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뉴스]다시 짚어보는 '필로티' 논쟁..유죄일까 무죄일까
[경향신문]

엿가락처럼 휘어진 기둥과 그 사이로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앙상한 철근들…. 1층에 벽체 없이 기둥만 세워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필로티 구조’로 지어진 빌라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사진은 지난 15일 발생한 경북 포항 강진의 피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됐다. 이번 강진으로 한반도가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이 다시한번 입증되면서 그간 우리가 얼마나 지진 위험에 무감각하게 대응해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제적 장면이기도 하다.
■필로티는 지진에 취약한가
필로티(Pilotis)는 말뚝·기둥이라는 뜻으로,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고안한 건축 양식이다. 공간의 개방감을 극대화해 건축물로 인해 사람과 차량의 동선이 막히지 않도록 한 기법이다. 파리의 스위스 학생회관이나 마르세유 아파트도 필로티 구조로 지어졌다.
우리 주변에서도 필로티 구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대개의 원룸이나 빌라, 다세대주택 등이 1층을 주차장이나 상가로 활용하기 위해 필로티 구조를 적용해왔다. 대지 면적이 협소한 곳에도 주차장(혹은 점포시설)과 거주공간을 모두 집어넣을 수 있는 데다, 보안이나 사생활 보호 등의 이유로 1층을 꺼리는 거주 수요까지 해결할 수 있어 각광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항 지진 이후 필로티 구조는 ‘공공의 적’이 된 분위기다. 소셜미디어에는 “필로티 빌라에 살고있는데 벽에 금이 갔다. 불안하다”는 하소연이 넘쳐난다. 건설·부동산 시장에선 필로티 수요가 이전보다 급격히 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근대건축물의 혁신으로까지 평가받는 필로티가 한순간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기둥으로만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필로티는 기둥과 보와 벽으로 이뤄진 일반 건축물보다 상대적으로 지진에 취약할 수 있다. 건물에는 중력에 따라 평소 수직 방향으로 하중이 작용하는데,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 발생하면 하중이 수평 방향으로 바뀐다. 버스가 급출발하면 승객들이 뒤로 넘어지는 것처럼, 지진으로 건물에 충격이 가 손상을 입는다. 필로티가 지진하중을 버티려면 1층부터 건물 꼭대기까지 연속된 기둥으로 연결돼 있어야 한다.
정광량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회장은 “국내 필로티 건축에선 하층 주차장 기둥은 기둥식인데 상층 주거용 공간은 벽식으로 돼 있는 경우가 많다”며 “구조상 하부가 약하기 때문에 지진같은 횡력이 오면 큰 충격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99년 대만 치치 지진 때에도 필로티 건축물 피해가 컸다. 지진이 잦은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등에서는 내진보강을 할 때 필로티 건물들을 우선순위로 꼽는다.
■“바보야, 문제는 ‘부실시공’이야” 필로티 구조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건축도시공간연구소 조영진 부연구위원은 “필로티는 무죄이며, 우리나라의 저층 필로티 주택이 문제인 것”이라고 말한다. 설계와 시공 기준을 제대로 지켰다면 안전에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포항 지진으로 피해를 본 건물들을 점검해보니 부실 시공 의혹이 짙었다. 한 필로티 4층 빌라의 경우 기둥의 피복, 즉 철근을 감싼 겉 콘크리트 두께가 4㎝ 정도여야 하는데 10㎝가 넘었다. 피복이 두껍다는 것은 중심부의 철근이 그만큼 가늘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지진하중을 견딜 힘이 적어진다.
변칙 필로티도 문제다. 기둥이 부서진 필로티 빌라들을 보면 건물 중심에 있어야 할 계단실이 한쪽 귀퉁이 등에 쏠려 있다. 건축학에서 ‘편심코어’라 부르는 이런 방식으로 지을 경우 계단실 반대편에 벽을 넣거나 기둥을 추가해 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주차장을 넓게 쓰려고 편심코어를 만들면서도 보강 작업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영진 부연구위원은 “문제가 된 필로티 건물들은 비파괴검사 등 정밀안전진단을 통해 철근 배열이 제대로 돼있는지, 구조계산서에 적힌대로 철근이 들어갔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필로티 설계와 배열, 시공을 제대로 하면 지진하중을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 필로티 건물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한 기폭제는 2002년 다세대·다가구 주택 1층에 주차장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한 것이었다. 건물주들은 땅을 파서 지하 주차장을 만드는 것보다 공사 기간과 비용이 덜 드는 필로티를 선호했다. 게다가 주차장은 용적률 계산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필로티를 세우면 1층을 용적률 계산에서 뺄 수 있다. 2014년 개정된 건축법은 건물 높이를 산정할 때도 필로티 부분을 제외하도록 했다. 외관상 5층짜리 빌라도 4층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서울의 한 공인중개사는 “높이 제한이나 용적률은 수익률에 중요하기 때문에 건물주들에게는 필로티가 가장 경제적인 건축물이었다”며 “정부가 사실상 필로티 구조를 장려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1층 건물도 내진설계해야 문제는 내진설계 등 구조 안전성 확보에는 소홀했다는 점이다. 내진설계 의무적용 대상을 점차 확대하는 추세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5층 이하 필로티 건물은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1988년 처음 도입된 내진설계 의무 규정은 6층 이상 또는 연면적 10만㎡ 이상 건축물에만 적용됐다. 그로부터 27년 후인 2015년에야 3층 이상 또는 500㎡ 이상으로 확대됐다. 다음달부터 내진설계 의무 적용 대상이 2층 이상 또는 연면적 200㎡ 이상 건축물과 신규 주택으로 확대되지만, 1988년부터 2015년 사이 지어진 5층 이하 건물의 내진성능은 장담할 수 없다.
때문에 내진보강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건축업계에서는 건물 구조체의 내진성능을 향상시키거나 건물에 작용하는 지진 하중을 줄이는 방식을 거론한다. 기둥 주변을 콘크리트로 덧씌우거나 고탄성 섬유재로 감싸 손상을 막아주는 구조체 보강, 댐퍼라고 불리는 충격 흡수재를 설치하는 지진하중 경감법이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포항 지진을 계기로 전 사회적으로 내진설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김재관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당초 내진설계 의무 적용 대상에서 저층 구조물을 제외했던 게 잘못”이라며 “미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는 1층 건물도 내진설계 대상”이라고 말했다.
■주택 건축 내진기준도 이 참에 정비해야 또한 현재는 건축사 등 비전문가도 5층 이하 건물의 내진설계를 할 수 있다. 저층 건물도 고층 건물처럼 건축구조기술사가 내진설계를 맡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정광량 회장은 “경제논리에 따라 규제를 완화하더라도 안전 규제는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반이 물렁물렁해지는 액상화 현상에도 대비해야 한다. 액상화가 발생한 지역에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연약한 지반을 단단하게 해주기 위해 잡석 등을 깔아주는 치환작업이나 모래를 밀어넣어 다지는 모래다짐 말뚝 공법, 파이프로 물을 먼저 빼내는 식의 지하수위를 낮추는 방식 등이 있다.
한 지반공학 전문가는 “이미 내진설계에는 액상화 가능성이 있는 지반은 개량하거나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평가 항목이 있다”며 “교량 등 사회간접기반(SOC) 공사에서처럼, 주택 건축에서도 그동안 등한시해온 내진설계 기준을 이번 기회에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희 기자 mong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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