다. 그즈음 한예종에서 전통예술원을 만들면서 연희과 교수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 대학이 더 끌릴 수도 있었을 텐데 한예종을 택한 이유는 뭔가?

“간단했다. 말로는 농악을 우리 민족문화의 풀뿌리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천대해왔다. 그런 속에서도 꿋꿋하게 해왔던 예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놀이판, 즉 연희가 대학 과정에 생긴다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떠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연희과를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예인들은 만세를 불렀다. 미국에서 사물놀이를 널리 알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사물놀이의 고향에서 우리 음악의 기본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일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판소리 명인 안숙선 등과 함께 교육부 심사를 통과해 한예종 교수가 됐다.

―처음 만들어지는 학과여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국악과는 1959년 서울대 음대에 생겼지만 주로 기악 중심이었다. 한예종의 연희과는 우리의 전통적인 공연예술을 5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학 과정에 끌어들였다.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전공도 교재도 다 새로 만들어야 했다. 연희, 무속, 풍물을 지역적으로는 영남과 중부, 북쪽 등 3개 지역으로 나눠서 총 10개의 전공을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교재도 그동안 10개를 썼다. 그러다 보니 20년이 지났다. 이제는 졸업생들에 의해 새로운 창작 연희집단이 만들어지더라.”

―내년 초에 정년 퇴임하는데 이후 계획은 뭔가?

“내년은 사물놀이 탄생 40주년이다. 거기 맞춰 사물놀이 4.0시대를 선언해볼까 한다. 디지로그 사물놀이가 그것이다. 예전에도 실험은 해봤는데 이번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완전히 결합시키려고 한다. 즉, 디지털로 만든 홀로그램 영상과 아날로그 사물놀이의 라이브 음악 및 춤을 극장 전체를 무대로 결합한 작품이 될 것이다. 대본도 이미 나왔다. 작품 이름도 사물놀이전으로 붙였다. 혼란스러운 이 시대를 얘기하는 작품이다. 내년 춘삼월에 초연을 하려고 하는데 성공하면 롱런시키려고 한다. 브로드웨이에 가면 수십년 하는 뮤지컬이 있지 않나. 사물놀이전도 잘되면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건가?

“그렇게 안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원래 전문 예인 정신은 끝없는 도전 정신이기도 하다. 자기는 망해도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주고 그 길을 따라오게 만드는 그런 도전 말이다.”

꽹과리와 북, 장구, 징으로 이뤄진 사물놀이는 1978년 2월 창덕궁 옆 ‘공간’ 사옥에서 첫선을 보였다. 초창기인 1981년 사물놀이 공연 모습으로, 오른쪽 둘째가 김덕수 예술감독. 김덕수 제공

저항정신 담긴 김덕수의 수염

김덕수의 트레이드 마크는 수염이다. 반짝일 정도로 윤기나는 뺨에 덥수룩하게 자란 그의 콧수염과 턱수염은 예인 김덕수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그의 수염은 멋이 아니라 저항정신이다. 서울에서 열린 88올림픽을 일년 앞둔 1987년 그는 연초부터 일종의 문화사절단으로 사물놀이패를 이끌고 전세계를 돌고 있었다. 올림픽 홍보의 일환으로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한 순회공연이었다. 미국과 유럽 공연을 마치고 동남아 지역만 남겨둔 상태에서 그해 6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보따리를 싸서 귀국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예술로 시대에 참여했다.

―6월항쟁 때부터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

“그해 초 ‘경찰이 책상을 탁 치니까 박종철이 억 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에 이어 7월에는 이한열이 죽었다. 그런데 공연문화예술계에서 시국선언만 하지 작품으로 시대를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해보자는 생각에서 동남아에서의 사물놀이 공연을 포기하고 중도 귀국했다. 그러면서부터 수염을 길렀다. 백기완 선생이 작명한 시국춤인 ‘바람맞이’를 대학로 연우극장에 올렸다. 우리의 사물놀이 연주에 맞춰 춤꾼 이애주 서울대 교수가 물고문, 불고문을 몸으로 표현했다. 꽹과리와 징, 장구, 북이 내는 울림은 그 시대의 아픔을 토해내는 뼈저린 울음이었다. 김민기 형이 스태프로 일했던 연우극장에 사람이 많이 몰려서 난리가 났다. 수입금은 전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에 기금으로 냈다. 앙코르 공연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했는데 끝나면 참가자들이 바로 시위에 나섰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뒷문으로 나오고 그랬다. 그것은 현실 참여였다.”

―원래 예술이라는 게 시대와 호흡하지 않나?

“그렇다. 사람들이 진보니 보수니 얘기를 하는데 우리 광대만큼 진보적인 사람도 없다. 그 시대를 직접 얘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에도 광대들은 당시 시대를 비꼬고 풍자했다. 승려가 잘못한 것이나 세도가의 위세 부리기 등등 당시 힘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렸다. 물론 막힌 것을 풀어주는 해원상생이 기본이다. 나는 1980년대 초에도 이른바 비판적인 작품에 출연했다. 1981년 서울 세실극장에서 현대판 토끼전인 ‘토선생전’ 공연이 있었다. 당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을 문어에 비유한 작품이었다. 임진택이 연출하고, 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최종원이 토선생 역을 맡았다. 잡혀갈 수도 있었지만 아랑곳않고 참가했다. 그런 삶을 사는 게 광대들이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사태 때 우리 연희과 학생들이 가장 먼저 치고 나가더라. 죽은 이의 혼을 달래고, 사람들을 신명나게 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그게 예술의 본질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예술인들을 탄압한 것은 무식한 일이었다.

“과거 정권에서 어느 정도의 블랙이나 화이트 리스트는 다 있었겠지만, 지난 정권에서는 너무했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 등 극한 상황을 지내온 건데 너무나 심하게 노골적으로 문화예술계를 나눠서 관리했다. 나도 한때 혼난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인데 그의 행보가 너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고인이 된 신해철과 노란 돼지저금통 모금운동을 하는 등 생전 처음으로 정치인 지지 운동을 했다. 그 뒤 정권이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옛 이름)으로 바뀌더니 그전에 했던 일도 못하게 막더라. 후배들이 나한테 ‘형은 좌빨로 분류돼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나는 물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는 정치적으로 예술인을 재단해서 차별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한다. 누구나 편하게 예술가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하고 그것을 인정하면 된다.”

1995년 유엔 창립 50주년 기념 특별공연이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열렸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사진 앞쪽)는 정명훈씨가 지휘하는 케이비에스관현악단과 협주곡 <마당>을 협연했다. 김덕수 제공
김덕수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감독이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와 함께 꽹과리를 치면서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다. 김덕수 제공

“쓰러질 때까지 장구채 안 놓을 것”

세계 음악수업에 사물놀이가 정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김덕수의 마지막 꿈이다. 그 기초는 이미 마련했다. 피아노를 오선지에 그렸듯이, 책으로 우리의 리듬을 익힐 수 있는 교칙본을 피아니스트 임동창과 함께 그가 만들었다. 1990년 ‘장구의 바이엘’로 불리는 장구 책이 그것이다. 이제 책과 비디오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나 장구 등 사물 악기를 배울 수 있다. 그는 태권도의 전세계 보급에 주요한 구실을 한 태권도협회처럼 사물놀이협회도 만들 계획이다. 또 대한민국 타악을 총정리하는 타악 대강을 쓰는 것도 필생의 목표 중 하나다.

―세계 음악교실에 사물놀이 수업이 포함되는 날이 올까?

“장기적으로는 그래야 사물놀이가 살아남을 수 있다. 나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내가 다 못하면 후배들이 해줬으면 좋겠다.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하다. 미국 같은 경우 우리의 농악이나 마찬가지인 마칭밴드에 사물놀이를 접목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정규 교육화가 빨라질 것이다. 일종의 사물 고적대를 만들어서 슈퍼볼 하프타임 때 나가게 하는 거다. 이것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교수 퇴임 이후에 할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사물놀이를 다음 세대에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한 작업들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물론 저라는 존재의 본질은 연주다. 저는 연주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고, 그게 최종 목표다. 연주를 하면 힘이 나고 재충전된다. 쓰러지는 순간까지 장구채를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두드리는 예인이 되고 싶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우연히도 방송인 송해(90)가 인사동의 인근 식당에 왔다며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둘은 낙랑악극단에서 함께 활동했다. 인사하러 들른 김덕수를 보고, 송해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몸으로 표현해내는 사람”이라고 반겼다. 김덕수가 표현해온 게 어디 ‘우리 민족의 마음’뿐일까. 분명 그는 원초적인 힘인 인간의 심장 소리를 좇고 있으리라.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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