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 맞고 자란 기억 끔찍한데, 내가 37개월 딸을 때리고 있네요
#연년생 키우며 불쑥 폭언.폭력 나와
강도 안 세지만 훈육인지 학대인지…
어릴적 엄마는 딸인 내게만 집안일
큰오빠는 훈육 핑계로 툭하면 폭력
가족들 불같은 오빠 대신 내 탓만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훈육과 학대 사이에서 늘 헷갈려요. 습관적으로 아동 학대라는 말을 검색합니다. 제 큰딸은 이제 37개월이에요. 늦게 결혼해 낳은 자식이고 당연히 제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다음해 아들을 낳고 두 아이 육아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폭력적인 말과 행동이 튀어나와요.
큰딸이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동생을 할퀴거나 물 때 화를 주체하기 힘듭니다.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가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애를 이불 위에 넘어뜨리고 엉덩이나 발바닥을 사정 없이 때려요. 제 분이 풀릴 때까지요. 그러고 나면 너무 후회가 돼 일주일 정도는 안간힘을 써서 참습니다. 하지만 결국 도돌이표예요. 아이가 이유 없이 칭얼대거나 억지를 쓰면 참았던 것까지 합쳐서 폭발해요.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왜 나를 화나게 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아이한테 소리 지르며 책임을 전가하는 제 자신이 정말 어른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학대가 저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학대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늘 마음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저희 가정이 그런 곳이었거든요.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 부모님은 맞벌이 하느라 늘 바쁘셨어요. 엄마는 직장을 마치고 저녁에 살림까지 해야 해서 굉장히 예민했습니다. 위로 오빠 둘이 있는데 딸이 저 하나이다 보니까 집안일을 돕지 않는다는 원망은 주로 저에게 쏟아졌어요. 설거지도 안 해놨다고 엄마가 제게 짜증을 내는 동안 오빠 둘은 강 건너 불 보듯이 구경만 했습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땐 죄책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주말에 빨래 개는 엄마 옆에서 숨도 못 쉬었던 기억이 있어요.
폭력에도 굉장히 무관심한 분위기였어요. 큰오빠는 집안에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폭탄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오빠에게 어릴 때부터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맞았습니다. 말대답을 하거나 밥상을 안 차리거나 하면 부모 대신 훈육을 한다며 때렸어요. 부모님은 오빠를 말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의례적으로 “그러지 마라”는 말조차 안 하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은 오빠에게 따귀를 세게 맞고 엄마를 붙잡고 울었더니 “또 뭘 잘못했길래 그러니”라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큰오빠를 무서워해 문제를 회피했던 게 아닌가 해요. 불 같은 아들과 부딪히느니 그냥 저 하나 맞도록 두는 게 더 편하니까요. 저만 조용히 시키면 자기들끼리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저는 어려서부터 폭력에 예민했습니다.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 아동이라고 해도 때리는 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저는 뭔가에 쉽게 도전하지 못하고 패배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레 포기하는 성향이 강한데 그 원인이 유년기의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아이를 낳는다면 자존감 높고 밝고 피해의식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육아를 해보니 왜 이렇게 마음 같지 않을까요. 최근엔 잠깐 눈을 돌린 사이 대리석 바닥 위에 동생을 홱 밀어 넘어뜨리는 딸아이의 머리를 저도 모르게 때린 적도 있습니다.
다른 엄마들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잘 받아주는지 신기하기만 해요. 아이에게 친구가 있는데 그 집 엄마를 너무 좋아해요. “엄마보다 00엄마가 더 좋아”라며 그 집 엄마 손을 잡는 아이의 천진한 행동에도 저는 상처를 받네요. 가장 가슴이 철렁할 때는 딸이 맞은 뒤 제가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할 때입니다. 저도 자존심 때문에 눈물을 꾹 참았지만 사실은 너무 두려워 죽고 싶었거든요.
제가 하는 건 학대일까요. 어릴 때 속수무책으로 맞으면서 품었던 분노의 응어리를 제 소중한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마음 같아선 어디 신고를 해서라도 저를 말리고 싶습니다. 아이가 심하게 다칠 정도로 때리는 건 아니지만, 아이를 울리고 마음을 짓밟는 게 계속된다면 분명히 학대일 거라고 생각해요.
(김서희, 가명ㆍ38세ㆍ주부)
#보호받아야 할 때 부모가 역할 못해
어른 돼서도 공포와 좌절감 컸을 것
학대 속 자란 사람이 또 학대 되물림
이유불문 때리는건 훈육 아닌 학대
상처 먼저 돌아보고 육아 공부해야
서희씨, 당신이 하고 있는 건 학대가 맞습니다. 이 말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신체적ㆍ정서적으로 건강하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 문제를 일으키는 모든 행위를 학대라고 봅니다. 언어적 학대에는 욕설과 심한 비난, 모욕, 핀잔을 주는 것들이 포함돼요. 신체적 학대는 때리는 것인데, 살살 때리든 세게 때리든 학대입니다. 학대에 강도는 상관이 없어요. 그렇다면 모든 체벌이 학대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실수가 아닌, 때리려는 의도로 때린 건 다 학대예요.
저는 서희씨를 야단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당신은 딸을 때리면 안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어요. 훈육과 학대 사이에서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설령 훈육의 의도라 해도 때리는 행위는 절대 안됩니다. 그 출발은 어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때릴 권리는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설사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타인을 모욕하고 때릴 권리는 없습니다. 서희씨는 자신의 행동이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스스로 멈추길 바라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여기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갖추는 거예요. 아이가 나를 짜증나게 해도, 하지 말란 짓을 또 해도, 나쁜 짓을 해도, 때리는 건 학대입니다. 이유불문이에요.
체벌 없이 양육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체벌 보다 더 가증스러운 말이 사랑의 매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주장이 정당하려면 체벌의 모든 단계에서 부모의 감정이 철저하게 조절되고 통제돼야 해요. 그런데 이렇게 철저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체벌이 아닌 말로 훈육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요. 제 얘기는, 그렇다면 말로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부모가 자신을 통제하는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를 너무 믿어버려요. 자기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그러나 전 여기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을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이건 마치 음주운전과도 같아요. ‘이 정도 마시면 충분히 운전할 수 있어’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취한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제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자신을 믿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스스로를 믿는다면 그 믿음을 운전하는 데 쓰지 말고 운전을 안 하는 데 쓰시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맞았을 때 느끼는 충격이 반성이나 각성을 일으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맞으면서 모멸감을 느끼고 공포감에 떨어요. 서희씨도 어린 시절 공포에 두려워 떨었죠. 그리고 그게 어른이 돼서도 남아 뭔가를 시도하지 못하고 지레 포기해버려요. 그 공포와 불안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건 ‘내가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부모님이 나를 보호하고 가르쳐줄 거야’라는 견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서희씨는 최악의 가정환경에서 자랐어요. 폭력에 쉽게 노출됐고, 집안의 누구 하나 그 폭력을 지적하지 않았죠. 오빠가 서희씨를 때릴 때 “동생이 무슨 잘못을 했든 때리는 건 절대 안 돼”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그러나 부모님은 그 역할을 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왜 까다로운 애를 건드리냐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집에서 가장 약자인 서희씨의 탓으로 돌렸죠. 부모는 자식에게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을 줘야 해요.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글의 첫 줄에서 마치 부모처럼, “이건 학대입니다, 멈추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어린 서희씨에겐 이 말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리고 현재의 서희씨에게도 필요합니다.
학대는 대물림되기 쉬워요. 서희씨는 폭력을 당하며 마음 속의 분함과 억울함을 표출할 기회조차 없었어요. 또한 성장 단계에 있어 그 나이에 맞는 대우를 받지도 못했어요. 집에서 가장 어린 막내가 엄마 대신 가사를 도맡는 건 말이 안 돼요.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시켜야 하는 일과 시켜선 안될 일이 있는데 서희씨는 이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수용을 받지 못했어요.
서희씨가 지금 딸아이의 연령대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은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경험하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얼마나 노력한 줄 알아”는 보통 남편이나 친구와 싸울 때 쓰는 말이죠. 37개월 아이에겐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때리는 것 대신 다른 걸 해줘야 해요. 딸이 동생을 대리석 바닥 위에 밀었다고 했죠. 이때 부모가 할 일은 아이를 때리는 게 아니라 바닥에 푹신한 매트를 까는 거예요. 매트를 깐다는 건 아이가 당연히 그럴 거라 예측하고, 그 나이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서희씨,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요. 누워 있으면 넘어질 일도 없지만 걷기 시작한 이상 부딪치고 넘어집니다. 부모는 아이가 일으킬 문제를 예측하고,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환경을 조정하고, 아이를 가르치고 지도해야 해요. 문제 행동이 있을 때마다 아이를 나무라서 분을 풀려고 한다면 스스로의 감정에 압도되고 말아요. 서희씨에게 묻고 싶어요.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니 아이가 고쳐지던가요. 맞은 뒤엔 동생을 밀지 않던가요.
학대 속에서 자란 사람은 학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희씨는 본인의 문제를 알고 있고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고 싶어해요.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면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세요. 그리고 아이의 발달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갖도록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정리=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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