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계약에 우는 예술인들
ㆍ을의 위치에서 계약내용 속속들이 알지 못해 저작권 잃는 경우 많아
일러스트 작가 박모씨(34)는 ‘수정 요청’을 “아주 익숙하면서 아주 괴로운, 무좀 같은 존재”라고 비유했다. 광고용 또는 출판용의 일러스트나 삽화를 주문 받아 그려 보내면 ‘갑’의 입장인 클라이언트 쪽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수정할 부분을 지적해 보낸다. 박씨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시지푸스의 바위”이기도 한 이 수정작업은 박씨의 경험으로는 30여회까지 반복되기도 했다. 업계 안에서는 100컷이 넘는 수정본 일러스트를 보낸 작가가 있다는 소문이 아무렇지도 않게 떠도는 판이니, 박씨는 그나마 자신은 다행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위안했다. 하지만 관행은 관행이고, 엄밀히 따지면 계약 위반인 것은 분명하다. 계약서에 컷 수를 명시하고 컷당 대금을 받기로 해놓지만, 발주자의 수정 요청에 따라 그렸다 사라지는 수십 컷에 대한 대금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매절계약에 계약 불이행까지 다반사
‘을’의 위치에 있는 예술인들이 계약 관련 내용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점을 악용해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서를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캐릭터 디자이너 ㄱ씨가 캐릭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업체인 ㄴ사의 계약서에 사인한 것도 무지 때문이었다. ㄱ씨는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가 ㄴ사에서 일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받는 내용의 근로계약이라고 생각했다. ㄱ씨가 창작한 캐릭터를 사업에 활용한다는 내용의 저작권 계약이 들어가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ㄱ씨는 애당초 ㄴ사가 자신에게 저작권 계약금을 주지 않은 것을 저작권 계약이 없어서라고 판단한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깡통계약’에 당하고도 업계에 남으려면 참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통이 터진다.
지난해 개정된 ‘예술인복지법’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예술인과의 계약 시 서면계약을 의무화하는 것이었다. ‘최고은법’이라는 별칭처럼 열악한 예술창작 여건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에게 최소한의 법적 안전망을 제공한다는 취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불공정계약을 강요받는 관행에 더해 을의 입장에 있는 예술인들을 향한 인권침해까지 만연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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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문화예술인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문화예술계의 불공정 관행 개선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
서울시가 시행한 ‘문화예술 불공정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박씨가 경험한 것과 같은 일러스트 업계의 불공정계약 건수는 아무 문제가 없는 계약 건수보다도 더 많았다. 불공정한 계약조건을 강요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변한 응답비율이 전체의 79%를 차지한 것이다. 계약에서 보장한 범위를 넘어서는 ‘과도한 수정 요구’(23.6%) 외에도, 시안을 만들어 제출해도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관행(20.2%)과 일정 금액만 받고 2차 콘텐츠 창작 및 사용 권리를 모두 넘겨야 하는 매절계약을 강요 받는 사례(15.2%)가 대표적인 불공정계약 관행에 꼽혔다. 그밖에도 작가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되는 계약해지권(12.6%) 문제가 지적됐다.
특히 최근 들어 더욱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신규 진입하는 예술인들이 많은 웹툰·만화 분야에서는 한 번의 계약으로 업체가 모든 저작권을 넘겨 받는 매절계약이 이뤄지는 비율이 더욱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장 신인 작가가 들고 온 작품이 향후 어느 정도의 인기와 수익을 거둘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논리로 해당 작품에 대한 판권 계약만 맺는 것이 아니라 해당 콘텐츠를 바탕으로 가공한 다른 유형의 콘텐츠 활용 권리까지 한꺼번에 계약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식이다. 이러한 2차 저작물 매절계약(31.4%) 못지 않게 수익배분을 부당하게 집행하는 계약 불이행(31.4%) 등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인복지재단 신문고에 접수된 민원 역시 불공정계약 체결과 대금 및 보수 미지급 등에 집중된 점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최근 5년간 접수된 건 중 88.7%가 임금체불을 포함한 수익배분 거부로,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매절계약의 문제는 1차 저작물과 함께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2차 저작권의 가치를 계약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셈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서울시가 법률 전문가들을 통해 검토한 결과 “저작권을 전부 양도하더라도 특약이 없는 한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은 양도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권리를 모두 양도하도록 하는 것은 저작자가 더 나은 조건으로 제3자와 계약을 체결할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불공정계약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때문에 매절계약 내용이 담긴 계약서만으로는 사업주가 예술인의 2차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법률적 지식 부족과 소송에 대한 부담 때문에 예술인 스스로 권리를 찾는 데 장기간을 쏟아붓기 어려운 실정이다.
업계서 살아남으려면 참을 수밖에 없어
불공정계약으로 피해를 입는 액수 자체가 크지 않다는 점 역시 예술인들이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평균 340만원(일러스트 분야)에서 많을 경우 766만원(웹툰 분야) 수준인 피해액이 당사자인 예술인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임에도 한편으론 다른 계약을 따내기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 불공정계약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계약상의 지위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취약한 이런 입장은 업체로부터 받는 인권침해의 위협에도 쉽게 노출되게 만든다. 서울시의 조사에 참여한 예술인 834명 중 3분의 1이 욕설과 성희롱 등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웹툰 어시스턴트로 활동하는 작가 한모씨(26)는 “운이 좋아 계약 자체는 깔끔하게 문제 없이 했다고 해도 업체 쪽 담당자한테서 인격적인 모욕을 받을 가능성은 또 다른 차원에서 남아있다”며 “차라리 ‘열정페이’급의 보수를 받더라도 사람 좋은 담당자를 만나는 게 마음은 더 편하다는 의견도 많다”고 전했다.
서면계약이 의무화되면서 표준계약서를 마련하고 계약 실무교육을 진행하는 등의 정책적 지원도 있지만 아직 업계에 남아있는 관행을 뿌리뽑기에는 역부족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인복지재단을 비롯해 서울시 등의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예술인 공정계약 지원사업에 예술인들이 적극 참여하는 것이 불공정계약으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시 관계자는 “예술 활동을 하면서 불공정계약으로 피해를 입었거나 계약서 자문을 원하는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무료 법률상담 등을 제공한다”며 “‘문화예술 호민관’으로 이름 붙인 전문가를 예술인 단체에 파견해 지원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업계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불공정계약이 만연하고 있는 데에는 제도를 더욱 구체적으로 손질하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 예술인복지법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의 불공정행위 신고·조사절차 명시와 처벌규정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웹툰협회 관계자는 “노조를 구성할 수 없는 예술인들이 구성한 단체를 통해 업체와의 계약과 거래조건 협의 과정에서 지원할 수 있게 보장하는 내용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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