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한 만큼 받는 '칼임금'은 왜 없나

2017. 12. 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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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장시간 노동의 주범 ‘포괄임금제’… 초과노동 수당 줄이는 수단으로 악용

직장인들에게 ‘칼퇴근’은 일종의 가상현실과도 같다. 현실 같지만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칼퇴근이 뜻하는 정시퇴근은 정시에 출근해서 계약된 노동시간을 채워 일했다면 마땅히 누릴 법한 권리지만, 이 당위는 현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외국인 출연자가 ‘칼퇴’라는 용어가 따로 쓰일 정도로 정시퇴근과는 거리가 먼 한국의 노동현실을 꼬집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각종 수당을 기본급과 묶은 포괄임금

그와 반대로 ‘칼임금’, ‘칼월급’이라는 말은 아예 쓰이지도 않는다. ‘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노동시간과 그에 따른 임금을 정확히 셈하지 않고 ‘퉁쳐서’ 지급하는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잡은 탓이다. 그나마 ‘칼퇴’의 기쁨은 가뭄에 콩 나듯 맛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연장·야간·휴일노동을 가리지 않고 법정 노동시간을 넘어가며 일해도 일한 만큼 지급받는 ‘칼임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셈이다.

‘일한 만큼 받는다’는 이 원칙은 자본주의적이다. ‘필요에 따라 보상한다’는 사회주의의 강령보다 훨씬 유연하다. 하지만 원칙이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관행의 힘은 강했다. 이런 현실에 정부가 제동을 걸겠다고 나섰다. 고용노동부는 현재 만연해 있는 장시간 노동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포괄임금제’를 규제하는 내용의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포괄임금제가 노동시간을 명확히 산정하기 어려운 직종에 한해 연장·야간노동 등에 지급돼야 할 임금을 기본급과 묶어 일정액을 지급하는 식의 계약방식이지만, 현실에서는 ‘인력 자유이용권’이라 불릴 정도로 초과노동분에 대한 임금 지급 없이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한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단,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경영계의 저항을 넘어야 한다.

서울 강남의 한 빌딩이 야근을 하는 사무실들로 환하게 밝혀져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디자인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ㄱ씨의 월급도 ‘포괄임금제’에 묶여 있다. 겉으로만 보면 ㄱ씨의 직장은 노동시간이 일정치 않아 포괄임금제를 적용할 피치 못할 여건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급한 마감을 앞둔 때면 IT업계의 ‘크런치모드’처럼 야근은 물론 철야를 밥먹듯이 하며 일정을 맞춘다. 자정을 넘겨 퇴근하는 것은 물론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잠깐의 수면을 위해 직원을 퇴근시킬 때도 있다. 이렇다 보니 퇴근시간은 물론이고 출근시간도 확실히 정하기 힘들다. 일주일에 하루 ‘리프레시 휴가’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휴무일도 지난주 토·일요일을 모두 일했을 때만 주어진다. 토·일요일 중 하루라도 쉬었다면 대체휴무일은 없다.

일이 너무 많고 일하는 시간을 정해놓기 어려운 사정이야 그렇다 쳐도, 가장 큰 문제는 포괄임금제라는 이름으로 연봉이 고정돼 있다는 데 있다. 주당 법정 노동시간인 52시간을 훌쩍 넘겨 그 두 배로 일해도 초과노동시간에 따른 수당은 없다. 3개월 수습기간에는 그마저도 정해진 임금의 85%밖에 받지 못하고, 업계 바닥이 좁아 괜히 나섰다가 퇴사하면 다음 취업에 불이익이 올까 두렵기 때문에 쉽게 그만두기도 어렵다. ㄱ씨는 “익명으로 신고해도 신고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질지 몰라 두려운데, 방법을 찾기 힘들어 매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보대행업계에서 일하는 정모씨(30)의 근무시간과 임금 역시 포괄임금제에 묶여 있다. 주로 언론사의 기자들을 상대로 홍보업무를 해야 하는 일의 특성상 낮밤을 가리지 않고 마감에 쫓겨 연락이 오는 기자들을 응대해야 한다. 홍보대행을 맡은 업체의 신제품 행사 등 굵직한 일이 잡힌 때는 회사에서 숙식을 겸한다. 행사가 월요일이면 주말 내내 상사의 업무지시를 받아야 하고, 급한 행사 준비가 아니더라도 평일 오후 11시를 넘기는 야근은 기본이다. 외근을 다녀올 일이 많은 낮시간 동안 마무리할 수 없는 내근 업무는 사무실로 돌아와 밤까지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법정노동시간 넘기면 당연히 보상해야

정씨에게도 연봉협상 과정에서 과도한 업무량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노동조합도 없고, 첫 번째 협상 테이블에 앉은 최선임 직원이 회사로부터 ‘통보’받는 것에 가까운 임금인상률이 제시되면 나머지 직원들도 사실상 정해진 인상률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정씨는 포괄임금제가 아니라 시급에 따라 급여를 계산해도 초과노동시간분을 더하면 회사 지급액보다 대략 500만~600만원은 더 받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다음 임금협상 때 그냥 한 번 세게 (임금을 올리라고) 질러보고나 떠날지, 아니면 조용히 근무여건이 나은 회사를 알아볼지 고민 중이다. 어찌 됐든 이 회사에는 더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기준 상시고용 노동자가 10인 이상인 기업에서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는 비율은 52.8%에 이른다. 포괄임금제 자체는 근로기준법 등 현행 노동법과 배치되는 계약형태는 아니다. 법정 노동시간 범위 내에서 연장·야간노동에 대한 임금을 기본급과 한 묶음으로 지급하는 것 자체는 위법하지 않다. 하지만 휴일노동수당이나 휴가 미사용 수당을 포괄임금제 적용범위에 넣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고,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에 포괄임금제가 명시되지 않았거나 직원의 동의가 없었다면 효력이 없을 수 있다. 포괄임금제를 적용받는 직장이라도 법정 노동시간을 넘긴 노동시간에 따른 임금은 통상임금의 1.5배로 쳐서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부는 노동시간을 정확히 재기 어려운 영업사원이나 운수업 등 일부 업종에만 적용돼야 할 포괄임금제가 현실에선 IT업계를 비롯, 사무직과 서비스직 등에도 확산돼 기업이 초과노동수당을 줄이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노동부는 특히 일반적인 사무직 노동자에겐 포괄임금제를 적용하지 않게 하겠다는 방침을 명확히 했다. 일반 사무직은 회사 관리자의 관리 하에서 노동을 제공하고, 출·퇴근시간과 휴게시간이 명확히 정해져 있으므로 노동시간 산정이 어렵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부의 포괄임금제 규제 방침에 대해 경영계에서는 노동현장에서의 구체적 실정을 감안하지 않은 조치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노동경제연구원은 ‘정부 임금정책 진단과 과제’ 토론회를 통해 정부의 포괄임금제 규제에 대한 비판 의견들을 제시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법무법인 태평양의 이승철 변호사는 포괄임금제 규제의 법적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성과에 민감한 업계에서는 대체로 일과시간이 끝나고도 직원들 스스로가 알아서 초과근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고, 정부가 인위적으로 포괄임금제 규제를 시행해도 그로 인한 근로시간 단축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경영계의 주장과는 달리 이미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는 사업장의 초과노동시간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더 길다는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말 펴낸 ‘사무직 근로시간 실태와 포괄임금제 개선방안’ 보고서를 보면 포괄임금제를 적용받는 노동자의 월 초과노동시간은 13시간9분이었다. 초과노동시간만큼 수당을 받는 노동자의 월 초과노동시간 10시간43분보다 약 2시간30분 정도 더 길게 일한 것이다. 대체로 초과노동시간이 긴 사업장에서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비율이 높다는 점을 감안해도 근로기준법상의 법정 초과노동시간인 12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포괄임금제 하에서 초과노동에 동원되고 있다.

또 보고서에 따르면 포괄임금제를 시행하고 있는 회사 85곳의 구체적인 사례를 조사한 결과, 고정액으로 지급되는 초과노동분의 수당보다 실제 초과노동수당이 더 많을 경우 차액을 정산받을 수 있다고 응답한 곳은 9.4%에 불과했다. 그나마 실제로 차액을 지급한 회사는 단 한 곳뿐이었다. 특히 노동조합이 없을 때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경우도 더 많아 상대적으로 교섭력이 약한 곳에서 개인별로 임금협상과 계약을 하는 경우에 더욱 장시간 노동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도 나왔다.

포괄임금제 직장이 노동시간 더 길어

결국 포괄임금제가 장시간 노동을 지탱하는 제도로 자리잡고 있는 실정에서 개별 노동자의 선택은 오히려 일을 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월급은 정해져 있고, 원치 않게 초과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업무강도라도 줄여서 스스로 부담을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직장에 남아있을수록 자신의 시급은 낮아지는 결과가 나온다. 장시간 노동이 건강 악화와 산업재해 발생 위험을 높이는 외에도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문제가 포괄임금제와는 무관해 보이는 다른 영역의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연봉수준은 높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간당 임금수준이 낮아지면 시급의 하한선인 최저임금을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빠진다. 그리고 최저임금이 낮은 상태로 유지되면 그에 맞춰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자들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일해야 더 많은 임금을 벌 수 있다. 만연한 초과노동이 낮은 최저임금으로 이어지고, 다시 장시간 노동을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정동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사무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만연한 포괄임금제는 사용자들에게 초과근로수당 부담을 줄여 장시간 노동을 부추기고 있다”고 밝혔다.

노동계에서는 포괄임금제를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근로기준법으로도 보장할 수 있는 초과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노동당국의 감독 부실 탓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감독과 처벌이 미미한 수준이라 사업주도 앞장서서 수당을 챙겨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포괄임금제 규제와 더불어 출·퇴근시간 기록 및 보존을 의무화하고 이에 따라 기업의 노동시간을 공시하는 방안 등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당국의 감독 부족 비판에 대해 노동부는 최근 실시한 현장 노동민원 접수 사업인 현장노동청 운영 등 정책 시행과정에서의 현장성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영주 노동부 장관은 현장노동청 결과 보고대회에서 “집무실에 ‘고용노동 현장행정실 상황판’을 설치하고 매년 정기적으로 현장노동청 운영을 추진하는 등 국민의 목소리를 노동행정에 계속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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