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거부한 '투명가방끈'.."나를 죽이지 않고 사랑하겠다"

이정규 기자,박정연 기자 2017. 11. 2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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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11명 대학 거부 선언.. "대학만이 정답은 아니다"

[이정규 기자,박정연 기자]

 

2017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23일, 청소년 11명이 수능 거부를 선언했다. 이들은 "대학만이 정답은 아니"며 "우리 삶을 존중하라"고 밝혔다.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투명가방끈)'은 이날 오전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 일대에서 대학 입시 거부 선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투명가방끈은 경쟁 교육이 만연한 사회를 바꾸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모인 단체다.

수능 거부 선언은 모두를 똑같이 만드는 입시교육을 벗어나려는 선언이다. 학력 비교와 대학 서열화를 깨고자 기자회견에 참여한 청소년들은 "다양한 삶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세상이 우리가 꿈꾸는 목표"라고 말했다.

 

▲대학 거부 선언 참가자가 서로 피켓을 들어주며 발언을 진행하고 있다. ⓒ프레시안(박정연)


이날 수능 거부 선언에 참여한 열아홉 살 정재현 씨는 "입시경쟁에 지쳐 자살을 선택한 학생과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버릇처럼 어머니는 너는 그렇게 죽지 않고 좋은 세상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수능을 거부한 이유를 밝혔다. 그는 "올해 수능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는 사람이 생기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장주현 씨는 "기숙사에서 하루 18시간 앉아서 공부하다 우울증, 변비, 목 디스크 등 병을 앓았다"며 "울면서 병원에 실려나가는 친구를 보면서 자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조금만 참으면 인생이 펴진다는 어른들 조언을 들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며 수능 거부 선언에 참여한 이유를 말했다.

비인가 대안학교를 다닌 라혜민 씨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지 않고 교복도 입지 않았다. 일반 학생과는 다른 환경에 살았기에 대학에 진학하라는 압박에서 벗어나 살았다. 그래서 대학을 가지 않는 삶을 선택한 그는 "19살에게 인생계획을 설명하라는 일은 과한 요구"라며 "어차피 대학에 가도 인생계획은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 거부를 통해 내 인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며 "비난받지 않고 살아가는 용기와 힘을 얻고 싶다"고 덧붙였다.

포항 지진으로 수능이 연기되자 포항 수험생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난 점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지난해 5월에 자퇴 한 뒤 수능을 거부한 이현민 씨는 "(포항 수험생을 비난하는) 개개인이 나쁘기보다 수능에 모든 걸 걸게 하는 입시제도가 문제"라며 "우리 대학 거부 선언이 수험생에게 힘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투명가방끈은 이날 대학 거부 선언이 끝난 후 4대 요구안을 발표했다. 요구사항은 △경쟁과 차별이 이뤄지는 입시교육에 반대 △입시 위주를 넘어선 교육권 보장 △대학진학이 강제되지 않는 사회 지향 △비대졸자가 차별과 편견을 받지 않고 타인과 관계 맺을 권리 등이다.

올해 투명가방끈 대학 입시 거부 선언에 참여한 청소년은 11명이다. 그중 기자회견에는 9명이 참석했다. 교육 활동가 9명도 이들을 북돋아 주기 위해 기자회견에 왔다. 운영회원 공현 씨는 "대학 입시 거부 선언에 동참한 청소년이 한 자릿수로 줄어들다 올해 두 자릿수가 되었다"며 "작년 촛불 영향이 있는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지금까지 투명가방끈 대학 입시 거부 선언에 2011년 48명, 2013년 7명, 2014년 3명, 2015년 5명이 동참했다.

이날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은 청소년을 불안으로 내모는 거짓말을 깨트리자며 '뻥치기' 퍼포먼스를 했다. 그들은 대학 서열화, 입시 강요, 학력차별 등의 메시지가 담긴 패널을 주먹으로 깨부쉈다. 다양한 삶을 상상하자는 의미에서 그들 모두는 핑크, 파랑, 노랑 등, 다양한 색깔 옷을 입기도 했다.

 

▲대학 거부 선언 참가자가 서로 피켓을 들어주며 발언을 진행하고 있다. ⓒ프레시안(박정연)

 

아래는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대학 입시 거부자 박성우 씨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학교를 투견장으로 만든 수능을 거부한다"

 

프레시안 : 모두발언에서 학교는 어떤 곳인지 묻고 싶다는 질문을 던졌다. 본인에게 학교는 어떤 공간이었나.

 

박성우 : 일종의 투견장이었다. 입시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오긴 했지만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으로) 친구들이 서로를 물어뜯거나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둘 중 하나의 모습으로 살아오는 것을 지켜봤다. 학교라는 곳은 경쟁을 강요했다. 내가 친구를 이기겠다고 결심하면,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을 버려야 했다.

 

프레시안 : 무엇을 위해 경쟁했나.

 

박성우 : 그걸 모르겠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모르지만 위에서 그렇게 얘기해왔으니까 대학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그 이유가 대학 입시 거부를 선언하게 된 계기가 됐나.

 

박성우 : 그렇다. 그리고 대학생들이 말하는 대학의 모습을 듣고 나니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꿈꿨던 대학은 고등학교와는 다른 건강한 곳이라 상상했는데 ‘고등학교가 3~4년 더 연장되는 것과 다름없다’라는 말을 듣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 대학은 어떤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박성우 : 학문을 하는 곳이니까 학문을 해야 한다. 현재 대학생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문의 공간으로서 스스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이 됐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학교에서 경쟁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는데 수능이 없어지고 학교에서 대학 입시를 강요하지 않으면 투견장이 된 학교에서 경쟁이 사라질까.

 

박성우 : '이거 아니면 안 돼'라는 큰 부담감은 사라지지 않을까. 사실 경쟁 자체는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점수와 등급으로 계속해서 평가받아왔다. 교육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대학 입학처, 기업 담당자가 사람을 편리하게 뽑기 위해 (등급을 매기는) 이 시스템은 (대학 입시가 없어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을 숫자로 매기거나 효율적으로 나누는 시스템이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될 것 같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에서 대학 입시가 없어져도 경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학 거부 선언은 어떤 의미가 있나.

 

박성우 : 좋을지 나쁠지는 개인의 판단이겠지만 (획일적인) 문화 속에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알려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문화와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보는 시선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기자회견이라는 평범하지 않고, 쉽게 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목소리를 알린 것이다.

 

프레시안 : 거부 선언을 한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지 궁금하다.

 

박성우 : 학교에 갇혀있으면서 하지 못했던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박성우 : 입시 경쟁을 하는 학생들에게 짤막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런 일을 찾는다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꿈 없이 대학을 썼던 나의 친구처럼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정규 기자,박정연 기자 (fara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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