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잠실 운동장에는 가끔씩, 이미 승패가 결정된 순간 등판해 신통치 않은 공으로 아웃카운트보다도 많은 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하는 30대 중반의 투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기이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응원석 곳곳에서 이 투수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팬들은 특별히 그를 응원하기 위해 작정하고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승패가 결정 난 탓에 실없는 농담이나 뱉으며 나갈 채비를 하려다 장내방송에서 문득 이 투수 이름이 흘러나오면 흠칫 놀라 마운드로 나오는 투수의 얼굴을 살피고,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응원 소리에 투수가 쑥스러운 듯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면, 그럼 그 정수리에 휑하니 비어있는 머리털자리만큼 응원부대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응원석을 눈시울 짓도록 만든 이 투수… 그는 김건우 선수입니다. 1980년대 고교야구 전성기의 전설적인 스타이자 1986년 프로야구 신인왕.
야구의 추억 :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편은 ‘영원한 신인왕’, 김건우 선수가 주인공입니다.
1980년, 프로 스포츠가 출범하기 직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는 단연 고교야구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초반 고교야구 최강자로 꼽힌 학교는 선동열 선수의 광주일고와 이상군 선수의 천안북일고였죠.
하지만 정작 그 해 가장 빛났던 것은, 광주일고의 선동열 선수를 투런 홈런 포함 3안타로 두들기며 넉아웃시킨 동시에 마운드에서는 4.2이닝동안 삼진 8개를 뽑아냈던 천재 박노준 그리고 그 해 ‘이영민 타격상’의 주인이었던 김건우 선수라는 ‘2학년생 쌍두마차’가 이끈 선린상고였습니다.
그것은 숱하게 뜨고 졌던 또 하나 명문고교팀의 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수한 여학생들이 선린상고 담장 안으로 편지를 적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야구장으로 달려가 거칠었던 객석을 여린 환호성으로 들뜨게 했던 문화현상이었죠.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서울 팀 선수들다운 깔끔한 용모에 간결한 팀컬러로 통쾌한 하극상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그들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인기를 한 몸에 모으며 고교야구의 마지막 절정기를 장식했던 것입니다.
정작 그 둘이 3학년에 올라서 전국대회를 완벽히 평정하리라고 생각했던 81년에는, 잇단 불운에 단 한 개의 우승컵도 가져갈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뒤집어써야 했던 ‘무관의 제왕’이라는 비장한 별명과 황금사자기 결승전 홈 슬라이딩 때 발목이 부러진 채 병실에 누워있던 박노준 선수의 모습은 이십년이 넘도록 그 시절 여고생 팬들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불도장 같은 것이 되어버리기도 했죠.
당연하게도 선린상고 신화의 핵심에는 박노준 선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김건우 선수는 박노준 선수의 조력자로서, 혹은 항상 한 걸음 뒤를 지켜 달리며 그 빛을 가리지 않는 조연급 경쟁자로서 환영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박노준 선수이 가장 밝게 불타올랐던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김건우 선수의 신화였습니다. 그 한 조짐으로 1981년, 2학년 때까지 타자에만 전념했던 김건우 선수는 투수훈련을 처음 시작하던 그 해 미국 뉴워크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대형사고’를 치고 맙니다. 그 대회 한국 우승에 선동열 선수 다음 가는 공로를 세운 것이 바로 김건우 선수였던 것이죠.
그 후 대학에 진학한 김건우 선수는 다시 타자로 돌아갔고, 투수는 잠깐의 외도로 기억에 남는 듯했습니다. 한양대를 졸업한 1986년 박노준 선수에 밀려 서울 2순위로 MBC 청룡에 입단했을 때도 그의 역할은 타자였음이 분명합니다.
그 해 MBC청룡의 마운드는 탄탄했었습니다. 김용수 선수가 2년차를 맞아 마무리로 전환했고, 선발진에는 원년 이래의 에이스 하기룡 선수를 중심으로 정삼흠, 김태원, 오영일 같은 젊은 유망주들이 즐비했죠.
굳이 아마추어를 대표하던 강타자 김건우 선수가 익숙지도 않은 마운드를 욕심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그가 고교시절 잠시 투수를 했던 이유는 박노준 선수의 체력을 관리해주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그의 역할은 선발로 나와 경기를 앞설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바람잡이’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당시 MBC 청룡 팀의 투수 운용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본인 코치 미즈다니는 동계훈련 중 캐치볼을 하던 김건우 선수에게서 범상치 않은 면모를 발견해냈고 그의 진언대로 김동엽 감독은 김건우 선수에게 투수훈련을 지시합니다.
그 해 3월 30일 롯데 전에서 2이닝을 던지며 실전훈련을 마친 그는 4월 3일 청보 핀토스와의 경기에 선발로 투입되었고, 실질적인 투수 데뷔전이던 그 경기에서 1안타 완봉승을 거두는 경악스러운 ‘사고’를 재현해내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4월 한 달 간 또 한 번의 완봉승과 완투승을 곁들이며 5승을 내달렸고, 그 기세로 그 해 기록한 성적이 18승 6패였다. 더욱이 평균자책점은 1.81.
메이저리거 류현진 선수조차 미처 넘지 못했던 데뷔 첫 해 최다승 기록입니다. 놀랍게도 당시 한 시즌 경기 수는 108경기. 이닝 수는 류현진 선수의 데뷔 시즌보다 30이닝 가까이 많은 229.1이닝
고교시절에 이미 140km/h대 중반의 빠른 공을 던진 김건우 선수의 공은, 특히 구속에 비해서도 묵직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장타를 좀체 허용하지 않았고, 내야로 굴린 타구는 김재박 선수와 김인식 선수의 내야진이 깔끔하게 처리해주었죠.
그 해 기대를 모은 하기룡, 김태원, 정삼흠이 모두 무너진 청룡의 마운드에서 18승 선발투수 김건우와 35세이브 포인트의 구원투수 김용수는 그대로 팀의 등뼈를 이루는 것이었고, 그나마 팀이 중위권에서 버틸 수 있었던 분명한 이유였습니다.
이듬해인 1987년에도 그는 팀의 기둥이었습니다. 9월까지 2점대 평균자책점에 12승. ‘반짝 활약’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했을 뿐 아니라 ‘2년차 징크스’마저 비웃는 꾸준한 활약이었죠.
더구나 선동열 선수와 맞서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뚝심 있는 투구에 청룡 팬들은 환호했습니다. 삼성의 김시진, 롯데의 최동원, 해태의 선동열과 같은 무적의 에이스를 가지게 되었다고 흐뭇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죠. 그리고 그때 예상치 못한 ‘비운’이 다가옵니다.
1987년 9월 12일, 건널목을 건너던 김건우 선수를 한 트럭이 덮쳤고, 그의 두 팔과 한 다리는 조각조각 부서지고 찢어지는 참담한 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꺾인 뼈는 다시 붙었지만, 두 해의 공백은 이미 어깨와 팔다리 곳곳의 근육을 흐트러 놓았습니다. 1989년 마운드에 복귀해 이를 악물고 공을 던졌지만, 이미 사고 전에 비해 10km/h는 떨어진 구속에 무뎌진 변화각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해부터 1991년까지 기록한 승수가 합쳐서 6승. 이미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청룡의 팬들이 생겨나던 시점이었죠.
1991년에 김건우 선수는 타석으로 포지션을 변경합니다. 대학시절 이후 몇 해 동안이나 놓은 방망이가 어색했지만 몇 번의 스윙만으로도 감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7월쯤에는 최다안타 경쟁을 벌이며 팀의 4번으로 올라서기도 했죠.
그러나 한 번 시작된 불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땅볼 타구를 치고 열심히 달려가는 상대 팀 타자 장종훈 선수와 1루에서 충돌한 후, 그의 손목이 다시 한 번 부러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1993년 김건우 선수는 야구장을 떠났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에게 즐거움과 행운을 안겨주었던 야구장은 지긋지긋한 부상과 불운으로 가득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서 버틸 힘이 없었던 것이죠.
이후 그는 2군 투수코치로 후배들을 돌보며 야구를 관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야구장 뒤꼍에서 그는 또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날마다 크고 작은 부상을 끌어안고 미련하게 뒹구는 후배들을 돌보며 자신의 몸이 달리 보였던 것입니다. 왜 저렇게 미련하게 참고 버텨왔던 것일까. 왜 좀 더 현명하게 몸을 추스르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후배들을 돌보며 연구한 재활법을 자신의 몸에 실험했고, 그러다보니 은퇴한 지 서너 해가 지난 어깨로 오히려 더 싱싱해진 공을 뿌릴 수 있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야구장으로 복귀합니다. 1997년이었죠.
“이기지 못해도 좋습니다. 이기고 지는 걸 떠나서 그저 마운드에 서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예전에는 몰랐었습니다.”
그 해, 그의 말대로 그는 단 한 개의 승리나 패전 혹은 세이브를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대개는 승패, 아니 패배가 뚜렷해진 경기를 중심으로 11.2이닝에 나서 6개의 자책점, 11개의 안타와 4개의 사사구를 기록했죠. 초라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팬들을 환호하게 했던 그의 마지막 해 성적이었습니다.
그 해 8월 27일. 레이더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일찌감치 0-5로 점수 차가 벌어지자 천보성 감독은 김건우를 마운드로 불러냅니다. 그때 그와 맞선 네 번째 타자는 바로 박노준 선수. 이미 대학시절을 거쳐 프로에 와서도 투수와 타자 양쪽으로 혹사당하며 천재성을 거세당한 비운의 동반자.
그러나 7번의 수술로 부러지고 끊어진 뼈와 인대를 잇는, 김건우 못지않은 투지와 도전으로 타선의 한 축을 담당하며 레이더스 돌풍을 이끌었던 영원한 라이벌 박노준 역시 그 해 부상 후유증으로 벤치를 지키며 은퇴식 날짜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건우, 김건우’
‘박노준, 박노준’
작지만 힘찬 연호 소리가 양쪽에서 터져 나와, 섞이고, 나뉘고, 결국에는 합쳐지던 그 순간.
타석에 선 왕년의 천재투수 박노준 선수의 스윙이 마운드에 선 왕년의 천재타자 김건우 선수의 3구를 때려냈고, 높이 공중으로 치솟던 공은 중견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두 비운의 스타가 맞붙었던 짧은 마지막 승부는 끝이 났고, 김건우 선수는 말없이 모자를 한 번 벗었다가 다시 눌러썼습니다. 그리고 괜히 콧등이 시큰해진 관중석의 ‘아저씨’들은 먼 산을 보며 담뱃불을 붙여 물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그렇게 기억은 남는 게 아닐까요. 치열함으로 달구어져 처절하게 새겨진, 이제는 기억 속에서마저 흑백으로 떠오르는 그 화려했던 영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늘에서조차 부끄럽지 않게 분투해주었던, 그래서 나 역시 부끄럼 없이 눈물 흘리며 가슴 시리게 기억할 세월을 선사해준 그 시절 우리의 영웅들. 당신들이 그라운드에 있었기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당신들의 팬이었기에 참으로 행복합니다.
야구의 추억 :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편은 ‘비운의 스타’, 김건우 선수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원작 | 김은식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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